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이 뭉개져 있다
[박영택 교수의 '화가의 얼굴에서 내 얼굴을 보다']
얼굴이 뭉개져 있다. 명확한 윤곽이나 생김새를 지우고 어떤 압력에 의해 밀린 자국을 보여준다. 다소 참혹하고 불편하다. 눈을 질끈 감고 있는 모습이 흡사 잠이 든 듯하다.
실은 복사기 판에 얼굴을 밀착시킨 후 복사를 해서 떠낸 이미지이고 이를 다시 사진으로 찍은 것이다. 몇 겹의 재현의 과정 속에 드러난 얼굴인 셈이다. 이런 식으로 자화상을 보여주는 경우는 드물다. 책을 복사하는 복사기가 멀쩡한 작가의 얼굴을 복사했다. 그 결과 이 얼굴, 자화상은 다소 생각이 많은, 상처로 얼룩진 내면을 고통스럽게 상기시켜주는 편이다.
박진호는 인간의 몸, 몸 안의 고뇌라는 주제를 어떻게 사진적으로 소화할 수 있을까를 오랫동안 모색해 온 작가다. 그는 자신이 스스로 촬영대상이 되어 그 자신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변함없는 주제는 인간, 자기 자신이고 우선 그 얼굴, 몸이 해부와 관찰의 대상으로 올려졌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신체를 이용하고 그 신체를 복사기의 감광판에 밀착시켰다. 그리고 복사지 위에 나타난 영상의 결과를 다시 일반 카메라로 기록하는 일련의 과정을 보여준다. 그가 찍은 이미지는 그러니까 이중의 이미지다. 현실을 두 번 재현한 이미지인 것이다.
사진으로 찍은 이미지이기에 구체적인 대상, 얼굴의 재현이지만 그래서 구상의 흔적을 남기고 있지만 얼핏 보아서는 추상적이고 모호하다. 관객 스스로 이미지의 상징화를 도모할 수 있는 단서로 남겨진 이 ‘희박한’ 사진을 통해 독자는 다양한 사진적 읽기를 해나갈 수 있다.
이 작업은 실체의 얼굴을 복사기에 갖다 대고 그렇게 해서 남겨진 이미지를 다시 재이미지화 하는 일련의 과정을 보여준다. 이 같은 작가의 ‘실체-이미지-이미지’라는 이중의 여과장치는 ‘실체-이미지’라는 사진적 도식이 지니는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것 같다. 알다시피 사진이란 주어진 대상의 표면에 밀착되어 이를 재현한다. 그런 의미에서 사진은 철저히 시선의 논리 자체다. 카메라의 시선은 보다 가까이 하는 방식, 접촉을 모른다. 너무 바짝 달라붙으면 사진은 불가능하다. 적당한 거리, 심도가 요구된다. 그런데 이 작가는 아예 얼굴에 달라붙은 시선, 얼굴의 피부와 일체가 된 그런 사진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사실 사진은 그렇게 찍을 수 없다. 그래서 작가는 복사기를 이용해서 그런 사진을 보여준다.
작가의 복사 메커니즘은 카메라적 시선이 지니는 그 결함을 보충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러한 시선의 관점은 이른바 자신의 시선에 촉수를 달아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의 사진은 밀착과 근접에 따라 몸을 새롭게 보게 하고 우리 눈이 그 피부 위를 거닐고 만지고 들어가 보게 한다. 자기 얼굴을 지도처럼 펼쳐 보이고 낯익지만 무척 낯설은 대상으로 돌변시킨다. 사진 자체는 프레임의 작용에 의해 일상적인 것을 비일상적인 것으로 만들고 낯익고 친숙한 사물에 대한 습관적인 지각을 새롭게 하는 효과를 발생시킨다면 이 사진 다분히 원래의 사물이 갖는 성질을 파괴하고 새로운 코드의 옷을 입히고 있다.
여기서 얼굴 피부는 세계와 자신과의 접점이다. 인간은 신체라는 형태를 통해서만 세상에 존재한다. 신체는 하나의 표현계로서 존재한다. 피부는 몸을 감싸고 보호하는 피막이다. 결국 피부로 밖에 보여 지지 않는다. 피부는 나약하고 말랑거리고 상처받기 쉽다.
사실 인간의 피부는 언제나 불결한 외계에 노출되어 있다. 인간의 모든 표면적인 기관들은 피부가 변형된 것들이다. 결국 작가는 그렇게 변형된 피부의 흔적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우리는 이러한 천박스럽고 기이한 피부감각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다는 것이다.
박진호의 얼굴은 이미지 제작의 주체이면서 모델이고 객체이다. 여기서 주체와 개체, 시선과 피사체의 구분은 모호하다. 따라서 이 사진에서 피사체와 그것을 포착하는 시선은 중첩되었다. 그러니까 작가의 신체/얼굴은 는 피사체인 동시에 시선이고 신체인 동시에 재현되는 신체가 된다.
