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미애-강금실, 그리고 DJ의 '엇갈린 인연'
[김진홍의 정치in] <10> 추미애 입당에 DJ "대구며느리 얻었다"
1995년, 정계은퇴를 선언했다가 정계복귀를 선언한 DJ(김대중)에 의해 새천년국민회의 창당 작업이 한창이었던 때였다. 당시 민변에서 활동중이던 유선호 변호사(현재 열린우리당 의원)가 천정배 변호사와 함께 국민회의 창당 대열에 합류했다. 곧바로 유 변호사에게 '특명'이 떨어졌다. 40대 여성 법조인과 접촉해 입당시키라는 것이었다. 이때 유 변호사가 가장 먼저 떠올린 인물이 1957년생인 강금실 판사였다. 자신과 함께 사시 23회 동기로서 강한 인상을 남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곧바로 강 판사와 만나 국민회의 입당을 권유했다. 그러나 강 판사는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본다면서 극구 사양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강 판사의 입당은 이뤄지지 못했다.
그 다음 유 변호사가 만난 여성 법조인이 1958년생인 추미애 판사였다. 유 변호사는 대구 출신인 추 판사를 끈질기게 설득했고,결국 추 의원은 국민회의행을 결정한다. 추 판사는 당시 정동영 MBC기자(열린우리당 전 의장), 소설 '무궁화꽃은 피었습니다'의 저자 김진명씨 등과 함께 국민회의에 입당하는 것으로 정치인으로 변신한다. DJ는 그때 "내 인생에 이렇게 행복한 때가 없었던 것같다. 대구 며느리도 얻었다"고 추 판사의 입당을 진심으로 기뻐했다.
추 판사는 1996년 4.11 15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서울 광진을에 국민회의 후보로 출마해 금배를 달았다. '추미애 판사'에서 '추미애 국회의원'이 된 것이다. 추 의원은 DJ총재 특별보좌역을 거쳐 16대 총선에서도 무난히 당선돼 최고위원으로 선출된다. 2002년초에는 대선주자 반열에 이름을 올리기도 하는 등 정치인 추 의원의 행보는 순탄했다. 노무현 대통령 탄생에도 기여했다.
하지만 2003년 11월 열린우리당이 민주당에서 분당해 나가면서 꼬이기 시작했다. 추 의원은 열린우리당행을 거부하고,민주당을 지켰다. 그리고 2004년 3월 민주당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 '삼보일배' 등 온몸으로 대통령 탄핵 역풍에 맞서 4.15 17대 총선을 지휘했으나 본인마저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추다르크'는 결국 홀연히 미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지난 달 2년여만에 귀국했다. 모교인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초빙교수로 18일 첫 강의를 했다.
반면 국민회의에 몸담기를 거절했던 강금실 판사는 민변 부회장을 지내다가 노무현 정부 첫 법무장관으로 화려하게 등장한다. 여성 법무장관 1호다. 강 전 장관의 보랏빛 의상과 눈웃음,그리고 '호호호'하는 특유의 웃음소리는 세인의 눈길을 잡기에 충분했다. 검찰총장과 술 한 잔 한 뒤 팔짱을 끼고 나오는 모습은 파격이었다. 방대한 법무부 조직을 원만하게 추스린 카리스마도 돋보였다.
2004년 10월 변호사로 돌아간 뒤에도 강 전 장관 지지율은 떨어질 줄 몰랐다. 지난 5.31 지방선거에서 인물난에 시달리던 열린우리당이 강 전 장관에게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해달라'고 구애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망설이던 강 전 장관은 결국 이를 수락했고,경선절차를 거쳐 열린우리당 서울시장 후보로 새로운 도전을 시도했다. 선거 초반 강 전 장관은 보랏빛 파스텔톤 의상으로,특유의 강단으로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화려한 등장'은 너무 짧게 막이 내렸다. 한나라당이 오세훈 변호사를 강 전 장관의 대항마로 결정하자 강 전 장관의 지지율은 급락했다. 선거가 끝날 때까지 마찬가지였다. 강 전 장관은 패배하고,다시 변호사로 돌아갔다.
추 전 의원은 미국에서 돌아오자마자 자신을 정계에 입문시킨 김대중 전 대통령을 찾아가 인사했다. 김 전 대통령이 반갑게 맞은 것은 물론이다. 추 전 의원은 현 집권세력으로부터도 '러브 콜'을 받고 있다. 미국에 있을 때 입각제의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금도 천정배,신기남 의원 등은 "추미애를 데려오지 못한 게 이 정권의 한계"라는 말을 하고 있다.
강 전 장관은 이달 초 외교부 여성인권대사로 임명됐다. 외교부 대외직명대사 직함이 '보은(報恩)' 카드로 활용되고 있다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강 전 장관에 대한 노 대통령의 남다른 신임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에 일조했으면서 끝까지 DJ 곁을 지킨 추 전 의원,그리고 DJ의 초대에 응하지 않은 채 노 대통령과 호흡을 맞춰온 강 전 장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은 이렇게 다소 달랐다. 추 전 의원이 열린우리당 창당때 합류했더라면,그리고 강 전 장관이 국민회의 창당때 합류했더라면 두 사람의 인생역정은 달라졌을 것이다.
향후 정치적 가능성이 넓게 열려 있다는 점은 두 사람의 공통점이다.
추 전 의원은 정치재개 문제에 대해 "흐르는 강물처럼 봐달라. 급류를 탈 지, 완류를 탈 지 나도 모른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몇 년 전 경제 환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박세리 선수가 국민광고를 통해 모래 속에 빠진 골프공을 쳐내 위기를 반전의 기회로 삼는 것이 인상 깊었다"는 의미심장한 말도 함께 던졌다.
