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수필가' 피천득 선생 영면
'인연' '수필' '눈보라 치는 밤의 추억' 등 명수필 남겨
고교 국어교과서에 실렸던 수필 '인연'으로 잘 알려진 수필가 피천득 서울대 명예교수가 25일 오후 11시40분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7세.
재작년까지만 해도 집 주변에서 산책을 할 정도로 건강했지만 폐렴을 앓아 작년 초 건강이 악화되면서 거의 집안에서만 지내왔다오던 피 교수는 이달 10일께 병세가 갑자기 악화되면서 서울 아산병원에 입원해 보름 넘게 치료를 받아왔다.
20여 년 전 "더 이상 산문을 쓰지 않겠다"고 선언한 이후 부인(90)과 서울 서초동 자택에서 생활해온 고인은 아침 일찍 일어나 책을 읽고 고전 음악을 듣는 등 규칙적인 생활을 유지해왔다.
1910년 5월29일 서울에서 태어난 고인은 중국 상하이 공보국 중학을 거쳐 1937년 호강대 영문과를 졸업한 뒤 일제 강점 하의 조국으로 돌아와 경성중앙산업학원 교사로 근무했다. 광복 직후인 1945년 경성제국대학 예과 교수를 거쳐 1946년부터 30여 년 간 서울대 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많은 후배 영문학자들을 키워내기도 했다.
그는 등단 초기 잡지 '동광'에 시 '소곡'(1932), 수필 '눈보라치는 밤의 추억'(1933) 등을 발표하며 시인이자 수필가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33-34년 발표한 '눈보라 치는 밤의 추억' '기다리는 편지' 등 생활에 얽힌 이야기를 바탕으로 풀어낸 서정성 넘치는 수필들은 독자들로부터 큰 호평을 받았다.
특히 피 교수가 일본 유학시절 연모의 정을 품었던 소녀 아사코와의 인연을 담담한 문체로 풀어 낸 '인연'은 교과서에 수록되면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 입에 회자되는 한국의 대표적 명수필로 꼽힌다.
수필 형식으로 쓴 수필론 '수필'도 은유법을 적절히 구사해 수필의 본질과 특질을 잘 나타낸 그의 또 다른 대표작이다.
수필 외에도 시집으로 <생명>을 비롯해 소설 <은전 한 닢>, 번역서 <내가 사랑하는 시> <소네트 시집>, 평론 '노산시조집을 읽고' '춘원선생' 등을 남겼다. 인촌상(1995), 은관문화훈장(1999), 자랑스러운서울대인상(1999) 등을 수상했다.
유족으로는 부인과 아들 세영(치과기공소 운영) 수영(서울 아산병원 소아과 의사), 딸 서영(미국 보스턴대 물리학과 교수)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20호실. 발인은 29일 오전 7시. 장지 남양주시 화도읍 모란공원.
다음은 고 피천득 교수가 쓴 명수필 '인연' 전문과 '수필'의 한 구절
수필 '인연'
"지난 사월 춘천에 가려고 하다가 못 가고 말았다. 나는 성심여자 대학에 가보고 싶었다. 그 학교에 어느 가을 학기, 매주 한 번씩 출강한 일이 있다.
힘드는 출강을 한 학기 하게 된 것은, 주수녀님과 김수녀님이 내 집에 오신 것에 대한 예의도 있었지만 나에게는 사연이 있었다.
수십 년 전 내가 열일곱 되던 봄, 나는 처음 동경(東京)에 간 일이 있다. 어떤 분의 소개로 사회 교육가 미우라(三浦) 선생 댁에 유숙을 하게 되었다.
시바꾸 시로가네(芝區白金)에 있는 그 집에는 주인 내외와 어린 딸 세 식구가 살고 있었다.
하녀도 서생도 없었다. 눈이 예쁘고 웃는 얼굴을 하는 아사코(朝子)는 처음부터 나를 오빠같이 따랐다.