그는 자기 몸을 마치 탁본하듯이 한다. 얼굴을 복사기에 밀착시켰다. 복사기의 초점유리판에 자신의 얼굴을 올려놓고 울퉁불퉁한 표면을 가능한 평평하게 하기 위해 초점면에 최대한 가까이 밀착시키고 복사했다. 이 기록방법을 통해 이른바 거리는 사라졌다. 복사기의 거리는 사진기의 렌즈처럼 조절할 수 도 없고 처음부터 피사체와이 거리가 정해져있다. 사진이 대상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광선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 사진은 대상의 흔적이 아니라 광선의 흔적임을 새삼 깨닫게 한다.
작가는 이처럼 자신의 신체, 얼굴을 다소 가학적으로 복사기에 갖다 댄다. 신체에 대한 가학적인 다큐멘테이션을 통해 어떤 권력의 제약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광선의 세례에 의한 의식을 치루고 있어 보인다. 사방 50센티가 안되는 유리판 위에서 얼굴을 사정없이 올려놓았다.
그것은 일종의 퍼포먼스(연기)이다. 그것의 기록이 사진으로 나오고 있고 또한 이중의 이미지에 색상이 가미되는 미술적 개입이 된다. 차가운 판과 뜨거운 생생한 광선이 얼굴 피부를 훑어 내려간다. 복사기라는 또 하나의 촬영기술이자 기록인 셈이다. 입체적일 수밖에 없는 자신의 얼굴을 복사기에 최대한 밀착시킨다는 행위는 자신의 내면의 고통, 절규, 안간힘 등 고뇌하는 정신을 표현하는 안성맞춤의 프로세스다.
복사기가 극단적으로 흑백의 톤이 분리되는 영상을 제공할 수밖에 없기에 복사기의 평면 감광판이 기능이란 복사물을 밀착시킬수록 선명한 화질을 보장한다는 점이 작가가 기도했을 행위의 치열함에 도움을 준다. 그가 이용하는 복사와 얼굴이 그려내는 기이한 이미지는 그만이 획득할 수 있는 표현의 육질적인 표정으로 드러난다. 그러한 잠시 이내 그 순간이 기록된다.
사진의 기능이 기록이라면 다들 카메라 앞에 서서 그 시간을 견디듯이 작가는 숨을 멈추고 몸을 움직이지 않고 더욱 강하게 밀착시켜 온전히 기록되기를 스스로 투쟁한다. 철저하게 자신을 기록하고 자신을 ‘미라’로 만드는 방법이다. 그 복사이미지의 일부분을 클로즈업 렌즈로 1:1이나 1:2정도의 배율로 접사 촬영한 후 확대 인화했다.
흑백 복사기는 심도가 매우 얕아 평면이 아니면 거의 복사가 되지 않기에 굴곡이 있는 신체부위를 평면화 하려고 초점 유리판에 밀착시키면 강하게 밀착된 부분은 디테일 없이 하얗게, 평면으로 된 부분은 적절한 디테일이 있는 회색 톤으로 밀착되지 않은 부분은 검은 배경으로 표현된다.
복사되고 클로즈업되고 크게 확대된 얼굴은 더 이상 육체의 물질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그로테스크한 추상이 된다. 추상은 군더더기를 떨쳐버린 순수를 뜻한다. 그렇게 작가는 육체의 순수, 얼굴의 순수를 되찾는다. 얼굴처럼 보이면서도 얼굴이 아니고 얼굴처럼 보이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는 얼굴이다. 작가의 표현을 빌면 그것은 얼굴의 잃어버린 순결을 회복하기 위해 불려나와야만 하는 시간이라고 한다.
아울러 복사기는 같은 결과를 두 번 다시 만들어내지 못한다. 복사기는 계속 변화한다. 작가의 얼굴도 현실의 이미지를 비현실화하면서 결과물이 변화에 대한 관심을 집중한다. 자신의 모습도 항상성을 유지할 수 없다는 얘기다. 복사기의 일회성과 함께 자신의 얼굴, 몸은 끊임없는 변형을 이룬다. 발전, 퇴행, 노화일 수도 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순간이 아련히 새겨 있다.
그것은 분명 동결, 박제, 화석, 미라다. 자기 얼굴을 샅샅이 탐색하고 들여다보고 확대하고 그렇게 드러난 얼굴은 낯설고 기이하다. 자신의 얼굴이 이토록 당혹한 풍경이 되었다. ‘나’란 존재가 새삼스러워진다.
필자 소개
성균관대대학원미술사전공, 전 금호미술관큐레이터, 현재 경기대학교예술대학 교수, 미술평론가.
