"때론 한줄의 기사가 더 詩다웠다"
이시영 시인의 <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 중 6편의 '삶'
이시영 시인(58)이 고단한 삶속에서도 참다운 삶과 죽음의 의미를 생각케 하는 한 권의 묵직한 시집을 펴냈다. <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창비 간)가 그것.
여기에 실린 시인의 시는 틀에서 자유롭다. 특히 신문기사나 다른 사람의 글, 해외여행중 접한 이야기 등을 산문처럼 써내려간 대목은 시인이 이제 기존 틀에서 벗어나 허허(虛虛)로이 자유롭게 시 세계를 펼치는 경지에 들어섰음을 보여준다.
시인은 이와 관련, "이 시집엔 다른 분의 글이나 기사에서 인용한 것들이 많다"며 "때론 한줄의 기사가 그 숱한 '가공된 진실'보다 더 시다웠다. 부디 그분들의 글이 더욱 빛나기를!"이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
다음은 우리에게 아픈 현실을 회피하지 말고 직시하라고 말하는 이시영 시인의 시 여섯 편이다.
어느 영혼이 잘못 없으랴
독일에서 만난 허수경씨 남편은 뚱보에다가 사람 좋아 보이는 털복숭이 수염을 달고 있었는데 허수경씨 옆에서 마냥 즐거워하는 그에게도 아픈 과거가 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노르망디 출신이고 아버지는 베를린 출신인데 말하자면 독일군 병사를 사랑한 죄로 종전 후 그의 어머니는 처녀의 몸으로 주소만 달랑 들고 베를린 애인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놀란 것은 그 집의 식구들, 그들도 아들의 행방을 애타게 찾고 있었는데 웬 프랑스 처녀가? 애인도 없는 집에서 눌러산 지 7년. 어느날 아침 현관 밖에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가 거기에 넋나간 표정으로 서 있는 귀환 장정을 보았답니다. 그러니까 그해가 1952년, 소련 전선에서 포로가 되었다가 그제야 풀려난 것이지요. 그 일년 후에 태어난 그가 모계인 프랑스계 유치원을 다니며 친구들에게 나찌의 자손이라고 손가락질당하며 자란 것은 지금도 지울 수 없는 가장 아픈 기억 중의 하나. 그러나 이제는 그들을 다 용서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아르뛰르 랭보를 너무나 좋아하는 반은 프랑스인. 오늘밤에도 그는 흑맥주잔을 높이 들고 먼 동방에서 온 아내의 친구들 앞에서 랭보의 시를 줄줄 외우곤 합니다. “오 계절이여, 오 성(城)이여, / 어느 영혼이 잘못 없으랴?”
하싼
하싼(45세) 카슈미르에서 온 가장인데 열다섯살 때부터 30년 동안 인도 북서부의 히말라야 휴양도시 심라에서 짐꾼 노릇을 해왔다고 한다. 그는 오늘도 다른 노동자들과 함께 220킬로그램의 기름통을 공평히 등에 지고 5킬로가 넘는 언덕길을 무릎이 무너져내리기 직전까지 간신히 오르는데 정말이지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 때는 “오 신이시여 저희를 도와주소서!”라고 외친다고 한다. 이슬람 사원을 개조해서 만든 미시케라는 공동숙소에서 오늘밤에도 잠들기 전에 그가 올리는 기도는 단 하나! “이 지상에서 힘든 노역은 제발 저희 대에서 그치게 해주십시오.”
고(故) 박흥주 대령
다음은 10.26 당시 중앙정부부장의 수행비서였던 박흥주 대령이 1980년 3월6일 경기도 소래의 한 야산에서 총살형으로 처형되기 직전 그의 부인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아이들에게 이 아빠가 당연한 일을 했으며 그때 조건도 그러했다는 점을 잘 이해시켜 열등감에 빠지지 않도록 긍지를 불러넣어주시오......우리 사회가 죽지 않았다면 우리 가정을 그대로 놔두지는 않을 거요.” 그리고 그는 아직 초등학생인 두 딸에게도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아빠는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다. 주일을 잘 지키고 건실하게 신앙생활을 하여라.”*
그는 당시 행당동 산동네 12평짜리 집에 살고 있었는데, 6년 후 천주교측 인사가 찾아갔을 때 부인은 옆집에서 일하다 말고 남루한 거친 손으로 그를 맞았다고 한다.
