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록 동생, '이헌재-진념과의 친분' 과시
김재갑씨, "진념을 북한 신의주 특구장관 시켜야" 주장도
구속된 김재록씨의 동생 김재갑(46)씨가 자신이 진념 전 경제부총리,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의 재야 경제교사’로 불리는 최용식 21세기경제학연구소 소장 등과 각별한 사이임을 밝힌 글이 본지 취재결과 발굴됐다.
지난 2005년 17대 총선때 열린우리당 성남수정구 후보 경선에 나섰던 김재갑씨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사회경력을 소개하면서 세 사람 이름을 거명하고 있었다.
이는 김재갑씨가 청와대 핵심 386세력들이 가입한 '한국의 미래, 제 3의 힘' 창립준비위원장이었던 점을 들어 한나라당이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고, 김재록 게이트의 중요인물로 진념-이헌재씨가 거론되고 있는 터라 주목된다.
"진념-이헌재-최용식과 만나게 돼"
김재갑씨가 2004년 3월6일 자신의 홈폐이지에 올린 글에 따르면, 김재갑씨와 진념, 이헌재씨와의 만남은 김씨가 1999년 1월 운영하던 여행사를 접고 난 이후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후(1999년 1월이후) 3개월간의 휴식을 경기도 송추에서 방을 하나 빌려 오직 쉬기만 합니다. 실업자 신세죠. 푹 쉬다가...... 바이오팜, 경기도채소영농조합법인, 농수산홈쇼핑, 비젼링크, 상진미크론, 데코, LG투자신탁운용(고문), 인베스투스글로벌(감사)에서 기업현장의 일선에서 이사로, 감사로, 사장으로 경험을 쌓게 되고 진념 부총리, 이헌재 부총리님과 같은 분을 만나게 됩니다.”
여기서 주목되는 대목은 김재갑씨가 LG투자신탁운용 고문과 인베스투스글로벌 감사를 맡았었다는 사실이다. LG투자신탁운용은 '이헌재 사단'의 핵심인물이자 이헌재 전 부총리의 죽마고우인 오호수씨가 회장을 맡고 있던 LG투자증권의 계열사로, 금융 문외한인 김재갑씨가 고문을 맡게 된 데에는 오씨의 입김이 작용한 게 아니냐는 관측을 낳고 있다. 실제로 오호수씨는 2004년 김재록씨가 대표를 맡고 있던 인베스투스글로벌의 상임고문에 이어 지난달부터는 김씨 후임으로 회장직을 맡고 있다.
또한 김재갑씨가 인베스투스글로벌 감사를 맡게 된 것은 형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회사 경영을 감시해야 할 '감사'직에 김재록씨가 동생을 앉힌 것은 전형적 모럴 해저드라는 비판을 자초할 수 있는 대목이다.
김재갑씨는 자신의 글에서 진념-이헌재와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김씨가 관료계나 금융계 생활을 한 점이 없다는 점을 고려할 때 경제 최고위층인 이들과의 인연이 형 김재록을 통해 이뤄줬음을 추정할 수 있다.
진념씨는 1998년 3월 초대 기획예산처 위원장이 된 후 2000년 8월 재정경제부장관, 초대 경제부총리 등을 연이어 맡고 2002년 새천년민주당 경기도 지사 후보로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이헌재씨는 99년 1월 초대 금융감독위원회 위원장, 재정경제부장관을 역시 연이어 맡았고, 2000년 8월 재경부장관 직에서 물러났다가 노무현정부 출범 뒤인 2004년 다시 경제부총리 겸 재경부장관을 맡았다.
"최용식 선배 맡난 것은 큰 복"
이어지는 글에서 김재갑씨는 “21세기경제학연구소 소장인 최용식 선배를 만난 것도 인생을 살면서 선배님이자 큰 동지를 만난 셈”이라고 언급하고 “기업에 대한 이해 없이는 정치를 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부지런히 배우고 경험하고 토론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그는 실제로 자신의 홈페이지에 최 소장의 각종 기고문을 싣고, 최 소장의 21세기경제학연구소 홈페이지를 링크해 놓고 있었다.
국회의원 보좌관, 민주당 정책위원 출신의 최용식씨(54)는 2002년 대선과정에 활동했던 대표적 친노(親盧) 논객 중 한명으로, 참여정부 출범후 서프라이즈 객원 논설위원으로 활동하다가 그후 한전산업개발 감사직을 맡기도 했다.
