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의 자화상 <인곡유거도>
[박영택 교수의 '화가의 얼굴에서 내 얼굴을 보다']
전통적인 산수화는 사람이‘자연 공간 속에서 존재하는 방식을 창조하는 것’과 관련된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유교적 이념 아래 군자의 덕목, 바로 인(仁)과 지(智)를 추구하였는데 이를 산과 물에서 찾았다. 산수를 소요하고 바라보며 산수를 그리고 완상하는 이유는 군자가 되고자 하는 일종의 수양과 수신의 과정이었다. 따라서 가장 이상적인 산수의 경관을 보여주는 것이 산수화다.
동시에 선비들은 자신의 원림에서 이상적인 경관을 조망하고 싶은 욕구에 따라 건축적 차경(借景)에 의해 집을 짓고 그 안에서 자연경관을 관조하였다. 차경이란 자연경관을 사람이 직접 찾아가지 않고도 집 안에서 조망하며 즐기도록 하는 경관도입방식을 지칭한다. 이 차경은 마치 산수화와 같다.
선비들은 군자나 신선의 길에 가까운 삶이란 좋은 산수에 은둔하여 사는 것이라 여겼는데 이를 현실적으로 실현하기 어려운 경우 산수화로 대처하였다. 사회와 가족에 대한 의무를 제껴 두고, 산에 가서 은둔만 할 수 없는 이유로 숲과 시내를 그려 방에서 바라보았던 것이다.
여기서 산수화는 실제 산수를 대신한다. 선비들은 풍치 좋은 자연 환경 속에서 검소한 생계 수단에 의지하여 사는 은자/군자의 삶을 꿈꾸었다. 자고로 군자를 꿈꾸는 선비라면, 나아가 신선이 되고자 한다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느냐를 보여주는 이미지이자 삶의 공간에 어떻게 거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경구처럼, 벼락처럼 안기는 그림이 바로 산수화다. 주어진 자연 공간 속에서 인간으로서의 바람직한 삶의 이상을 꿈꿔왔던 것이고 그것을 도상화 시킨 그림인 것이다.
자연을 즐기고 풍류와 은둔적 삶을 지향하는 선비들의 거주지는 그래서 항상 자연과 함께 하고 있으며 동시에 열려 있다. 전통산수화에는 항상 집이 등장한다. 그 집은 주변과 조화롭게 어울려 자연과 서로 이어지면서 우주론적 테두리에 열려있다. 그 집에 선비가 좌정하고 밖/자연을 바라보고 있다. 그것은 우주 자연의 이치를 헤아리는 일이기도 하다. 아울러 대자연과 자신이 유기적 연관관계를 갖고 있음을 새삼 깨닫고자 했을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자연의 이 무한영역에 자신을, 주체의 감각과 사고를 열어두는 것이었다. 아울러 그것은 인간이 절대적 주체의 자리임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성의 타자성’에 참여하는 것이다. 동시에 ‘지금 여기 살아있음’을 깨닫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집을 짓는다는 것은 자기 집과 그 주변세계의 배치관계가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좋은 집이 되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이 편안하고 쾌적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하며 그 집이 주변의 환경과 교감할 수 있는 것이어야 했다. 사람의 심성은 그가 어떤 공간에 사느냐에 따라 규정된다.
집은 물리적으로 조직된 것이자 동시에 심성적으로 조직된 것이기도 하다. 그곳은 자아가 쉬는 곳이면서 자라나는 곳이며, 홀로 있으면서도 더 큰 전체를 예비하고 준비하는 곳이다. 이처럼 집은 개체가 세계의 유기적 전체성과 시적으로 삼투하는 곳이며 이러한 삼투 아래 자기 자신을 형성해가는 공간인 것이다.