*김정남 칼럼, 茶山포럼, 2006년 11월 23일
대통령의 눈물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의 대통령인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가니스탄 대통령(49세)이 연설 도중 눈물을 떨구는 사진이 경향신문 1면에 났다. 다음은 기사의 일부.
"10분쯤 지났을까. 그는 연합군의 폭격으로 불구가 된 소년을 언급하다 눈에 고인 눈물 때문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눈물을 감추기 위해 하얀 손수건을 눈에 대는 순간 한 방울의 눈물이 오른쪽 뺨을 타고 흘러내리다 옷깃에 떨어졌다. 그는 아랫입술을 부르르 떨면서 '가장 잔혹하고 너무나 잔혹스럽다'고 되뇌었다."*
AP통신은 그의 연설로 청중석이 울음바다로 변했다고 전했다. 아프간에선 '테러와의 전쟁'으로 2006년에만 어린이를 포함해 모두 4천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경향신문, 2006년 12월12일
봄날
목련이 활짝 핀 봄날이었다. 인도네시아 출신의 불법체류 노동자 누르 푸아드(30세)는 인천의 한 업체 기숙사 3층에서 모처럼 아내 리나와 함께 단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목련이 활짝 핀 아침이었다. 우당탕거리는 구둣발 소리와 함께 감자기 들이닥친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들이 다짜고짜 그와 아내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기 시작했다. 겉옷을 갈아입겠다며 잠시 수갑을 풀어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 푸아드는 창문을 통해 옆 건물 옥상으로 뛰어내리다 그만 발을 헛디뎌 바닥으로 떨어져 숨지고 말았다. 목련이 활짝 핀 눈부신 봄날 아침이었다.
마지막 편지
1912년 남극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비운의 탐험가 로버트 폴컨 스콧이 아내 캐슬린에게 쓴 마지막 편지가 케임브리지대 '스콧 극연구소'에 의해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서둘러 점심을 먹고 잠시 온기를 느끼는 차에 곧 닥칠 생의 마지막 순간을 준비하면서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되었소......내게 당신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었는지를 알아주었으면 좋겠어."*
그는 편지에서 자신이 죽고 난 뒤 아내가 다른 좋은 사람을 만나 새 인생을 살기 바라며, 세살 난 아들 피터가 자연을 접하면서 성장하기를 바란다는 말도 덧붙였다.
*한겨레, 2007년 1월 12일
여기에 실린 시인의 시는 틀에서 자유롭다. 특히 신문기사나 다른 사람의 글, 해외여행중 접한 이야기 등을 산문처럼 써내려간 대목은 시인이 이제 기존 틀에서 벗어나 허허(虛虛)로이 자유롭게 시 세계를 펼치는 경지에 들어섰음을 보여준다.
시인은 이와 관련, "이 시집엔 다른 분의 글이나 기사에서 인용한 것들이 많다"며 "때론 한줄의 기사가 그 숱한 '가공된 진실'보다 더 시다웠다. 부디 그분들의 글이 더욱 빛나기를!"이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
다음은 우리에게 아픈 현실을 회피하지 말고 직시하라고 말하는 이시영 시인의 시 여섯 편이다.
어느 영혼이 잘못 없으랴
독일에서 만난 허수경씨 남편은 뚱보에다가 사람 좋아 보이는 털복숭이 수염을 달고 있었는데 허수경씨 옆에서 마냥 즐거워하는 그에게도 아픈 과거가 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노르망디 출신이고 아버지는 베를린 출신인데 말하자면 독일군 병사를 사랑한 죄로 종전 후 그의 어머니는 처녀의 몸으로 주소만 달랑 들고 베를린 애인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놀란 것은 그 집의 식구들, 그들도 아들의 행방을 애타게 찾고 있었는데 웬 프랑스 처녀가? 애인도 없는 집에서 눌러산 지 7년. 어느날 아침 현관 밖에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가 거기에 넋나간 표정으로 서 있는 귀환 장정을 보았답니다. 그러니까 그해가 1952년, 소련 전선에서 포로가 되었다가 그제야 풀려난 것이지요. 그 일년 후에 태어난 그가 모계인 프랑스계 유치원을 다니며 친구들에게 나찌의 자손이라고 손가락질당하며 자란 것은 지금도 지울 수 없는 가장 아픈 기억 중의 하나. 그러나 이제는 그들을 다 용서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아르뛰르 랭보를 너무나 좋아하는 반은 프랑스인. 오늘밤에도 그는 흑맥주잔을 높이 들고 먼 동방에서 온 아내의 친구들 앞에서 랭보의 시를 줄줄 외우곤 합니다. “오 계절이여, 오 성(城)이여, / 어느 영혼이 잘못 없으랴?”