지난 2004년 5월말에는 노 대통령이 최씨를 청와대로 불러 경제보좌관 등 참모 4명과 함께 오찬을 하며 두터운 신임을 과시하기도 했다. 최씨는 경제위기론 공방에서 “경제위기가 아니다”라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진념에게 '북한 신의주 특구장관' 맡겨야" 주장도
김재갑씨는 2005년 7월 11일부터 16일까지 북한 농업성 초청으로 이길재 통일농수산사업단장 등과 평양을 방문하기 전에 쓴 글(2005.7.5)에서 “진념 전 경제부총리를 ‘북한 신의주 특구장관’으로 임명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 진념씨와의 깊은 관계를 감지케 하고 있기도 하다.
“2002년도에 남북한동시발전론이란 대북정책의 전략방침의 변경의 필요성을, 2003년에는 신의주 특구장관을 한국사람(진념 전 경제부총리)으로, 농업분야의 경제교류도 공업분야의 개성공단처럼 황해도 전체를 농업특구함으로써 압축성장론 등을 제안한 바 있어 저에게는 직접 눈으로 북한 실상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됩니다.”
북한 신의주 특구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중국재벌 양빈을 특구장관으로 내정했다가 중국정부의 양빈 구속으로 백지화했던 지역으로, 김재갑씨가 참여정부 출범직후인 2003년 진념을 특구장관으로 추천했다는 것은 그와 진념씨와의 관계가 일반적 친분관계를 넘어서는 게 아니었냐는 관측을 낳고 있다.
<뷰스앤뉴스>가 확인차 김재갑씨에게 전화를 걸어 진념 전 부총리의 신의주특구장관 추천 여부를 묻자, 그는 종전에 비교적 차분한 어조로 “(형의) 혐의 사실에 관해서만 말하겠다”던 태도를 바꿔 “누가 그런 말을 하느냐”고 반문한 뒤 “그런 일 없다”며 전화를 끊었다.
가난한 학창 시절 밝히기도
현재 열린우리당 국정자문위원회 정치개혁분과위원인 김재갑씨는 ‘386 출신 정치인’의 전형적인 삶을 살아왔다.
가난한 빈농의 집안에서 태어나 79년 서울대 농대에 입학, 그해 가을 박정희 유신데모 정학, 이후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투신, 서울동부노동상담소 사무국장, 93년 내일신문 창간준비위원회 기획부장, 경제팀부장, 여행사 대표, 2001년 ‘한국의 미래 제3의 힘(386세대의 정치단체)’ 창립준비위원장, 2003년 범개혁신당 추진운동본부 추진위원, 2004년 열린우리당 천정배 원내대표 원내기획실 부실장, 2005년 4월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재보선 경선 후보 출마 등. 현재는 남한산성포럼 대표로 있으면서 원내 진입을 위해 표밭을 가꾸고 있다.
그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남긴 글(2005.1.17)에서 1975년 가족이 고향인 전남 영광에서 서울로 옮겨와 겪었던 지난한 가족생활의 일부를 공개하기도 했다.
"1975년에 시작한 저의 가족의 서울생활은 하우스에 밥을 해주고 번 돈으로 학교를 가고 생활을 했습니다. 그해 여름까지 하시다가 한양대학교 뒤편 사근동에서 요꼬(편직)를 하시던 당숙의 권유로 몇대의 요고 기계를 가지고 기계를 돌리고 나머진 근처 요꼬공장에 다니는 노동자들의 기숙사처럼 운영합니다. 방마다 연탄불을 갈던 아버지 모습이 선하구요.
그후 아버지는 이렇다할 직업을 갖지 못하시고.. 대신 어머니가 생계를 꾸려가기 시작합니다.
노동자 기숙사에서 면동동의 어느 섬유공장 식당운영으로, 파출부로, 삯바느질로 저희 형제들(남동생 둘과 여동생)을 먹여 살리는 힘들고 힘든 일을 엄마는 일하고 일하셨고....
그 새 종로6가에서 시작한 서울생활은 사근동으로 중곡동으로 면목동으로, 면목동에서는 1년에 한번이상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전세방과 월세방을 전전하던 생활이었습니다.