여기서 공간의 인간적 가능성은, 개체와 세계, 인간과 자연, 집안 세계와 집밖 세계가 잠시 만날 때, 잠시 완성된다. 그것은 ‘실존이 관계로 확장되는 ’과정이다. 인간 실존은 개체와 개체, 인간과 자연의 관계로 확장되고, 이렇게 확장된 관계는 다시 개별적 실존으로 회귀한다. 결국 집이란 '무한한 자연 공간에 대한 지금 여기에서의 유한한 구성적 개입'이다. 이런 구성적 개입을 통해 무한한 공간을 적극 인간화한다.
인왕산 밑에 위치한 동네에 살았던 겸재 정선(1676-1759)이 그 자신의 후반 생애, 60대 중반의 생활모습을 그린 이른바 자화경(自畵景)인 ‘인곡 유거도’(仁谷幽居圖)는 바로 그러한 의미가 선연하게 내려앉은 그림이다. 작은 그림이지만 볼수록 놀랍고 흥미로운 그림이다.
간송미술관 특별전에 나온 이 그림 앞에서 오랫동안 붙어있었던 기억이 난다. 오른쪽 하단의 귀통이에 자그마하게 위치한 꼽패집의 모서리방에서 겸재 자신으로 보이는 도포 차림의 선비가 서재에서, 자신의 서책이 쌓인 곁에서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다. 수목이 골마다 우거진 뒷산이 펼쳐져 있고 앞 마당에 큰 버드나무와 오동나무등 기타 잡수들이 서 있으며, 한 여름의 무성한 기운을 듬뿍 드러내주고 있는 것 같다. 이엉을 얹은 토담이 둘러쳐져 자연스레 만든 후원, 초가 지붕의 일각문(一各門), 덩쿨이 우거지고 잎새들이 묽고 엷은 먹의 자잘한 점으로 성글게 찍혀져 있다.
개결한 선비의 조촐한 생활 분위기가 물씬거리는 이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열린 방문 속의 선비가 되어 책을 읽고 있는 듯한 체험에 황홀하게 빠진다. 선비의 삶이 무엇이며 자연 속에서 자신의 몸을 어떻게 수신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역작이다. 무시무시한 욕망과 자본의 힘으로 사납기 그지없는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삶의 자세가 아니겠는가?
필자 소개
성균관대대학원미술사전공, 전 금호미술관큐레이터, 현재 경기대학교예술대학 교수, 미술평론가.
저서로는 <예술가로 산다는 것>, <식물성의 사유>, <미술전시장 가는 날>, <나는 붓을 던져도 그림이 된다>, <가족을 그리다> 등이 있다.
동시에 선비들은 자신의 원림에서 이상적인 경관을 조망하고 싶은 욕구에 따라 건축적 차경(借景)에 의해 집을 짓고 그 안에서 자연경관을 관조하였다. 차경이란 자연경관을 사람이 직접 찾아가지 않고도 집 안에서 조망하며 즐기도록 하는 경관도입방식을 지칭한다. 이 차경은 마치 산수화와 같다.
선비들은 군자나 신선의 길에 가까운 삶이란 좋은 산수에 은둔하여 사는 것이라 여겼는데 이를 현실적으로 실현하기 어려운 경우 산수화로 대처하였다. 사회와 가족에 대한 의무를 제껴 두고, 산에 가서 은둔만 할 수 없는 이유로 숲과 시내를 그려 방에서 바라보았던 것이다.
여기서 산수화는 실제 산수를 대신한다. 선비들은 풍치 좋은 자연 환경 속에서 검소한 생계 수단에 의지하여 사는 은자/군자의 삶을 꿈꾸었다. 자고로 군자를 꿈꾸는 선비라면, 나아가 신선이 되고자 한다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느냐를 보여주는 이미지이자 삶의 공간에 어떻게 거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경구처럼, 벼락처럼 안기는 그림이 바로 산수화다. 주어진 자연 공간 속에서 인간으로서의 바람직한 삶의 이상을 꿈꿔왔던 것이고 그것을 도상화 시킨 그림인 것이다.