하싼
하싼(45세) 카슈미르에서 온 가장인데 열다섯살 때부터 30년 동안 인도 북서부의 히말라야 휴양도시 심라에서 짐꾼 노릇을 해왔다고 한다. 그는 오늘도 다른 노동자들과 함께 220킬로그램의 기름통을 공평히 등에 지고 5킬로가 넘는 언덕길을 무릎이 무너져내리기 직전까지 간신히 오르는데 정말이지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 때는 “오 신이시여 저희를 도와주소서!”라고 외친다고 한다. 이슬람 사원을 개조해서 만든 미시케라는 공동숙소에서 오늘밤에도 잠들기 전에 그가 올리는 기도는 단 하나! “이 지상에서 힘든 노역은 제발 저희 대에서 그치게 해주십시오.”
고(故) 박흥주 대령
다음은 10.26 당시 중앙정부부장의 수행비서였던 박흥주 대령이 1980년 3월6일 경기도 소래의 한 야산에서 총살형으로 처형되기 직전 그의 부인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아이들에게 이 아빠가 당연한 일을 했으며 그때 조건도 그러했다는 점을 잘 이해시켜 열등감에 빠지지 않도록 긍지를 불러넣어주시오......우리 사회가 죽지 않았다면 우리 가정을 그대로 놔두지는 않을 거요.” 그리고 그는 아직 초등학생인 두 딸에게도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아빠는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다. 주일을 잘 지키고 건실하게 신앙생활을 하여라.”*
그는 당시 행당동 산동네 12평짜리 집에 살고 있었는데, 6년 후 천주교측 인사가 찾아갔을 때 부인은 옆집에서 일하다 말고 남루한 거친 손으로 그를 맞았다고 한다.
*김정남 칼럼, 茶山포럼, 2006년 11월 23일
대통령의 눈물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의 대통령인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가니스탄 대통령(49세)이 연설 도중 눈물을 떨구는 사진이 경향신문 1면에 났다. 다음은 기사의 일부.
"10분쯤 지났을까. 그는 연합군의 폭격으로 불구가 된 소년을 언급하다 눈에 고인 눈물 때문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눈물을 감추기 위해 하얀 손수건을 눈에 대는 순간 한 방울의 눈물이 오른쪽 뺨을 타고 흘러내리다 옷깃에 떨어졌다. 그는 아랫입술을 부르르 떨면서 '가장 잔혹하고 너무나 잔혹스럽다'고 되뇌었다."*
AP통신은 그의 연설로 청중석이 울음바다로 변했다고 전했다. 아프간에선 '테러와의 전쟁'으로 2006년에만 어린이를 포함해 모두 4천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경향신문, 2006년 12월12일
봄날
목련이 활짝 핀 봄날이었다. 인도네시아 출신의 불법체류 노동자 누르 푸아드(30세)는 인천의 한 업체 기숙사 3층에서 모처럼 아내 리나와 함께 단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목련이 활짝 핀 아침이었다. 우당탕거리는 구둣발 소리와 함께 감자기 들이닥친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들이 다짜고짜 그와 아내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기 시작했다. 겉옷을 갈아입겠다며 잠시 수갑을 풀어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 푸아드는 창문을 통해 옆 건물 옥상으로 뛰어내리다 그만 발을 헛디뎌 바닥으로 떨어져 숨지고 말았다. 목련이 활짝 핀 눈부신 봄날 아침이었다.
마지막 편지
1912년 남극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비운의 탐험가 로버트 폴컨 스콧이 아내 캐슬린에게 쓴 마지막 편지가 케임브리지대 '스콧 극연구소'에 의해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서둘러 점심을 먹고 잠시 온기를 느끼는 차에 곧 닥칠 생의 마지막 순간을 준비하면서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되었소......내게 당신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었는지를 알아주었으면 좋겠어."*
그는 편지에서 자신이 죽고 난 뒤 아내가 다른 좋은 사람을 만나 새 인생을 살기 바라며, 세살 난 아들 피터가 자연을 접하면서 성장하기를 바란다는 말도 덧붙였다.
*한겨레, 2007년 1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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