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는 화성 신도시를 어떻게 건설했나
[이덕일의 역사 직필] <4> 화성 신도시와 오늘의 행정도시
정조가 화성 신도시를 건설한 이유
정조가 화성에 신도시를 건설한 정치적 이유는 서울은 집권 노론의 수도였기 때문이다. 노론은 정조와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숙적(宿賊)이었다. 영조 38년(1762) 사도세자를 죽인 노론은 영조 51년(1775)에는 세손(世孫) 산(정조)의 즉위를 막기 위해 이른바 ‘삼불가지(三不可知)론’까지 주창했다.
임금이 일렀다.
“어린 세손이 노론(老論)을 알겠는가? 소론(少論)을 알겠는가? 남인(南人)을 알겠는가? 소북(少北)을 알겠는가? 국사(國事)를 알겠는가? 조사(朝事)를 알겠는가? 병조 판서를 누가 할 만한가를 알겠으며, 이조 판서를 누가 할 만한가를 알겠는가? 이와 같은 형편이니 종사(宗社)를 어디에 두겠는가? 나는 어린 세손으로 하여금 그것들을 알게 하고 싶으며, 나는 그것을 보고 싶다······대리청정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본래부터 국조(國朝)의 고사(故事)가 있는데, 경 등의 생각은 어떠한가?”
홍인한(洪麟漢)이 말했다.
“동궁은 노론이나 소론을 알 필요가 없고, 이조 판서이나 병조 판서를 알 필요도 없습니다. 더욱이 조사(朝事)까지도 알 필요 없습니다.”(『영조실록』51년 11월 20일)」
세손이 각 당파에 대해서 알 필요가 없고, 나라일과 조정일을 알 필요가 없고, 병조·이조판서를 누가 할 지 알 필요가 없다는 홍인한의 대답을 ‘삼불가지’라고 말하는데, 이는 한마디로 세손은 결코 임금이 될 수 없다는 말과 마찬가지였다. 사도세자를 죽인 노론은 이미 그 아들이 왕이 되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홍인한이 세손의 모친 혜경궁 홍씨의 숙부라는 사실은 세손의 고립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게 해 준다.
집권 노론의 이런 방해를 뚫고 겨우 즉위하는 데 성공한 정조는 즉위 일성으로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선언해 노론을 긴장시켰지만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신원과 화성 신도시 건설을 결코 떨어질 수 없는 동전의 양면으로 생각했다. 정조는 화성 신도시 건설 사업을 사도세자 추숭 사업과 연계시킴으로써 세자가 백주에 뒤주에서 죽는 조선의 잘못된 정치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려고 계획했다.
이를 위해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소를 화성 근처로 이장하고 그 인근에 신도시를 건설하려 했다. 억울하게 죽어간 사도세자의 혼을 화성 신도시 건설로 부활시키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조는 서두르지 않았다. 정조가 사도세자 묘소를 이전한 것은 재위 13년째의 일이다. 부친 묘소를 화성에 이전한 직후 정조는 유빈 박씨(綏嬪朴氏)에게서 고대하던 원자를 얻었다. 정조는 아마도 이를 광중에 물이 차 있던 양주 배봉산의 사도세자의 묘소를 천하의 길지(吉地)로 이장한 것에 대한 보답이라고 받아들였을 것이다. 정조는 화성 신도시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화성 신도시는 정조 재위 28년째가 될 갑자년(1804)에 일단 완성되는 것이었다. 갑자년은 세자가 15세 성년이 되는 해이자 아버지 사도세자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칠순이 되는 해이기도 했다. 이때 정조는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 화성으로 이거하려고 계획했다. 쉰셋의 한창 나이인 갑자년에 양위하려는 이유는 사도세자 추숭사업을 전개하기 위해서였다. 사도세자 문제를 거론 말라는 영조의 유언 때문에 자신이 직접 사도세자를 임금으로 추숭할 수 없기에 세자에게 왕위를 넘겨 이를 추진시키려 한 것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과학기술 사용
정조의 화성 신도시 건설이 이런 정치적 목적에만 매몰되어 있었다면 오늘날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정조는 화성 신도시 건설을 통해 나라가 나아가야 할 미래를 보여주었다. 화성 건설이 당시의 상식을 뛰어넘었다는 점은 설계도에서부터 나타난다. 정조가 설계도를 만들게 하자 정약용은 중국의 윤경(尹耕)이 지은 『보약(堡約)』과 유성룡의 『성설(城設)』을 참고해서 「성설(城設)」을 작성해 올렸는데, 이것이 화성 설계도였다.