아침에 낳았다고 아사코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하였다. 그 집 뜰에는 큰 나무들이 있었고 일년초 꽃도 많았다. 내가 간 이튿날 아침, 아사코는 '스위트피이'를 따다가 꽃병에 담아 내가 쓰게 된 책상 위에 놓아주었다.
'스위트피이'는 아사코같이 어리고 귀여운 꽃이라고 생각하였다. 성심(聖心) 여학원 소학교 일 학년인 아사코는 어느 토요일 오후 나와 같이 저희 학교까지 산보를 갔었다.
유치원부터 학부까지 있는 카톨릭 교육 기관으로 유명한 이 여학원은 시내에 있으면서 큰 목장까지 가지고 있었다.
아사코는 자기 신발장을 열고 교실에서 신는 하얀 운동화를 보여 주었다.
내가 동경을 떠나던 날 아침, 아사코는 내 목을 안고 내 뺨에 입을 맞추고, 제가 쓰던 작은 손수건과 제가 끼던 작은 반지를 이별의 선물로 주었다.
옆에서 보고 있던 선생 부인은 웃으면서 "한 십년 지나면 좋은 상대가 될 거예요"하였다. 나는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아사코에게 안델센의 동화책을 주었다.
그 후 십 년이 지나고 삼사 년이 더 지났다. 그 동안 나는 국민학교 일 학년 같은 예쁜 여자아이를 보면 아사코 생각을 하였다. 내가 두 번째 동경에 갔던 것도 사월이었다. 동경역 가까운데 여관을 정하고 즉시 미우라 선생 댁을 찾아갔다. 아사코는 어느덧 청순하고 세련되어 보이는 영양(令孃)이 되어 있었다. 그 집 마당에 피어 있는 목련꽃과 같이.
그때 그는 성심 여학교 영문과 삼학년이었다. 나는 좀 서먹서먹했으나, 아사코는 나와의 재회를 기뻐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 어머니가 가끔 내 말을 해서 나의 존재를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그 날도 토요일이었다. 저녁 먹기 전에 같이 산책을 나갔다. 그리고 계획하지 않은 발걸음은 성심 여학원 쪽으로 옮겨졌다. 캠퍼스를 두루 거닐다가 돌아올 무렵, 나는 아사코 신발장은 어디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는 무슨 말인가 하고 나를 쳐다보다가, 교실에는 구두를 벗지 않고 그냥 들어간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갑자기 뛰어가서 그 날 잊어버리고 교실에 두고 온 우산을 가지고 왔다.
지금도 나는 여자 우산을 볼 때면 연두색이 고왔던 그 우산을 연상한다. <쉘부르의 우산>이라는 영화를 내가 그렇게 좋아한 것도 아사꼬의 우산 때문인가 한다.
아사꼬와 나는 밤늦게까지 문학 이야기를 가벼운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새로 출판된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세월>에 대해서도 이야기한 것 같다.
그 후 또 십여 년이 지났다. 그 동안 제2차 세계 대전이 있었고 우리 나라가 해방이 되고 또 한국 전쟁이 있었다. 나는 어쩌다 아사코 생각을 하곤 했다. 결혼은 하였을 것이요, 전쟁통에 어찌 되지나 않았나, 남편이 전사하지나 않았나 하고 별별 생각을 다 하였다.
1954년 처음 미국 가던 길에 나는 동경에 들러 미우라 선생 댁을 찾아갔다. 뜻밖에 그 동네가 고스란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미우라 선생네는 아직도 그 집에 살고 있었다.
선생 내외분은 흥분된 얼굴로 나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아사코는 전쟁이 끝난 후 맥아더 사령부에서 번역 일을 하고 있다가, 거기서 만난 일본인 2세(二世)와 결혼을 하고 따로 나서 산다는 것이었다.
