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속화나 산사 담벼락 그림 같으나
[박영택 교수의 '화가의 얼굴에서 내 얼굴을 보다']
붉은 산과 아름다운 꽃들이 균사처럼 피어있는 바위를 사이에 두고 물에 떠내려가는 자신과 아들의 초상이다. 산수화 속의 풍경 같기도 하고 무속화나 산사의 담벼락에 그려진 그림을 연상시킨다. 아들은 작가의 등에 올라앉아 한 손은 편두통에 시달리는 엄마의 관자놀이를 눌러주고 있고 다른 손은 머리에 얹었다. 아들은 우리를 바라보고 있고 엄마, 작가는 떠내려가는 앞 방향에 초점을 모았다. 무표정하고 무심해 보이는 이 둘의 얼굴은 그러나 결연해 보이기도 하다.
어딘지 그로테스크하고 몽환적인 풍경이다. 현실계가 아니라 다분히 비현실감이 감도는 괴이한 풍경을 가로지르며 작가와 작가의 아들이 유유히 떠내려간다. 텅 빈 세상에 의지할 것은 오로지 그 둘밖에 없어 보인다. 그 둘은 그런 면에서 하나의 육체다. 분리되거나 해체될 수 없다.
아기는 엄마 곁에서, 엄마는 아들의 존재로 인해서 이 세상에 살아있다는,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는다. 한국 사회에서 엄마와 아들의 관계는 끔찍하다. 그 사이로 아버지란 존재가 개입될 틈은 별로 없다. 이 지점에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균열이 간다. 최소한 한국 사회에서만큼은 말이다.
적지 않은 나이를 먹은 필자 역시 엄마가 있다. 그녀에게 나는 여전히 어린 시절의 그 위태로운 아들로 고착되어 있다. 밥은 먹고 다니는 지, 어디 아픈 데는 없는지, 교통사고 조심하라고 돈 버느라 고생한다고 이래저래 온갖 걱정에 시름하신다. 온통 그 걱정으로 눌려서 사신다. 자식은 그런 것이다. 죽기 전까지 오로지 그 자식 걱정으로 노심초사하다가 자멸한다.
어머니들에게 가족구성원은 그녀의 전부다. 대부분 그녀의 삶은 오로지 그 가족을 위해 희생된다. 그녀의 삶은 부재하다. 자신의 분신인 그 새끼의 그림자로 자족한다.
그림 속 그녀는 누군가의 부인이고 아기 엄마며 그리고 작가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스스로 주체적인 자리를 갖기 보다는 가족구성원의 일원으로서만 호명된다. 누구누구의 부인, 애기엄마 등으로 불린다. 자신의 이름이 불려지지 않는다. 여자들은 이 사회에서 오랫동안 이름이 지워져있었다.
김은진은 이 위태로운 세상에서 아들과 함께 힘겹게 살아갈 시간을 떠올렸다. 그러나 동시에 아들과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은 또한 더없는 위안이고 행복이다. 화면은 뜨거운 에너지로 들끓는다. 그것은 이미지와 색채의 비등점으로 달아올랐다. 중심도 주변도 없이 화면 가득 강렬한 도상적 이미지가 흩어져 있는가 하면 종교화를 연상시킨다. 날것의 내음을 풍기는 원색들이 그 도상들을 불질러놓아 마냥 환하다. 온통 '발광'發光한다.
익숙해 보이면서도 낯설고 생경한 그림 안에는 다양한 종교적 도상들이 본래의 모습에서 조금씩 변형된 체 풍경으로 펼쳐져있고 그것은 작가의 내면과 의식을 환각적으로 엿보게 하는 장면화가 되고 있다. 이 비현실계는 현실계를 흐트러트리고 교란하고 의식과 이성이 지배하는 실세계의 고리를 끊는다. 그것은 오로지 꿈과 몽상, 환영, 상상력에 의해 유희되는 만화경 같다. 그래서인지 이 채색화는 조금은 낯설고 독하다.
그것은 근대 이후 이 땅에서 전개된, 서구에서 수용된 미술에 관한 개념적 게임의 추종과 연결된 것도 아니고 동양화의 전통을 강박적으로 의식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민화나 종교적 도상의 치졸한, 소박한 각색과도 거리가 멀다. 형상과 색채를 빌어 장식하고 이야기를 가설하고 자신의 상상력을 온전히 시각화 하는 일이 구도처럼 전개되는 그림그리기다. 상상의 원초적 흐름과 함께 하는 그림이기도 하다. 그것들이 온전히 화면을 장악하고 탱탱하게 화면을 찢어 놓는다.
키치적인 이미지연출에 가까워 보이면서도 그것의 가벼움에 비해 좀 비장하고 괴이하다. 보는 이들을 당혹스럽게 하는 서사와 연출은 그만큼 낯설고 새로운 이종과 변성으로 '마구' 나아간다. 뇌 속에 들어와 있는 모든 이미지들을 호명하는 작가의 음성은 초혼과도 같고 천지간 신들을 깨우고 불러들이는 종소리 같다.
