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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이 누구냐"는 말을 듣고 종철이 형에게 쓰는 편지

<기고> 절대로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자들과는 타협하지 않을께

종철이 형,

오늘이 형이 하늘나라로 가신 지 벌써 20년이라고 하네.
그때 나는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 중이었어.
사실 그 당시에는 뭐가 뭔지도 몰랐고,
다만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면 TV에서 보여준, 온 얼굴을 가릴 정도로 겨울 파카를 뒤집어쓰고
봉고차에 앉아있던 경찰관이라는 몇 명의 사람들뿐이야.

그 해 말에 TV에서 보여주는 여의도 광장, 보라매 광장에는
같은 색깔의 깃발을 흔드는 깨알같은 사람들이 가득했었어. 몰랐지?
50만이라고도 하고, 100만이라고도 하는 엄청난 사람들이었어.

얼마 전에 박태환이라는 고등학생 선수가 수영에서 일약 세계를 제패했는데...
온 국민이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어.
김연아라는 16세의 가냘픈 소녀가 깜짝 놀랄 고난도의 동작으로 세계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우승도 했지.
역시 온 국민이 환호했더랬어.
그 얼마 전에는 반기문 외교부장관이 UN 사무총장에 당선되는 국가적 경사를 맞았고.
온 언론이 반겼었어.

박태환 선수에게 1억에 조금 못미치는 거액의 상금이 주어졌고,
16세 소녀의 연고지에는 그의 이름을 딴 빙상경기장이 세워진다고 해.
반기문 총장의 고향에는 큰 규모의 테마파크가 만들어진다고 하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소중한 자유를 가져다준 형에 대해서는 관심조차도 없는 것 같아.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던 형의 숭고한 희생은 기억의 흔적조차 찾기가 힘들어졌어.
신문기사 몇 줄이 그나마 오늘이 그날임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야.

살아남은 자들이, 늦게 태어난 자들이 이래도 되는 것인가 생각하면서 눈이 흐려졌어.
나는 형한테 너무 미안해.
형의 영전에 꽃 한송이 놓아 드리지 못해서 미안하고,
이제 30대 중반의 어엿한 나이가 되었음에도 형이 남기고 간 유산을 잘 지키는데 아무런 한 일이 없어서 미안해.
어린 후배들이 민주화는 거져 이루어졌다고 생각하고 있어도 따끔하게 깨우쳐주지 못해서 또 미안하고,
자유가 밥 먹여주느냐고 조롱하여도 변변한 말 한마디 못한 것이 너무 미안하고,
생존의 기로에서 고통스러워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데 그들에게 민주주의 만세를 외칠 수 없어서 부끄럽고 미안해.
개헌 국민투표 하지말고 그 1천억원으로 박종철 기념관 만들자고 말할 용기가 없어서 비겁한 내가 사무치게 미안해.

내가 20년 전 형의 자리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하면서,
그 비굴함을 조금이라도 부식시키려면,
지금, 바로 이 순간을 박종철로 살아야 한다고 다짐해.

형, 내가 형한테 꼭 약속할 게 있어.
절대로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자들과는 타협하지 않을께.
어떤 고난과 두려움이 몰려와도 절대로 굴복하지 않을께.
형한테 맹세할께. 제2의 박종철이 될거라고.

형, 나를 믿고 오늘도 편히 자라.

서울대학교 후배 류지명 씀.

14일 서울 용산구 남영동 경찰청 인권보호센터(옛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열린 박종철 열사 20주기 추모식 및 6월 민주항쟁 20년 사업 선포식에서 박 열사의 부친 박정기씨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연합뉴스


필자 연락처: economy0@snu.ac.kr
류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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