정약용의 설계도는 8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화성의 전체 크기인 분수(分數)와 재료(材料), 성을 두르는 해자인 호참(壕塹)과 성의 기초 다지기인 축기(築基), 석재를 캐오는 방법인 벌석(伐石)과 길에 관한 문제인 치도(治道), 수레를 이용하는 조거(造車)와 성벽을 쌓는 성제(城制)가 그것이다.
축성에는 당시 세계 최고수준의 건축기법이 동원되었다. 정약용의 「성설」에 만족한 정조는 승정원에 명령해 정약용에게 궁중에서 비장하고 있는 『도서집성(圖書集成)』과 『기기도설(奇器圖說)』를 내려주고 인중(引重)과 기중(起重), 즉 무거운 물건을 들어올리는 방법에 대해서 연구하라고 지시했다. 궁중 비장도서인 『기기도설』은 스위스인 선교사 겸 과학자인 요한네스 테렌츠〔J. Terrenz, 중국명 등옥함(鄧玉函)〕가 지은 것으로서 서양 물리학의 기초개념과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한 각종 기계 장치가 그림과 함께 실려 있는 책이다. 정약용은 이 책들을 보고 「기중가도설(起重架圖說:기중기 설계도)」을 작성해 올렸고, 이에 따라 만든 기중기는 큰 효과를 거두었다. 정조는 화성 축성이 끝난 후 “다행히 기중가(起重架)를 사용하여 4만 냥(兩)의 비용을 절약했다”고 기뻐할 정도였다. 이 역시 근대 실학정신의 개가였다.
그러나 화성 건축이 남달랐던 점은 이런 첨단 과학기술을 사용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건축 방법에 있어서도 당시의 관례를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당시 축성을 비롯한 국가사업은 백성들의 강제 노동, 즉 부역으로 이루어졌다. 백성들은 자신의 식량을 스스로 싸 가지고 와 부역해야 했다. 그러나 정약용은 「성설」에서 백성들의 부역이 아니라 역부(役夫)를 모집해 쌓자고 건의했다. 성의 둘레 3,600보를 넓이 1장, 깊이 4척 정도의 구덩이로 나누어 1보마다 팻말을 세우고 1단씩 메워나갈 때마다 일정한 품삯을 주자는 것이었다. 성과급 방식의 임금 노동을 실시하자는 것인데, 국가사업에 백성들의 부역이 당연시되던 왕조시대에 정약용의 주장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정약용의 주장은 새로운 시대를 지향했던 정조에 의해 전면적으로 채택되었다.
이는 정약용과 정조의 애민(愛民)사상의 발로이기도 하지만 미래를 내다본 혜안이기도 했다. 부역은 능률이 오를 수 없었다. 반면 임금 노동은 효과적일뿐만 아니라 가난한 빈농들을 살리는 빈민구제사업이기도 했다. 화성건설은 백성들의 고역이 아니라 루즈벨트 대통령의 테네시강 개발사업처럼 국가경제를 살리고, 빈농들도 구제하는 국가 사업으로 승화되었다. 가난한 빈민들은 화성 축성 현장에 몰려들었다. 농토 없는 빈농들에게 화성 건설은 좋은 일거리여서 화성 주변은 흥청거렸다.
조선 후기 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
화성 신도시는 그때까지 조선 역사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계획 도시였다. 사대부들이 사변적인 말장난으로 세월을 보내는 동안 사회 밑바닥에서는 거대한 변화의 흐름이 일고 있었다. 농업생산력 발전에서 시작된 이 거대한 변화는 상업과 공업으로 옮겨가 사회 전체로 파급되고 있었다.
정조는 화성이 이런 변화를 흡수할 뿐만 아니라 선도하는 도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 화성은 행정도시일뿐만 아니라 상업도시가 되어야 했다. 정조가 화성 행궁 바로 앞에 삼남(三南)과 용인으로 통하는 십자로(十字路)를 개통하고 여기에 상가와 시장을 배치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화성에서 시작된 상업발전은 십자로를 통해 삼남으로 전파될 것이었다. 이를 위해 화성 상가와 시장에는 상인들과 손님들이 우글거려야 했다.
정조는 화성에 상가를 조성하기 위해 서울의 부자 30여 호에게 무이자로 1천 냥씩을 빌려주어 화성에 이주시키려 했다. 그러나 수원부사 조심태가 서울의 부호들을 이주시키는 것보다 수원의 부호들을 이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건의했다.