1979년 서울대학을 입학하고 대학을 다니던 내내 저희집안 가난속에서 주인집 눈치를 보며 살았습니다. 졸업하고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는 당연한 과제를 하지 못하고 소위 운동권의 길을 선택한 1979년 스무살의 저는 정말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지난 2005년 17대 총선때 열린우리당 성남수정구 후보 경선에 나섰던 김재갑씨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사회경력을 소개하면서 세 사람 이름을 거명하고 있었다.
이는 김재갑씨가 청와대 핵심 386세력들이 가입한 '한국의 미래, 제 3의 힘' 창립준비위원장이었던 점을 들어 한나라당이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고, 김재록 게이트의 중요인물로 진념-이헌재씨가 거론되고 있는 터라 주목된다.
"진념-이헌재-최용식과 만나게 돼"
김재갑씨가 2004년 3월6일 자신의 홈폐이지에 올린 글에 따르면, 김재갑씨와 진념, 이헌재씨와의 만남은 김씨가 1999년 1월 운영하던 여행사를 접고 난 이후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후(1999년 1월이후) 3개월간의 휴식을 경기도 송추에서 방을 하나 빌려 오직 쉬기만 합니다. 실업자 신세죠. 푹 쉬다가...... 바이오팜, 경기도채소영농조합법인, 농수산홈쇼핑, 비젼링크, 상진미크론, 데코, LG투자신탁운용(고문), 인베스투스글로벌(감사)에서 기업현장의 일선에서 이사로, 감사로, 사장으로 경험을 쌓게 되고 진념 부총리, 이헌재 부총리님과 같은 분을 만나게 됩니다.”
여기서 주목되는 대목은 김재갑씨가 LG투자신탁운용 고문과 인베스투스글로벌 감사를 맡았었다는 사실이다. LG투자신탁운용은 '이헌재 사단'의 핵심인물이자 이헌재 전 부총리의 죽마고우인 오호수씨가 회장을 맡고 있던 LG투자증권의 계열사로, 금융 문외한인 김재갑씨가 고문을 맡게 된 데에는 오씨의 입김이 작용한 게 아니냐는 관측을 낳고 있다. 실제로 오호수씨는 2004년 김재록씨가 대표를 맡고 있던 인베스투스글로벌의 상임고문에 이어 지난달부터는 김씨 후임으로 회장직을 맡고 있다.
또한 김재갑씨가 인베스투스글로벌 감사를 맡게 된 것은 형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회사 경영을 감시해야 할 '감사'직에 김재록씨가 동생을 앉힌 것은 전형적 모럴 해저드라는 비판을 자초할 수 있는 대목이다.
김재갑씨는 자신의 글에서 진념-이헌재와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김씨가 관료계나 금융계 생활을 한 점이 없다는 점을 고려할 때 경제 최고위층인 이들과의 인연이 형 김재록을 통해 이뤄줬음을 추정할 수 있다.
진념씨는 1998년 3월 초대 기획예산처 위원장이 된 후 2000년 8월 재정경제부장관, 초대 경제부총리 등을 연이어 맡고 2002년 새천년민주당 경기도 지사 후보로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이헌재씨는 99년 1월 초대 금융감독위원회 위원장, 재정경제부장관을 역시 연이어 맡았고, 2000년 8월 재경부장관 직에서 물러났다가 노무현정부 출범 뒤인 2004년 다시 경제부총리 겸 재경부장관을 맡았다.
"최용식 선배 맡난 것은 큰 복"
이어지는 글에서 김재갑씨는 “21세기경제학연구소 소장인 최용식 선배를 만난 것도 인생을 살면서 선배님이자 큰 동지를 만난 셈”이라고 언급하고 “기업에 대한 이해 없이는 정치를 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부지런히 배우고 경험하고 토론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그는 실제로 자신의 홈페이지에 최 소장의 각종 기고문을 싣고, 최 소장의 21세기경제학연구소 홈페이지를 링크해 놓고 있었다.
국회의원 보좌관, 민주당 정책위원 출신의 최용식씨(54)는 2002년 대선과정에 활동했던 대표적 친노(親盧) 논객 중 한명으로, 참여정부 출범후 서프라이즈 객원 논설위원으로 활동하다가 그후 한전산업개발 감사직을 맡기도 했다.