강 전 장관은 "열린우리당이 어려우니 어떤 형태로든 돕고 싶다. 지방선거때처럼 준비없이 나갔다가 시행착오를 겪고싶진 않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 핵심측근인 김두관 전 지사는 "강금실도 대선을 준비 중"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두 사람이 차기 대선 정국에서는 어떻게 다른 행보를 보일 지 벌써부터 흥미롭다.
그 다음 유 변호사가 만난 여성 법조인이 1958년생인 추미애 판사였다. 유 변호사는 대구 출신인 추 판사를 끈질기게 설득했고,결국 추 의원은 국민회의행을 결정한다. 추 판사는 당시 정동영 MBC기자(열린우리당 전 의장), 소설 '무궁화꽃은 피었습니다'의 저자 김진명씨 등과 함께 국민회의에 입당하는 것으로 정치인으로 변신한다. DJ는 그때 "내 인생에 이렇게 행복한 때가 없었던 것같다. 대구 며느리도 얻었다"고 추 판사의 입당을 진심으로 기뻐했다.
추 판사는 1996년 4.11 15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서울 광진을에 국민회의 후보로 출마해 금배를 달았다. '추미애 판사'에서 '추미애 국회의원'이 된 것이다. 추 의원은 DJ총재 특별보좌역을 거쳐 16대 총선에서도 무난히 당선돼 최고위원으로 선출된다. 2002년초에는 대선주자 반열에 이름을 올리기도 하는 등 정치인 추 의원의 행보는 순탄했다. 노무현 대통령 탄생에도 기여했다.
하지만 2003년 11월 열린우리당이 민주당에서 분당해 나가면서 꼬이기 시작했다. 추 의원은 열린우리당행을 거부하고,민주당을 지켰다. 그리고 2004년 3월 민주당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 '삼보일배' 등 온몸으로 대통령 탄핵 역풍에 맞서 4.15 17대 총선을 지휘했으나 본인마저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추다르크'는 결국 홀연히 미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지난 달 2년여만에 귀국했다. 모교인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초빙교수로 18일 첫 강의를 했다.
반면 국민회의에 몸담기를 거절했던 강금실 판사는 민변 부회장을 지내다가 노무현 정부 첫 법무장관으로 화려하게 등장한다. 여성 법무장관 1호다. 강 전 장관의 보랏빛 의상과 눈웃음,그리고 '호호호'하는 특유의 웃음소리는 세인의 눈길을 잡기에 충분했다. 검찰총장과 술 한 잔 한 뒤 팔짱을 끼고 나오는 모습은 파격이었다. 방대한 법무부 조직을 원만하게 추스린 카리스마도 돋보였다.
2004년 10월 변호사로 돌아간 뒤에도 강 전 장관 지지율은 떨어질 줄 몰랐다. 지난 5.31 지방선거에서 인물난에 시달리던 열린우리당이 강 전 장관에게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해달라'고 구애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망설이던 강 전 장관은 결국 이를 수락했고,경선절차를 거쳐 열린우리당 서울시장 후보로 새로운 도전을 시도했다. 선거 초반 강 전 장관은 보랏빛 파스텔톤 의상으로,특유의 강단으로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화려한 등장'은 너무 짧게 막이 내렸다. 한나라당이 오세훈 변호사를 강 전 장관의 대항마로 결정하자 강 전 장관의 지지율은 급락했다. 선거가 끝날 때까지 마찬가지였다. 강 전 장관은 패배하고,다시 변호사로 돌아갔다.
추 전 의원은 미국에서 돌아오자마자 자신을 정계에 입문시킨 김대중 전 대통령을 찾아가 인사했다. 김 전 대통령이 반갑게 맞은 것은 물론이다. 추 전 의원은 현 집권세력으로부터도 '러브 콜'을 받고 있다. 미국에 있을 때 입각제의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금도 천정배,신기남 의원 등은 "추미애를 데려오지 못한 게 이 정권의 한계"라는 말을 하고 있다.
강 전 장관은 이달 초 외교부 여성인권대사로 임명됐다. 외교부 대외직명대사 직함이 '보은(報恩)' 카드로 활용되고 있다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강 전 장관에 대한 노 대통령의 남다른 신임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에 일조했으면서 끝까지 DJ 곁을 지킨 추 전 의원,그리고 DJ의 초대에 응하지 않은 채 노 대통령과 호흡을 맞춰온 강 전 장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은 이렇게 다소 달랐다. 추 전 의원이 열린우리당 창당때 합류했더라면,그리고 강 전 장관이 국민회의 창당때 합류했더라면 두 사람의 인생역정은 달라졌을 것이다.
향후 정치적 가능성이 넓게 열려 있다는 점은 두 사람의 공통점이다.
추 전 의원은 정치재개 문제에 대해 "흐르는 강물처럼 봐달라. 급류를 탈 지, 완류를 탈 지 나도 모른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몇 년 전 경제 환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박세리 선수가 국민광고를 통해 모래 속에 빠진 골프공을 쳐내 위기를 반전의 기회로 삼는 것이 인상 깊었다"는 의미심장한 말도 함께 던졌다.
강 전 장관은 "열린우리당이 어려우니 어떤 형태로든 돕고 싶다. 지방선거때처럼 준비없이 나갔다가 시행착오를 겪고싶진 않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 핵심측근인 김두관 전 지사는 "강금실도 대선을 준비 중"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두 사람이 차기 대선 정국에서는 어떻게 다른 행보를 보일 지 벌써부터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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