“반드시 본고장 백성들 중에서 살림밑천이 있고 장사물정을 아는 사람을 골라 읍 부근에 자리 잡고 살게 하면서 그 형편에 따라 관청으로부터 돈을 받아 장사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관청에서 무이자로 6만 냥을 마련해 고을 안의 부자 중에 원하는 자에게 나누어 주어 장사하게 해서, 3년 후에 본전과 함께 거두어들인다면 백성들을 모집하고 산업을 경영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정조실록』, 14년 5월 17일)”
조심태의 이런 제안에 정조도 찬성했고 좌의정 채제공과 우의정 김종수도 찬성해 균역청 산하 진휼청(賑恤廳)의 자금 6만5천 냥이 대여되었다. 『수원부읍지(水原府邑誌)』에 따르면 이때 1만5천 냥을 수원상인들에게 대여해 미곡전(米穀廛:곡식상), 어물전(魚物廛), 목포전(木布廛:옷감상), 미곡전(米穀廛:곡식상), 유철전(鍮鐵廛:놋과 철상), 관곽전(棺槨廛:관과 곽 등 장의상), 지혜전(紙鞋廛:종이·신발상) 등의 시전을 열게 했다.
화성은 행정도시이자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계획적인 상업도시였던 것이다.
조선 농업의 새로운 희망 선보여
정조는 화성을 상업도시로만 키우려고 한 것이 아니다. 화성은 농업에도 모범이 되어야 했다. 그래서 정조는 화성 주위의 넓은 땅을 개간해 대규모 농장을 만들기로 했다. 문제는 농업용수를 확보하는 것이었는데, 정조는 수원 외곽의 버려진 땅에 대규모 저수지인 만석거를 조성해 이 문제를 해결했다. 장마철이면 자주 범람하던 진목천(眞木川)을 막아 둑을 쌓고 최신 수문과 갑문(閘門)을 설치했다. 대규모 국영 시범농장인 대유둔(大有屯)은 만석거의 농업용수를 기반으로 조성된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만석거와 대유둔 역시 강제 노역이 아니라 임금노동으로 조성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만석거와 대유둔은 정조 18년(1794)의 흉년 때문에 굶주리던 백성들의 일터가 되었다. 화성 건설이 끝나면서 일자리가 없어진 유민들은 만석거와 대유둔 건설에 몰려들었고, 흉년에도 오리혀 이들에게 음식과 술을 파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흥성거렸다.
이렇게 만들어진 대유둔에서는 정조 19년(1795) 무렵부터 농경이 시작되었는데, 병농일치(兵農一致)의 이상을 실현하는 시범농장이기도 했다. 정조는 대유둔의 2/3는 장용외영의 장교 서리와 군졸, 관예 등에게 나누어 주고, 나머지 3분의 1은 가난한 수원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들은 둔소(屯所)에서 소를 비롯한 모든 농기구를 제공받았는데, 농부 2명이 소 1마리를 사용할 정도로 지원이 풍부했다. 생산물은 50대50으로 나누어 반은 경작가가 갖고 나머지 반은 수성고(修城庫)에서 화성의 보수와 관리 비용으로 사용했다.
둔전(屯田) 경영은 장용영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장용영 병사들은 둔전 경작에 대거 참여하면서 병농일치의 이상을 실천했다. 이제 군역은 무조건 힘들고 괴로운 일이 아니라 이익이 남는 즐거운 일이 되었다.
대유둔은 조선 농촌이 나아가야 할 농경방식을 실천해보인 것이었다. 측우기를 활용하고 수문과 갑문, 그리고 수차(水車:龍骨車,龍尾車)같은 과학적 수리기구를 활용해 버려졌던 ‘황폐한 전답’을 옥토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대유둔은 첫해인 정조 19년(1795)에 1,500여석의 소출을 올렸는데, 이는 당시 최고의 생산성이었다.
정조는 만석거와 대유둔의 성공에 힘입어 이 사업을 확대했다. 정조 22년(1798)부터 새로운 저수지 축만제(祝萬堤)를 쌓고 그에 따라 농장 축만제둔(祝萬堤屯)을 설치했다. 새로운 대규모 농장이 생김에 따라 대유둔을 북둔(北屯), 축만제둔을 서둔(西屯)이라고 불렀다. 장용영 소속의 둔전은 화성뿐만이 아니었다. 황해도 봉산에도 장용영 둔전이 있었다. 봉산 둔전은 수확의 삼분의 일만 국고로 들어가고 나머지는 병사들의 것이 되었다.
서울사대부와 백성들의 반대
정조가 조성한 이런 국영농장은 큰 성과를 거두었지만 초기에는 많은 반대를 받았다. 경기도에 장용영 둔전을 확대하려 하자 서울 사대부들이 저항하기도 했으며, 황해도 봉산의 둔전에서는 정조의 방침과 달리 관료들이 중간 수탈을 강화함으로써 민원이 발생하기도 했다. 또한 백성들도 한때 만석거와 대유둔 건설을 반대했다.