저서로는 <예술가로 산다는 것>, <식물성의 사유>, <미술전시장 가는 날>, <나는 붓을 던져도 그림이 된다>, <가족을 그리다> 등이 있다.
실은 복사기 판에 얼굴을 밀착시킨 후 복사를 해서 떠낸 이미지이고 이를 다시 사진으로 찍은 것이다. 몇 겹의 재현의 과정 속에 드러난 얼굴인 셈이다. 이런 식으로 자화상을 보여주는 경우는 드물다. 책을 복사하는 복사기가 멀쩡한 작가의 얼굴을 복사했다. 그 결과 이 얼굴, 자화상은 다소 생각이 많은, 상처로 얼룩진 내면을 고통스럽게 상기시켜주는 편이다.
박진호는 인간의 몸, 몸 안의 고뇌라는 주제를 어떻게 사진적으로 소화할 수 있을까를 오랫동안 모색해 온 작가다. 그는 자신이 스스로 촬영대상이 되어 그 자신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변함없는 주제는 인간, 자기 자신이고 우선 그 얼굴, 몸이 해부와 관찰의 대상으로 올려졌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신체를 이용하고 그 신체를 복사기의 감광판에 밀착시켰다. 그리고 복사지 위에 나타난 영상의 결과를 다시 일반 카메라로 기록하는 일련의 과정을 보여준다. 그가 찍은 이미지는 그러니까 이중의 이미지다. 현실을 두 번 재현한 이미지인 것이다.
사진으로 찍은 이미지이기에 구체적인 대상, 얼굴의 재현이지만 그래서 구상의 흔적을 남기고 있지만 얼핏 보아서는 추상적이고 모호하다. 관객 스스로 이미지의 상징화를 도모할 수 있는 단서로 남겨진 이 ‘희박한’ 사진을 통해 독자는 다양한 사진적 읽기를 해나갈 수 있다.
이 작업은 실체의 얼굴을 복사기에 갖다 대고 그렇게 해서 남겨진 이미지를 다시 재이미지화 하는 일련의 과정을 보여준다. 이 같은 작가의 ‘실체-이미지-이미지’라는 이중의 여과장치는 ‘실체-이미지’라는 사진적 도식이 지니는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것 같다. 알다시피 사진이란 주어진 대상의 표면에 밀착되어 이를 재현한다. 그런 의미에서 사진은 철저히 시선의 논리 자체다. 카메라의 시선은 보다 가까이 하는 방식, 접촉을 모른다. 너무 바짝 달라붙으면 사진은 불가능하다. 적당한 거리, 심도가 요구된다. 그런데 이 작가는 아예 얼굴에 달라붙은 시선, 얼굴의 피부와 일체가 된 그런 사진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사실 사진은 그렇게 찍을 수 없다. 그래서 작가는 복사기를 이용해서 그런 사진을 보여준다.
작가의 복사 메커니즘은 카메라적 시선이 지니는 그 결함을 보충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러한 시선의 관점은 이른바 자신의 시선에 촉수를 달아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의 사진은 밀착과 근접에 따라 몸을 새롭게 보게 하고 우리 눈이 그 피부 위를 거닐고 만지고 들어가 보게 한다. 자기 얼굴을 지도처럼 펼쳐 보이고 낯익지만 무척 낯설은 대상으로 돌변시킨다. 사진 자체는 프레임의 작용에 의해 일상적인 것을 비일상적인 것으로 만들고 낯익고 친숙한 사물에 대한 습관적인 지각을 새롭게 하는 효과를 발생시킨다면 이 사진 다분히 원래의 사물이 갖는 성질을 파괴하고 새로운 코드의 옷을 입히고 있다.
여기서 얼굴 피부는 세계와 자신과의 접점이다. 인간은 신체라는 형태를 통해서만 세상에 존재한다. 신체는 하나의 표현계로서 존재한다. 피부는 몸을 감싸고 보호하는 피막이다. 결국 피부로 밖에 보여 지지 않는다. 피부는 나약하고 말랑거리고 상처받기 쉽다.
사실 인간의 피부는 언제나 불결한 외계에 노출되어 있다. 인간의 모든 표면적인 기관들은 피부가 변형된 것들이다. 결국 작가는 그렇게 변형된 피부의 흔적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우리는 이러한 천박스럽고 기이한 피부감각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다는 것이다.
박진호의 얼굴은 이미지 제작의 주체이면서 모델이고 객체이다. 여기서 주체와 개체, 시선과 피사체의 구분은 모호하다. 따라서 이 사진에서 피사체와 그것을 포착하는 시선은 중첩되었다. 그러니까 작가의 신체/얼굴은 는 피사체인 동시에 시선이고 신체인 동시에 재현되는 신체가 된다.