자연을 즐기고 풍류와 은둔적 삶을 지향하는 선비들의 거주지는 그래서 항상 자연과 함께 하고 있으며 동시에 열려 있다. 전통산수화에는 항상 집이 등장한다. 그 집은 주변과 조화롭게 어울려 자연과 서로 이어지면서 우주론적 테두리에 열려있다. 그 집에 선비가 좌정하고 밖/자연을 바라보고 있다. 그것은 우주 자연의 이치를 헤아리는 일이기도 하다. 아울러 대자연과 자신이 유기적 연관관계를 갖고 있음을 새삼 깨닫고자 했을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자연의 이 무한영역에 자신을, 주체의 감각과 사고를 열어두는 것이었다. 아울러 그것은 인간이 절대적 주체의 자리임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성의 타자성’에 참여하는 것이다. 동시에 ‘지금 여기 살아있음’을 깨닫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집을 짓는다는 것은 자기 집과 그 주변세계의 배치관계가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좋은 집이 되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이 편안하고 쾌적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하며 그 집이 주변의 환경과 교감할 수 있는 것이어야 했다. 사람의 심성은 그가 어떤 공간에 사느냐에 따라 규정된다.
집은 물리적으로 조직된 것이자 동시에 심성적으로 조직된 것이기도 하다. 그곳은 자아가 쉬는 곳이면서 자라나는 곳이며, 홀로 있으면서도 더 큰 전체를 예비하고 준비하는 곳이다. 이처럼 집은 개체가 세계의 유기적 전체성과 시적으로 삼투하는 곳이며 이러한 삼투 아래 자기 자신을 형성해가는 공간인 것이다.
여기서 공간의 인간적 가능성은, 개체와 세계, 인간과 자연, 집안 세계와 집밖 세계가 잠시 만날 때, 잠시 완성된다. 그것은 ‘실존이 관계로 확장되는 ’과정이다. 인간 실존은 개체와 개체, 인간과 자연의 관계로 확장되고, 이렇게 확장된 관계는 다시 개별적 실존으로 회귀한다. 결국 집이란 '무한한 자연 공간에 대한 지금 여기에서의 유한한 구성적 개입'이다. 이런 구성적 개입을 통해 무한한 공간을 적극 인간화한다.
인왕산 밑에 위치한 동네에 살았던 겸재 정선(1676-1759)이 그 자신의 후반 생애, 60대 중반의 생활모습을 그린 이른바 자화경(自畵景)인 ‘인곡 유거도’(仁谷幽居圖)는 바로 그러한 의미가 선연하게 내려앉은 그림이다. 작은 그림이지만 볼수록 놀랍고 흥미로운 그림이다.
간송미술관 특별전에 나온 이 그림 앞에서 오랫동안 붙어있었던 기억이 난다. 오른쪽 하단의 귀통이에 자그마하게 위치한 꼽패집의 모서리방에서 겸재 자신으로 보이는 도포 차림의 선비가 서재에서, 자신의 서책이 쌓인 곁에서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다. 수목이 골마다 우거진 뒷산이 펼쳐져 있고 앞 마당에 큰 버드나무와 오동나무등 기타 잡수들이 서 있으며, 한 여름의 무성한 기운을 듬뿍 드러내주고 있는 것 같다. 이엉을 얹은 토담이 둘러쳐져 자연스레 만든 후원, 초가 지붕의 일각문(一各門), 덩쿨이 우거지고 잎새들이 묽고 엷은 먹의 자잘한 점으로 성글게 찍혀져 있다.
개결한 선비의 조촐한 생활 분위기가 물씬거리는 이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열린 방문 속의 선비가 되어 책을 읽고 있는 듯한 체험에 황홀하게 빠진다. 선비의 삶이 무엇이며 자연 속에서 자신의 몸을 어떻게 수신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역작이다. 무시무시한 욕망과 자본의 힘으로 사납기 그지없는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삶의 자세가 아니겠는가?
필자 소개
성균관대대학원미술사전공, 전 금호미술관큐레이터, 현재 경기대학교예술대학 교수, 미술평론가.
저서로는 <예술가로 산다는 것>, <식물성의 사유>, <미술전시장 가는 날>, <나는 붓을 던져도 그림이 된다>, <가족을 그리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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