임금이 이르렀다.
“······만석거를 만들고 여의동을 쌓고 대유둔을 설치할 당시에는 백성들이 모두 이를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누차에 걸쳐 권유 신칙하고 내탕전(內帑錢:국왕의 자금) 수만금을 내려서 결심하고 시행했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백성들이 도리어 주위가 광활하지 못한 것을 원망하고 있으니, 백성들과는 이루어진 일을 가지고 함께 즐길 수도 있으나 일의 시작을 함께 꾀할 수는 없다는 것이 바로 이러하다. 그러나 지극히 신명한 것이 또한 백성들이니, 뒤에 의당 나의 고심을 알 것이다.(『정조실록』22년 4월 27일)”
대유둔 건설을 반대하던 백성들이 이제와서는 대유둔을 광활하게 만들지 않았다고 원망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지극히 신명한 것이 또한 백성들’이라는 정조의 말은 그가 백성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정조는 많은 반대를 받았으나 미래를 지향했기에 결국에는 큰 성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정조는 둔전의 이런 성과를 전국으로 확대하고 싶었다. 정조는 재위 22년 6월 5일 화성부에 미곡대신 메밀을 심으라고 명령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왕기(王畿:경기) 지역은 전국의 표준이니, 먼저 이곳의 읍들이 정력을 들여 명령을 충실히 받들어 준행해야 호남·영남 지방까지도 보고 느껴서 그림자처럼 따라오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조는 화성과 그 일대를 시범지역으로 만들어 백성들이 풍족하게 살게 함으로써 다른 지역들이 자발적으로 이를 본받게 하려고 했다. 정조는 모든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고 풍족하게 생활하는 조선을 만들고 싶었다. 그리고 그 꿈은 바로 이곳 사도세자의 도시, 화성에서 시작되는 것이었다.
화성 신도시와 오늘날의 행정수도
현 정부는 충청도에 행정수도를 건설하려다 헌재의 위헌 판결을 받자 ‘행정중심복합도시(행복도시)’로 이름을 바꾸어 계속 추진하고 있다. 이 문제는 한때 국론을 둘로 가를 정도로 뜨거운 감자였으나 지금은 누구도 관심 두지 않는 식은 감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훗날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을 막대한 국고는 계속 들어가고 있다.
정조의 화성 신도시와 현재의 행복도시는 어떤 점이 같고 어떤 점이 다른가. 정조가 화성 신도시 건설로 집권 노론의 기반 약화를 꾀했다는 점은 현 정권의 행복도시 추진 속내와 맞아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조는 그런 정치적인 고려만으로 화성 신도시를 건설하려 하지 않았다는 점이 다르다. 정조는 화성 신도시 건설을 조선 내부에서 꿈틀거리던 거대한 변화를 선도하는 계기로 활용하려 했다. 화성 신도시 건설을 상업혁명, 농업혁명을 이룩하는 계기로 활용하려 한 것이다. 이를 통해 조선의 경제체제를 선진적으로 바꾸려 한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행복도시에 이런 미래적 비전이 담겨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추진측에서도 국토의 균형발전이라는 공자님 말씀 외에 미래적 비전을 제시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막대한 예산이 들어가는 행복도시가 훗날 또 하나의 흉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국·내외 자본이 앞 다투어 투자하겠다고 나서고,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앞 다투어 가서 살겠다고 나설 정도로 매력 있는 도시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발상의 전환과 그런 발상은 현실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질서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규제 외에는 아무런 규제도 없는 새로운 개념의 도시로 건설한다면 각종 규제에 시달리는 여러 기업들이 내려갈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규제를 철폐한다면 경쟁력 있는 대학들도 자진해서 내려갈 수 있을 것이다. 자본뿐만 아니라 각 개인, 집단의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최고의 가치가 되는 도시가 된다면 우리 한국인들의 역동적인 민족성과 어울리며 거대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부서가 내려가고 내려가지 않는 따위의 중앙 중심적, 행정위주의 구시대적 논쟁이 아니라 어떤 도시를 건설해야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춘 도시가 될 수 있겠는지가 화두가 되고, 다른 도시들도 그 성공 사례를 따라 자기 개혁에 나서게 된다면 행복도시(行複都市)는 국민의 고통을 수반하지 않고도 행복도시(幸福都市)가 건설될 수 있을 것이다. 정조와 정약용처럼 미래 지향적인 발상의 전환과 이를 성공시킬 고도의 실력이 필요한 때이지만 코드인사에만 유능한 현 정권에서 이것이 가능할지 크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정조가 화성에 신도시를 건설한 정치적 이유는 서울은 집권 노론의 수도였기 때문이다. 노론은 정조와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숙적(宿賊)이었다. 영조 38년(1762) 사도세자를 죽인 노론은 영조 51년(1775)에는 세손(世孫) 산(정조)의 즉위를 막기 위해 이른바 ‘삼불가지(三不可知)론’까지 주창했다.