아사코가 전쟁 미망인이 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그러나 2세(二世)와 결혼하였다는 것은 마음에 걸렸다. 만나고 싶다고 그랬더니 어머니가 아사코의 집으로 안내해 주었다.
뾰족 지붕에 뾰족 창문들이 있는 작은 집이었다. 이십여 년전 내가 아사코에게 준 동화책 겉장에 있는 집도 이런 집이었다. "아, 이쁜 집! 우리 이담에 이런 집에서 같이 살아요." 아사코의 어린 목소리가 지금도 들린다.
십 년쯤 미리 전쟁이 나고 그만큼 일찍 한국이 독립되었더라면 아사코의 말대로 우리는 같은 집에서 살 수 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뾰족 지붕에 뾰족 창문들이 있는 집이 아니라도 이런 부질없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집에 들어서자 마주친 것은 백합같이 시들어 가는 아사코의 얼굴이었다. <세월>이란 소설 이야기를 한 지 십 년이 더 지났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싱싱하여야 할 젊은 나이다.
남편은 내가 상상한 것과 같이 일본 사람도 아니고, 미국 사람도 아닌, 그리고 진주군(進駐軍) 장교라는 것을 뽐내는 것 같은 사나이였다. 아사코와 나는 절을 몇 번씩하고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
그리워하는 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꼬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
수필 '오월' 중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년의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있는 비취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스물한 살이었던 오월 불현듯 밤차를 타고 피서지에 간 일이 있다. 해변 가에 엎어져 있는 보트, 덧문이 닫혀있는 별장들 그러나 시월같이 쓸쓸하지는 않았다. 가까이 보이는 섬들이 생생한 색이었다. 얻었도다 애정의 고통을(得了愛情痛苦) 버렸도다 애정의 고통을(失了愛情痛苦) 젊어서 죽은 중국 시인의 이 글귀를 모래 위에 써 놓고 나는 죽지 않고 돌아왔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 하리. 나는 오월 속에 있다. 연한 녹색은 나날이 번져 가고 있다. 어느덧 짙어지고 말 것이다. 머문 듯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유월이 되면 원숙한 여인 같이 녹음이 우거지리라. 그리고 태양은 정열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재작년까지만 해도 집 주변에서 산책을 할 정도로 건강했지만 폐렴을 앓아 작년 초 건강이 악화되면서 거의 집안에서만 지내왔다오던 피 교수는 이달 10일께 병세가 갑자기 악화되면서 서울 아산병원에 입원해 보름 넘게 치료를 받아왔다.
20여 년 전 "더 이상 산문을 쓰지 않겠다"고 선언한 이후 부인(90)과 서울 서초동 자택에서 생활해온 고인은 아침 일찍 일어나 책을 읽고 고전 음악을 듣는 등 규칙적인 생활을 유지해왔다.
1910년 5월29일 서울에서 태어난 고인은 중국 상하이 공보국 중학을 거쳐 1937년 호강대 영문과를 졸업한 뒤 일제 강점 하의 조국으로 돌아와 경성중앙산업학원 교사로 근무했다. 광복 직후인 1945년 경성제국대학 예과 교수를 거쳐 1946년부터 30여 년 간 서울대 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많은 후배 영문학자들을 키워내기도 했다.
그는 등단 초기 잡지 '동광'에 시 '소곡'(1932), 수필 '눈보라치는 밤의 추억'(1933) 등을 발표하며 시인이자 수필가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33-34년 발표한 '눈보라 치는 밤의 추억' '기다리는 편지' 등 생활에 얽힌 이야기를 바탕으로 풀어낸 서정성 넘치는 수필들은 독자들로부터 큰 호평을 받았다.
특히 피 교수가 일본 유학시절 연모의 정을 품었던 소녀 아사코와의 인연을 담담한 문체로 풀어 낸 '인연'은 교과서에 수록되면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 입에 회자되는 한국의 대표적 명수필로 꼽힌다.