지난 2004년 5월말에는 노 대통령이 최씨를 청와대로 불러 경제보좌관 등 참모 4명과 함께 오찬을 하며 두터운 신임을 과시하기도 했다. 최씨는 경제위기론 공방에서 “경제위기가 아니다”라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진념에게 '북한 신의주 특구장관' 맡겨야" 주장도
김재갑씨는 2005년 7월 11일부터 16일까지 북한 농업성 초청으로 이길재 통일농수산사업단장 등과 평양을 방문하기 전에 쓴 글(2005.7.5)에서 “진념 전 경제부총리를 ‘북한 신의주 특구장관’으로 임명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 진념씨와의 깊은 관계를 감지케 하고 있기도 하다.
“2002년도에 남북한동시발전론이란 대북정책의 전략방침의 변경의 필요성을, 2003년에는 신의주 특구장관을 한국사람(진념 전 경제부총리)으로, 농업분야의 경제교류도 공업분야의 개성공단처럼 황해도 전체를 농업특구함으로써 압축성장론 등을 제안한 바 있어 저에게는 직접 눈으로 북한 실상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됩니다.”
북한 신의주 특구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중국재벌 양빈을 특구장관으로 내정했다가 중국정부의 양빈 구속으로 백지화했던 지역으로, 김재갑씨가 참여정부 출범직후인 2003년 진념을 특구장관으로 추천했다는 것은 그와 진념씨와의 관계가 일반적 친분관계를 넘어서는 게 아니었냐는 관측을 낳고 있다.
<뷰스앤뉴스>가 확인차 김재갑씨에게 전화를 걸어 진념 전 부총리의 신의주특구장관 추천 여부를 묻자, 그는 종전에 비교적 차분한 어조로 “(형의) 혐의 사실에 관해서만 말하겠다”던 태도를 바꿔 “누가 그런 말을 하느냐”고 반문한 뒤 “그런 일 없다”며 전화를 끊었다.
가난한 학창 시절 밝히기도
현재 열린우리당 국정자문위원회 정치개혁분과위원인 김재갑씨는 ‘386 출신 정치인’의 전형적인 삶을 살아왔다.
가난한 빈농의 집안에서 태어나 79년 서울대 농대에 입학, 그해 가을 박정희 유신데모 정학, 이후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투신, 서울동부노동상담소 사무국장, 93년 내일신문 창간준비위원회 기획부장, 경제팀부장, 여행사 대표, 2001년 ‘한국의 미래 제3의 힘(386세대의 정치단체)’ 창립준비위원장, 2003년 범개혁신당 추진운동본부 추진위원, 2004년 열린우리당 천정배 원내대표 원내기획실 부실장, 2005년 4월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재보선 경선 후보 출마 등. 현재는 남한산성포럼 대표로 있으면서 원내 진입을 위해 표밭을 가꾸고 있다.
그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남긴 글(2005.1.17)에서 1975년 가족이 고향인 전남 영광에서 서울로 옮겨와 겪었던 지난한 가족생활의 일부를 공개하기도 했다.
"1975년에 시작한 저의 가족의 서울생활은 하우스에 밥을 해주고 번 돈으로 학교를 가고 생활을 했습니다. 그해 여름까지 하시다가 한양대학교 뒤편 사근동에서 요꼬(편직)를 하시던 당숙의 권유로 몇대의 요고 기계를 가지고 기계를 돌리고 나머진 근처 요꼬공장에 다니는 노동자들의 기숙사처럼 운영합니다. 방마다 연탄불을 갈던 아버지 모습이 선하구요.
그후 아버지는 이렇다할 직업을 갖지 못하시고.. 대신 어머니가 생계를 꾸려가기 시작합니다.
노동자 기숙사에서 면동동의 어느 섬유공장 식당운영으로, 파출부로, 삯바느질로 저희 형제들(남동생 둘과 여동생)을 먹여 살리는 힘들고 힘든 일을 엄마는 일하고 일하셨고....
그 새 종로6가에서 시작한 서울생활은 사근동으로 중곡동으로 면목동으로, 면목동에서는 1년에 한번이상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전세방과 월세방을 전전하던 생활이었습니다.
1979년 서울대학을 입학하고 대학을 다니던 내내 저희집안 가난속에서 주인집 눈치를 보며 살았습니다. 졸업하고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는 당연한 과제를 하지 못하고 소위 운동권의 길을 선택한 1979년 스무살의 저는 정말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저작권자ⓒ뷰스앤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