임금이 일렀다.
“어린 세손이 노론(老論)을 알겠는가? 소론(少論)을 알겠는가? 남인(南人)을 알겠는가? 소북(少北)을 알겠는가? 국사(國事)를 알겠는가? 조사(朝事)를 알겠는가? 병조 판서를 누가 할 만한가를 알겠으며, 이조 판서를 누가 할 만한가를 알겠는가? 이와 같은 형편이니 종사(宗社)를 어디에 두겠는가? 나는 어린 세손으로 하여금 그것들을 알게 하고 싶으며, 나는 그것을 보고 싶다······대리청정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본래부터 국조(國朝)의 고사(故事)가 있는데, 경 등의 생각은 어떠한가?”
홍인한(洪麟漢)이 말했다.
“동궁은 노론이나 소론을 알 필요가 없고, 이조 판서이나 병조 판서를 알 필요도 없습니다. 더욱이 조사(朝事)까지도 알 필요 없습니다.”(『영조실록』51년 11월 20일)」
세손이 각 당파에 대해서 알 필요가 없고, 나라일과 조정일을 알 필요가 없고, 병조·이조판서를 누가 할 지 알 필요가 없다는 홍인한의 대답을 ‘삼불가지’라고 말하는데, 이는 한마디로 세손은 결코 임금이 될 수 없다는 말과 마찬가지였다. 사도세자를 죽인 노론은 이미 그 아들이 왕이 되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홍인한이 세손의 모친 혜경궁 홍씨의 숙부라는 사실은 세손의 고립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게 해 준다.
집권 노론의 이런 방해를 뚫고 겨우 즉위하는 데 성공한 정조는 즉위 일성으로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선언해 노론을 긴장시켰지만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신원과 화성 신도시 건설을 결코 떨어질 수 없는 동전의 양면으로 생각했다. 정조는 화성 신도시 건설 사업을 사도세자 추숭 사업과 연계시킴으로써 세자가 백주에 뒤주에서 죽는 조선의 잘못된 정치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려고 계획했다.
이를 위해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소를 화성 근처로 이장하고 그 인근에 신도시를 건설하려 했다. 억울하게 죽어간 사도세자의 혼을 화성 신도시 건설로 부활시키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조는 서두르지 않았다. 정조가 사도세자 묘소를 이전한 것은 재위 13년째의 일이다. 부친 묘소를 화성에 이전한 직후 정조는 유빈 박씨(綏嬪朴氏)에게서 고대하던 원자를 얻었다. 정조는 아마도 이를 광중에 물이 차 있던 양주 배봉산의 사도세자의 묘소를 천하의 길지(吉地)로 이장한 것에 대한 보답이라고 받아들였을 것이다. 정조는 화성 신도시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화성 신도시는 정조 재위 28년째가 될 갑자년(1804)에 일단 완성되는 것이었다. 갑자년은 세자가 15세 성년이 되는 해이자 아버지 사도세자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칠순이 되는 해이기도 했다. 이때 정조는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 화성으로 이거하려고 계획했다. 쉰셋의 한창 나이인 갑자년에 양위하려는 이유는 사도세자 추숭사업을 전개하기 위해서였다. 사도세자 문제를 거론 말라는 영조의 유언 때문에 자신이 직접 사도세자를 임금으로 추숭할 수 없기에 세자에게 왕위를 넘겨 이를 추진시키려 한 것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과학기술 사용
정조의 화성 신도시 건설이 이런 정치적 목적에만 매몰되어 있었다면 오늘날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정조는 화성 신도시 건설을 통해 나라가 나아가야 할 미래를 보여주었다. 화성 건설이 당시의 상식을 뛰어넘었다는 점은 설계도에서부터 나타난다. 정조가 설계도를 만들게 하자 정약용은 중국의 윤경(尹耕)이 지은 『보약(堡約)』과 유성룡의 『성설(城設)』을 참고해서 「성설(城設)」을 작성해 올렸는데, 이것이 화성 설계도였다.