수필 형식으로 쓴 수필론 '수필'도 은유법을 적절히 구사해 수필의 본질과 특질을 잘 나타낸 그의 또 다른 대표작이다.
수필 외에도 시집으로 <생명>을 비롯해 소설 <은전 한 닢>, 번역서 <내가 사랑하는 시> <소네트 시집>, 평론 '노산시조집을 읽고' '춘원선생' 등을 남겼다. 인촌상(1995), 은관문화훈장(1999), 자랑스러운서울대인상(1999) 등을 수상했다.
유족으로는 부인과 아들 세영(치과기공소 운영) 수영(서울 아산병원 소아과 의사), 딸 서영(미국 보스턴대 물리학과 교수)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20호실. 발인은 29일 오전 7시. 장지 남양주시 화도읍 모란공원.
다음은 고 피천득 교수가 쓴 명수필 '인연' 전문과 '수필'의 한 구절
수필 '인연'
"지난 사월 춘천에 가려고 하다가 못 가고 말았다. 나는 성심여자 대학에 가보고 싶었다. 그 학교에 어느 가을 학기, 매주 한 번씩 출강한 일이 있다.
힘드는 출강을 한 학기 하게 된 것은, 주수녀님과 김수녀님이 내 집에 오신 것에 대한 예의도 있었지만 나에게는 사연이 있었다.
수십 년 전 내가 열일곱 되던 봄, 나는 처음 동경(東京)에 간 일이 있다. 어떤 분의 소개로 사회 교육가 미우라(三浦) 선생 댁에 유숙을 하게 되었다.
시바꾸 시로가네(芝區白金)에 있는 그 집에는 주인 내외와 어린 딸 세 식구가 살고 있었다.
하녀도 서생도 없었다. 눈이 예쁘고 웃는 얼굴을 하는 아사코(朝子)는 처음부터 나를 오빠같이 따랐다.
아침에 낳았다고 아사코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하였다. 그 집 뜰에는 큰 나무들이 있었고 일년초 꽃도 많았다. 내가 간 이튿날 아침, 아사코는 '스위트피이'를 따다가 꽃병에 담아 내가 쓰게 된 책상 위에 놓아주었다.
'스위트피이'는 아사코같이 어리고 귀여운 꽃이라고 생각하였다. 성심(聖心) 여학원 소학교 일 학년인 아사코는 어느 토요일 오후 나와 같이 저희 학교까지 산보를 갔었다.
유치원부터 학부까지 있는 카톨릭 교육 기관으로 유명한 이 여학원은 시내에 있으면서 큰 목장까지 가지고 있었다.
아사코는 자기 신발장을 열고 교실에서 신는 하얀 운동화를 보여 주었다.
내가 동경을 떠나던 날 아침, 아사코는 내 목을 안고 내 뺨에 입을 맞추고, 제가 쓰던 작은 손수건과 제가 끼던 작은 반지를 이별의 선물로 주었다.
옆에서 보고 있던 선생 부인은 웃으면서 "한 십년 지나면 좋은 상대가 될 거예요"하였다. 나는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아사코에게 안델센의 동화책을 주었다.
그 후 십 년이 지나고 삼사 년이 더 지났다. 그 동안 나는 국민학교 일 학년 같은 예쁜 여자아이를 보면 아사코 생각을 하였다. 내가 두 번째 동경에 갔던 것도 사월이었다. 동경역 가까운데 여관을 정하고 즉시 미우라 선생 댁을 찾아갔다. 아사코는 어느덧 청순하고 세련되어 보이는 영양(令孃)이 되어 있었다. 그 집 마당에 피어 있는 목련꽃과 같이.