그는 자기 몸을 마치 탁본하듯이 한다. 얼굴을 복사기에 밀착시켰다. 복사기의 초점유리판에 자신의 얼굴을 올려놓고 울퉁불퉁한 표면을 가능한 평평하게 하기 위해 초점면에 최대한 가까이 밀착시키고 복사했다. 이 기록방법을 통해 이른바 거리는 사라졌다. 복사기의 거리는 사진기의 렌즈처럼 조절할 수 도 없고 처음부터 피사체와이 거리가 정해져있다. 사진이 대상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광선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 사진은 대상의 흔적이 아니라 광선의 흔적임을 새삼 깨닫게 한다.
작가는 이처럼 자신의 신체, 얼굴을 다소 가학적으로 복사기에 갖다 댄다. 신체에 대한 가학적인 다큐멘테이션을 통해 어떤 권력의 제약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광선의 세례에 의한 의식을 치루고 있어 보인다. 사방 50센티가 안되는 유리판 위에서 얼굴을 사정없이 올려놓았다.
그것은 일종의 퍼포먼스(연기)이다. 그것의 기록이 사진으로 나오고 있고 또한 이중의 이미지에 색상이 가미되는 미술적 개입이 된다. 차가운 판과 뜨거운 생생한 광선이 얼굴 피부를 훑어 내려간다. 복사기라는 또 하나의 촬영기술이자 기록인 셈이다. 입체적일 수밖에 없는 자신의 얼굴을 복사기에 최대한 밀착시킨다는 행위는 자신의 내면의 고통, 절규, 안간힘 등 고뇌하는 정신을 표현하는 안성맞춤의 프로세스다.
복사기가 극단적으로 흑백의 톤이 분리되는 영상을 제공할 수밖에 없기에 복사기의 평면 감광판이 기능이란 복사물을 밀착시킬수록 선명한 화질을 보장한다는 점이 작가가 기도했을 행위의 치열함에 도움을 준다. 그가 이용하는 복사와 얼굴이 그려내는 기이한 이미지는 그만이 획득할 수 있는 표현의 육질적인 표정으로 드러난다. 그러한 잠시 이내 그 순간이 기록된다.
사진의 기능이 기록이라면 다들 카메라 앞에 서서 그 시간을 견디듯이 작가는 숨을 멈추고 몸을 움직이지 않고 더욱 강하게 밀착시켜 온전히 기록되기를 스스로 투쟁한다. 철저하게 자신을 기록하고 자신을 ‘미라’로 만드는 방법이다. 그 복사이미지의 일부분을 클로즈업 렌즈로 1:1이나 1:2정도의 배율로 접사 촬영한 후 확대 인화했다.
흑백 복사기는 심도가 매우 얕아 평면이 아니면 거의 복사가 되지 않기에 굴곡이 있는 신체부위를 평면화 하려고 초점 유리판에 밀착시키면 강하게 밀착된 부분은 디테일 없이 하얗게, 평면으로 된 부분은 적절한 디테일이 있는 회색 톤으로 밀착되지 않은 부분은 검은 배경으로 표현된다.
복사되고 클로즈업되고 크게 확대된 얼굴은 더 이상 육체의 물질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그로테스크한 추상이 된다. 추상은 군더더기를 떨쳐버린 순수를 뜻한다. 그렇게 작가는 육체의 순수, 얼굴의 순수를 되찾는다. 얼굴처럼 보이면서도 얼굴이 아니고 얼굴처럼 보이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는 얼굴이다. 작가의 표현을 빌면 그것은 얼굴의 잃어버린 순결을 회복하기 위해 불려나와야만 하는 시간이라고 한다.
아울러 복사기는 같은 결과를 두 번 다시 만들어내지 못한다. 복사기는 계속 변화한다. 작가의 얼굴도 현실의 이미지를 비현실화하면서 결과물이 변화에 대한 관심을 집중한다. 자신의 모습도 항상성을 유지할 수 없다는 얘기다. 복사기의 일회성과 함께 자신의 얼굴, 몸은 끊임없는 변형을 이룬다. 발전, 퇴행, 노화일 수도 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순간이 아련히 새겨 있다.
그것은 분명 동결, 박제, 화석, 미라다. 자기 얼굴을 샅샅이 탐색하고 들여다보고 확대하고 그렇게 드러난 얼굴은 낯설고 기이하다. 자신의 얼굴이 이토록 당혹한 풍경이 되었다. ‘나’란 존재가 새삼스러워진다.
필자 소개
성균관대대학원미술사전공, 전 금호미술관큐레이터, 현재 경기대학교예술대학 교수, 미술평론가.
저서로는 <예술가로 산다는 것>, <식물성의 사유>, <미술전시장 가는 날>, <나는 붓을 던져도 그림이 된다>, <가족을 그리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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