정약용의 설계도는 8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화성의 전체 크기인 분수(分數)와 재료(材料), 성을 두르는 해자인 호참(壕塹)과 성의 기초 다지기인 축기(築基), 석재를 캐오는 방법인 벌석(伐石)과 길에 관한 문제인 치도(治道), 수레를 이용하는 조거(造車)와 성벽을 쌓는 성제(城制)가 그것이다.
축성에는 당시 세계 최고수준의 건축기법이 동원되었다. 정약용의 「성설」에 만족한 정조는 승정원에 명령해 정약용에게 궁중에서 비장하고 있는 『도서집성(圖書集成)』과 『기기도설(奇器圖說)』를 내려주고 인중(引重)과 기중(起重), 즉 무거운 물건을 들어올리는 방법에 대해서 연구하라고 지시했다. 궁중 비장도서인 『기기도설』은 스위스인 선교사 겸 과학자인 요한네스 테렌츠〔J. Terrenz, 중국명 등옥함(鄧玉函)〕가 지은 것으로서 서양 물리학의 기초개념과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한 각종 기계 장치가 그림과 함께 실려 있는 책이다. 정약용은 이 책들을 보고 「기중가도설(起重架圖說:기중기 설계도)」을 작성해 올렸고, 이에 따라 만든 기중기는 큰 효과를 거두었다. 정조는 화성 축성이 끝난 후 “다행히 기중가(起重架)를 사용하여 4만 냥(兩)의 비용을 절약했다”고 기뻐할 정도였다. 이 역시 근대 실학정신의 개가였다.
그러나 화성 건축이 남달랐던 점은 이런 첨단 과학기술을 사용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건축 방법에 있어서도 당시의 관례를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당시 축성을 비롯한 국가사업은 백성들의 강제 노동, 즉 부역으로 이루어졌다. 백성들은 자신의 식량을 스스로 싸 가지고 와 부역해야 했다. 그러나 정약용은 「성설」에서 백성들의 부역이 아니라 역부(役夫)를 모집해 쌓자고 건의했다. 성의 둘레 3,600보를 넓이 1장, 깊이 4척 정도의 구덩이로 나누어 1보마다 팻말을 세우고 1단씩 메워나갈 때마다 일정한 품삯을 주자는 것이었다. 성과급 방식의 임금 노동을 실시하자는 것인데, 국가사업에 백성들의 부역이 당연시되던 왕조시대에 정약용의 주장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정약용의 주장은 새로운 시대를 지향했던 정조에 의해 전면적으로 채택되었다.
이는 정약용과 정조의 애민(愛民)사상의 발로이기도 하지만 미래를 내다본 혜안이기도 했다. 부역은 능률이 오를 수 없었다. 반면 임금 노동은 효과적일뿐만 아니라 가난한 빈농들을 살리는 빈민구제사업이기도 했다. 화성건설은 백성들의 고역이 아니라 루즈벨트 대통령의 테네시강 개발사업처럼 국가경제를 살리고, 빈농들도 구제하는 국가 사업으로 승화되었다. 가난한 빈민들은 화성 축성 현장에 몰려들었다. 농토 없는 빈농들에게 화성 건설은 좋은 일거리여서 화성 주변은 흥청거렸다.
조선 후기 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
화성 신도시는 그때까지 조선 역사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계획 도시였다. 사대부들이 사변적인 말장난으로 세월을 보내는 동안 사회 밑바닥에서는 거대한 변화의 흐름이 일고 있었다. 농업생산력 발전에서 시작된 이 거대한 변화는 상업과 공업으로 옮겨가 사회 전체로 파급되고 있었다.
정조는 화성이 이런 변화를 흡수할 뿐만 아니라 선도하는 도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 화성은 행정도시일뿐만 아니라 상업도시가 되어야 했다. 정조가 화성 행궁 바로 앞에 삼남(三南)과 용인으로 통하는 십자로(十字路)를 개통하고 여기에 상가와 시장을 배치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화성에서 시작된 상업발전은 십자로를 통해 삼남으로 전파될 것이었다. 이를 위해 화성 상가와 시장에는 상인들과 손님들이 우글거려야 했다.
정조는 화성에 상가를 조성하기 위해 서울의 부자 30여 호에게 무이자로 1천 냥씩을 빌려주어 화성에 이주시키려 했다. 그러나 수원부사 조심태가 서울의 부호들을 이주시키는 것보다 수원의 부호들을 이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건의했다.