그때 그는 성심 여학교 영문과 삼학년이었다. 나는 좀 서먹서먹했으나, 아사코는 나와의 재회를 기뻐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 어머니가 가끔 내 말을 해서 나의 존재를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그 날도 토요일이었다. 저녁 먹기 전에 같이 산책을 나갔다. 그리고 계획하지 않은 발걸음은 성심 여학원 쪽으로 옮겨졌다. 캠퍼스를 두루 거닐다가 돌아올 무렵, 나는 아사코 신발장은 어디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는 무슨 말인가 하고 나를 쳐다보다가, 교실에는 구두를 벗지 않고 그냥 들어간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갑자기 뛰어가서 그 날 잊어버리고 교실에 두고 온 우산을 가지고 왔다.
지금도 나는 여자 우산을 볼 때면 연두색이 고왔던 그 우산을 연상한다. <쉘부르의 우산>이라는 영화를 내가 그렇게 좋아한 것도 아사꼬의 우산 때문인가 한다.
아사꼬와 나는 밤늦게까지 문학 이야기를 가벼운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새로 출판된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세월>에 대해서도 이야기한 것 같다.
그 후 또 십여 년이 지났다. 그 동안 제2차 세계 대전이 있었고 우리 나라가 해방이 되고 또 한국 전쟁이 있었다. 나는 어쩌다 아사코 생각을 하곤 했다. 결혼은 하였을 것이요, 전쟁통에 어찌 되지나 않았나, 남편이 전사하지나 않았나 하고 별별 생각을 다 하였다.
1954년 처음 미국 가던 길에 나는 동경에 들러 미우라 선생 댁을 찾아갔다. 뜻밖에 그 동네가 고스란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미우라 선생네는 아직도 그 집에 살고 있었다.
선생 내외분은 흥분된 얼굴로 나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아사코는 전쟁이 끝난 후 맥아더 사령부에서 번역 일을 하고 있다가, 거기서 만난 일본인 2세(二世)와 결혼을 하고 따로 나서 산다는 것이었다.
아사코가 전쟁 미망인이 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그러나 2세(二世)와 결혼하였다는 것은 마음에 걸렸다. 만나고 싶다고 그랬더니 어머니가 아사코의 집으로 안내해 주었다.
뾰족 지붕에 뾰족 창문들이 있는 작은 집이었다. 이십여 년전 내가 아사코에게 준 동화책 겉장에 있는 집도 이런 집이었다. "아, 이쁜 집! 우리 이담에 이런 집에서 같이 살아요." 아사코의 어린 목소리가 지금도 들린다.
십 년쯤 미리 전쟁이 나고 그만큼 일찍 한국이 독립되었더라면 아사코의 말대로 우리는 같은 집에서 살 수 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뾰족 지붕에 뾰족 창문들이 있는 집이 아니라도 이런 부질없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집에 들어서자 마주친 것은 백합같이 시들어 가는 아사코의 얼굴이었다. <세월>이란 소설 이야기를 한 지 십 년이 더 지났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싱싱하여야 할 젊은 나이다.
남편은 내가 상상한 것과 같이 일본 사람도 아니고, 미국 사람도 아닌, 그리고 진주군(進駐軍) 장교라는 것을 뽐내는 것 같은 사나이였다. 아사코와 나는 절을 몇 번씩하고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
그리워하는 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꼬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
수필 '오월' 중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년의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있는 비취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스물한 살이었던 오월 불현듯 밤차를 타고 피서지에 간 일이 있다. 해변 가에 엎어져 있는 보트, 덧문이 닫혀있는 별장들 그러나 시월같이 쓸쓸하지는 않았다. 가까이 보이는 섬들이 생생한 색이었다. 얻었도다 애정의 고통을(得了愛情痛苦) 버렸도다 애정의 고통을(失了愛情痛苦) 젊어서 죽은 중국 시인의 이 글귀를 모래 위에 써 놓고 나는 죽지 않고 돌아왔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 하리. 나는 오월 속에 있다. 연한 녹색은 나날이 번져 가고 있다. 어느덧 짙어지고 말 것이다. 머문 듯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유월이 되면 원숙한 여인 같이 녹음이 우거지리라. 그리고 태양은 정열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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