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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3시 반의 자화상

[박영택 교수의 '화가의 얼굴에서 내 얼굴을 보다']

시계의 바늘은 오후 3시 반을 가리킨다. 시계추는 흔들린다. 그림은 그 움직임을 슬로우모션으로 잡아낸다. 밥주걱 같은 둥근 추는 테이블에 앉아 손깍지를 끼고 있는 남자의 뒷통수를 때리는 듯 하다. 마치 타종을 하는 듯이 말이다. 멍하니 앉아있는 나의 머리를 깨우는 종소리! 화면의 중앙에 자리한 이 남자는 잠시 머리, 뇌를 내려놓고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어 보인다. 무엇을 할까? 무엇을 해야 하나? 그러나 어떤 일도 하기 싫을 때가 있다. 너무 지치고 권태롭고 그래서 이런 삶에 환멸을 느낄 때가 있는 법이다. 더구나 오후 3시 반이란 시간은 더없이 나른하고 지칠 시간이다.

책상에 앉아서 어딘가를 보고 있다. 한 쪽 눈은 사라지고 다른 한 눈 역시 온전치 못하다. 백태가 끼었는지, 아니면 눈동자를 상실해 버린, 그저 깊은 구멍일 뿐인지 알 수 없다. 마치 시계추에 맞아 한 눈이 어디론가 가버린 것도 같다. 그는 시계를 뒤로 하고 마냥 손가락만 꺽고 있다.

이영춘은 작업실에 앉아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지금은 이름을 이현안으로 개명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근자에 본 적이 없다. 90년대 초반 파리에 갔을 때 그를 만났다. ‘소나무’라는 집단 아트리에에서 그의 작업을 보았다. 며칠 후 그와 함께 자동차를 타고 파리에서 조금 떨어진 오베르 쉬르와즈(Auvers Sur-Oise)에 갔다. 그리고는 고흐형제가 묻힌 무덤을 찾아 그 앞에 오래 서 있었다. 고흐가 그렸던 밀밭과 조그만 교회당도 찾았다. 늦가을이어서인지 오베르 평원은 어둡고 음산한 날씨 속에 낮게 드리워져 있었다. 분위기 있는 날에 간 것이다. 고흐의 무덤을 떠올릴 때 마다 이 작가도 함께 부감된다. 이후 귀국해서는 여러 번 보았는데 어느 순간 소식이 끊겼다. 아마 어디선가 여전히 작업에 몰두하고 있으리라 믿는다.

작가들에게 작업실이란 공간은 낙원이자 지옥이다. 작업하는 순간 더없이 행복하고 의미있는 시간을 보내는 것 같지만 작품이 풀리지 않으면 미칠 것 같은 시간이 쌓이는 공간이다. 그러나 죽으나 사나,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어쨌든 작업실 공간에서 버텨야 한다. 그것이 작가의 실존이다. 작업실에서 하루 종일 작업만 할 수 는 없을 것이다. 작업이 풀빵처럼 기계적으로 나오는 것은 아니니까?

그런데 그 작업실에서 하루종일 버티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캔버스 틀을 짜고 물감을 개거나 혹은 붓을 빨던지 아니면 청소를 하던지 혹은 커피를 타마시고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던지, 아니면 그저 멍하니 테이블에 앉아있더라도 작업실에서 버티는 게 필요하다. 그곳에서 빠져나가서는 곤란하다. 그러니까 작가의 육체와 신경은 그 작업실 공간과 분리되서는 안된다. 그는 작업실과 일심동체여야 한다. 그림은 엉덩이의 힘에서 나온다. 놀거나 잠을 자도 작업실에서 해결해야 한다.

그는 오후 3시 반이라는 나른하고 지치고 몸이 방전되고 있음을 알리는 시간대에 손가락을 만지작 거리며 책상에 앉아있다. 머리를 잠시 내려두었거나 도저히 생각,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아 절망하고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곳을 떠날 수 는 없다. 그가 떠나는 순간 다시 이 자리에 앉으려면 더 혹독한 시간이 요구된다. 되든 안되든 매일 그려야 하고 매일 생각해야 한다. 하루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그 다음날 하루는 감각을 되찾기 위해 요구되는 공백의 시간이다.

나 역시 거의 매일 글을 쓰는 편인데 하루 쉬면 그 다음날은 글이 잘 써지지 않는다. (물론 글도 못쓰지만) 잘 나가지 않는다. 몸으로, 의식으로 아무리 밀고 나아가려 해도 쉬었던 시간만큼 꼼짝도 않는다. 하루키는 글이 써지든 안 써지든 매일 정해진 시간만큼 책상에 앉아있었다고 한다. ‘글이 써지지 않는 날’이란 제목으로도 글을 썼다.

작가에게 작업실이란 공간은 결국 그 자신의 몸이기도 하다. 의자에 엉덩이를 올려놓고 책상 위에는 팔꿈치를 붙인 후 에스키스를 한다. 이런 저런 상념에 잠긴다. 그럴 때 작업실 공간은 너무 고독하다. 작업은 그 누구와 공유하거나 상의할 수 없다. 오로지 본인 스스로가 저지르고 감당하고 추스려야 한다. 싸워야 한다. 그런데 너무 절망적인 것은 그 싸움에 끝이 없다는 것이다. 엔딩 없는 지루한 싸움, 결국 죽음만이 그 싸움을 끝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죽음은 참 평화스럽다. 우리 모두는 그런 싸움을 줄창 해대고 있는 편이다.
박영택

필자 소개

성균관대대학원미술사전공, 전 금호미술관큐레이터, 현재 경기대학교예술대학 교수, 미술평론가.
저서로는 <예술가로 산다는 것>, <식물성의 사유>, <미술전시장 가는 날>, <나는 붓을 던져도 그림이 된다>, <가족을 그리다> 등이 있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

댓글이 2 개 있습니다.

  • 0 0
    sprite1001

    좋은 글 고맙습니다!
    그리고 이 글을 보시는 님께 호소합니다!!
    요즘 수도권 시내 버스에서도 광고하고 있는 유투브 컨텐츠에요.  
    부디 짬을 내셔서 확인하시고 바른 판단하시길 간절히 원합니다(눅17:26~30). 
    https://youtu.be/2QjJS1CnrT8

  • 3 0
    글 너무 좋습니다

    박 교수님의 글들은 그림 평론이 아니라 훌륭한 <인생 평론>입니다
    화가들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뿐만이 아니라, 거기서 인생의 이치도 제시하고 있습니다
    좋은 글 계속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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