“반드시 본고장 백성들 중에서 살림밑천이 있고 장사물정을 아는 사람을 골라 읍 부근에 자리 잡고 살게 하면서 그 형편에 따라 관청으로부터 돈을 받아 장사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관청에서 무이자로 6만 냥을 마련해 고을 안의 부자 중에 원하는 자에게 나누어 주어 장사하게 해서, 3년 후에 본전과 함께 거두어들인다면 백성들을 모집하고 산업을 경영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정조실록』, 14년 5월 17일)”
조심태의 이런 제안에 정조도 찬성했고 좌의정 채제공과 우의정 김종수도 찬성해 균역청 산하 진휼청(賑恤廳)의 자금 6만5천 냥이 대여되었다. 『수원부읍지(水原府邑誌)』에 따르면 이때 1만5천 냥을 수원상인들에게 대여해 미곡전(米穀廛:곡식상), 어물전(魚物廛), 목포전(木布廛:옷감상), 미곡전(米穀廛:곡식상), 유철전(鍮鐵廛:놋과 철상), 관곽전(棺槨廛:관과 곽 등 장의상), 지혜전(紙鞋廛:종이·신발상) 등의 시전을 열게 했다.
화성은 행정도시이자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계획적인 상업도시였던 것이다.
조선 농업의 새로운 희망 선보여
정조는 화성을 상업도시로만 키우려고 한 것이 아니다. 화성은 농업에도 모범이 되어야 했다. 그래서 정조는 화성 주위의 넓은 땅을 개간해 대규모 농장을 만들기로 했다. 문제는 농업용수를 확보하는 것이었는데, 정조는 수원 외곽의 버려진 땅에 대규모 저수지인 만석거를 조성해 이 문제를 해결했다. 장마철이면 자주 범람하던 진목천(眞木川)을 막아 둑을 쌓고 최신 수문과 갑문(閘門)을 설치했다. 대규모 국영 시범농장인 대유둔(大有屯)은 만석거의 농업용수를 기반으로 조성된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만석거와 대유둔 역시 강제 노역이 아니라 임금노동으로 조성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만석거와 대유둔은 정조 18년(1794)의 흉년 때문에 굶주리던 백성들의 일터가 되었다. 화성 건설이 끝나면서 일자리가 없어진 유민들은 만석거와 대유둔 건설에 몰려들었고, 흉년에도 오리혀 이들에게 음식과 술을 파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흥성거렸다.
이렇게 만들어진 대유둔에서는 정조 19년(1795) 무렵부터 농경이 시작되었는데, 병농일치(兵農一致)의 이상을 실현하는 시범농장이기도 했다. 정조는 대유둔의 2/3는 장용외영의 장교 서리와 군졸, 관예 등에게 나누어 주고, 나머지 3분의 1은 가난한 수원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들은 둔소(屯所)에서 소를 비롯한 모든 농기구를 제공받았는데, 농부 2명이 소 1마리를 사용할 정도로 지원이 풍부했다. 생산물은 50대50으로 나누어 반은 경작가가 갖고 나머지 반은 수성고(修城庫)에서 화성의 보수와 관리 비용으로 사용했다.
둔전(屯田) 경영은 장용영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장용영 병사들은 둔전 경작에 대거 참여하면서 병농일치의 이상을 실천했다. 이제 군역은 무조건 힘들고 괴로운 일이 아니라 이익이 남는 즐거운 일이 되었다.
대유둔은 조선 농촌이 나아가야 할 농경방식을 실천해보인 것이었다. 측우기를 활용하고 수문과 갑문, 그리고 수차(水車:龍骨車,龍尾車)같은 과학적 수리기구를 활용해 버려졌던 ‘황폐한 전답’을 옥토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대유둔은 첫해인 정조 19년(1795)에 1,500여석의 소출을 올렸는데, 이는 당시 최고의 생산성이었다.
정조는 만석거와 대유둔의 성공에 힘입어 이 사업을 확대했다. 정조 22년(1798)부터 새로운 저수지 축만제(祝萬堤)를 쌓고 그에 따라 농장 축만제둔(祝萬堤屯)을 설치했다. 새로운 대규모 농장이 생김에 따라 대유둔을 북둔(北屯), 축만제둔을 서둔(西屯)이라고 불렀다. 장용영 소속의 둔전은 화성뿐만이 아니었다. 황해도 봉산에도 장용영 둔전이 있었다. 봉산 둔전은 수확의 삼분의 일만 국고로 들어가고 나머지는 병사들의 것이 되었다.
서울사대부와 백성들의 반대
정조가 조성한 이런 국영농장은 큰 성과를 거두었지만 초기에는 많은 반대를 받았다. 경기도에 장용영 둔전을 확대하려 하자 서울 사대부들이 저항하기도 했으며, 황해도 봉산의 둔전에서는 정조의 방침과 달리 관료들이 중간 수탈을 강화함으로써 민원이 발생하기도 했다. 또한 백성들도 한때 만석거와 대유둔 건설을 반대했다.
임금이 이르렀다.
“······만석거를 만들고 여의동을 쌓고 대유둔을 설치할 당시에는 백성들이 모두 이를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누차에 걸쳐 권유 신칙하고 내탕전(內帑錢:국왕의 자금) 수만금을 내려서 결심하고 시행했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백성들이 도리어 주위가 광활하지 못한 것을 원망하고 있으니, 백성들과는 이루어진 일을 가지고 함께 즐길 수도 있으나 일의 시작을 함께 꾀할 수는 없다는 것이 바로 이러하다. 그러나 지극히 신명한 것이 또한 백성들이니, 뒤에 의당 나의 고심을 알 것이다.(『정조실록』22년 4월 27일)”
대유둔 건설을 반대하던 백성들이 이제와서는 대유둔을 광활하게 만들지 않았다고 원망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지극히 신명한 것이 또한 백성들’이라는 정조의 말은 그가 백성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정조는 많은 반대를 받았으나 미래를 지향했기에 결국에는 큰 성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정조는 둔전의 이런 성과를 전국으로 확대하고 싶었다. 정조는 재위 22년 6월 5일 화성부에 미곡대신 메밀을 심으라고 명령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왕기(王畿:경기) 지역은 전국의 표준이니, 먼저 이곳의 읍들이 정력을 들여 명령을 충실히 받들어 준행해야 호남·영남 지방까지도 보고 느껴서 그림자처럼 따라오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조는 화성과 그 일대를 시범지역으로 만들어 백성들이 풍족하게 살게 함으로써 다른 지역들이 자발적으로 이를 본받게 하려고 했다. 정조는 모든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고 풍족하게 생활하는 조선을 만들고 싶었다. 그리고 그 꿈은 바로 이곳 사도세자의 도시, 화성에서 시작되는 것이었다.
화성 신도시와 오늘날의 행정수도
현 정부는 충청도에 행정수도를 건설하려다 헌재의 위헌 판결을 받자 ‘행정중심복합도시(행복도시)’로 이름을 바꾸어 계속 추진하고 있다. 이 문제는 한때 국론을 둘로 가를 정도로 뜨거운 감자였으나 지금은 누구도 관심 두지 않는 식은 감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훗날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을 막대한 국고는 계속 들어가고 있다.
정조의 화성 신도시와 현재의 행복도시는 어떤 점이 같고 어떤 점이 다른가. 정조가 화성 신도시 건설로 집권 노론의 기반 약화를 꾀했다는 점은 현 정권의 행복도시 추진 속내와 맞아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조는 그런 정치적인 고려만으로 화성 신도시를 건설하려 하지 않았다는 점이 다르다. 정조는 화성 신도시 건설을 조선 내부에서 꿈틀거리던 거대한 변화를 선도하는 계기로 활용하려 했다. 화성 신도시 건설을 상업혁명, 농업혁명을 이룩하는 계기로 활용하려 한 것이다. 이를 통해 조선의 경제체제를 선진적으로 바꾸려 한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행복도시에 이런 미래적 비전이 담겨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추진측에서도 국토의 균형발전이라는 공자님 말씀 외에 미래적 비전을 제시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막대한 예산이 들어가는 행복도시가 훗날 또 하나의 흉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국·내외 자본이 앞 다투어 투자하겠다고 나서고,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앞 다투어 가서 살겠다고 나설 정도로 매력 있는 도시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발상의 전환과 그런 발상은 현실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질서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규제 외에는 아무런 규제도 없는 새로운 개념의 도시로 건설한다면 각종 규제에 시달리는 여러 기업들이 내려갈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규제를 철폐한다면 경쟁력 있는 대학들도 자진해서 내려갈 수 있을 것이다. 자본뿐만 아니라 각 개인, 집단의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최고의 가치가 되는 도시가 된다면 우리 한국인들의 역동적인 민족성과 어울리며 거대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부서가 내려가고 내려가지 않는 따위의 중앙 중심적, 행정위주의 구시대적 논쟁이 아니라 어떤 도시를 건설해야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춘 도시가 될 수 있겠는지가 화두가 되고, 다른 도시들도 그 성공 사례를 따라 자기 개혁에 나서게 된다면 행복도시(行複都市)는 국민의 고통을 수반하지 않고도 행복도시(幸福都市)가 건설될 수 있을 것이다. 정조와 정약용처럼 미래 지향적인 발상의 전환과 이를 성공시킬 고도의 실력이 필요한 때이지만 코드인사에만 유능한 현 정권에서 이것이 가능할지 크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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