시각적인 볼거리가 가득한 이 화면은 환각적 상상력과 기묘한 서사장면 등이 하나로 수놓아져 있고 작가의 의식과 상상의 풍경 또한 함께 펼쳐져 있다. 모든 것들은 용광로 같은 그림 안에서 죄다 녹는다. 삶의 야생의 에너지가 작가를 통해 그림으로 흘러나온다.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온통 그림에 집중하고 있다. 이 세상의 모든 도상들은 유한한 생을 지닌 나약한 인간들이 지닌 그 공포와 불안을 이기고자 염원했던 것들로서 서늘하고 측은하고 서럽고 두려우며 더러 황홀하게 매만져져 있는 것들이다.
김은진은 그렇게 ‘쌔고’ 강렬하며 섬뜩한 주술적 도상들을 자유롭게 편집, 재배열하고 그 위에 자신의 자유롭고 적극적인 상상력의 힘에 의해 불거진 이야기를 올려놓는다. 다양한 시공간 속에서 기능했던 도상 혹은 주술적 이미지들은 단어나 음표, 음절이 되어 재구성되고 재배치된다. 그것들은 본래의 문맥에서 빠져나와 한 개인의 서사에 주술적 차원으로 다시 변환된 것들, 새롭게 모여 이동 중인 것들이다.
김은진은 타고난 이야기꾼이고 이야기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재능이 돋보인다. 그 이야기는 기존 미술의 관례적 서사에서 이탈해있다. 그것은 근대 미술 이전으로 회귀하여 길어올린 것들이자 그것들과 함께 했었던 이들의 마음을 다시 환생시키고 기억하는 가운데서 색다르고 흥미로운 이야기로 다시 출현한다.
작가는 전통 채색화와 이야기 그림, 종교화 등이 무엇이었는지를 상기시키고 그것이 여전히 오늘날 한 개인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기능하는 지점에 대해 발언한다. 김은진은 이 도상적 전통의 내음이 진하게 풍기는 것들을 가지고 현재 자신의 감정과 상황, 염원, 꿈과 악몽, 기원 등을 보여주는 맥락에서 주무르고 있다. 그것은 여전히 이미지의 물신주의를 실현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이미지를 통한 영생과 치유, 간절하고 뜨거운 바람의 형상화!
이 채색화는 박생광, 천경자로 이어지는 한국 현대 채색화의 물신주의 전통과 연결되어 있다. 채색화 전통을 새삼 환기시키는 동시에 이를 단순한 장식성이나 소재주의로 전락시키지 않고 자신의 서사에 연결, 이야기 그림으로 풀어나가고 있다. 아울러 그것은 세련되거나 정교하다기 보다는 날것으로, 야성으로 번득인다. 한 개인의 감성과 상상력, 감각이 색과 도상으로 자유롭게 펼쳐진다.
강렬하고 생경한 색상의 충돌과 조합은 이미지의 낯설음을 증폭한다. 그것은 익숙하면서도 어딘지 불길하고 그로테스크하면서도 눈을 쉽게 거두지 못하게 한다. 절제되지 않은 도상들과 화려한 색채들은 화면 안에서 산맥과 폭포와 바다를 이루고 있다. 지천에 꽃이 만발하고 그칠 줄 모르고 지속해서 쏟아지는 물줄기와 어디론가 흐르는 엄청난 물/바다를 보여주는 풍경은 자기 내면에 담긴 세상의 장면이다. 특히 흐르고 쏟아지는 물은 유동하는 힘과 에너지, 무한히 반복되는 생의 윤회를 은유한다.
그 풍경 안에 작가와 아들이 등장한다. 이 물은 또한 씻어냄, 죄사함, 세례, 정화 그리고 삶과 인생의 난관과 역경 등도 은유한다. 아울러 물을 삶의 시련이나 인생의 경로에 비유한다면 작가는 그 물속에서 바둥대는 자신의 모습을 본다. 그 안에 아이와 자신도 그렇게 정처없이 떠밀려 흐른다.
필자 소개
성균관대대학원미술사전공, 전 금호미술관큐레이터, 현재 경기대학교예술대학 교수, 미술평론가.
저서로는 <예술가로 산다는 것>, <식물성의 사유>, <미술전시장 가는 날>, <나는 붓을 던져도 그림이 된다>, <가족을 그리다> 등이 있다.
어딘지 그로테스크하고 몽환적인 풍경이다. 현실계가 아니라 다분히 비현실감이 감도는 괴이한 풍경을 가로지르며 작가와 작가의 아들이 유유히 떠내려간다. 텅 빈 세상에 의지할 것은 오로지 그 둘밖에 없어 보인다. 그 둘은 그런 면에서 하나의 육체다. 분리되거나 해체될 수 없다.
아기는 엄마 곁에서, 엄마는 아들의 존재로 인해서 이 세상에 살아있다는,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는다. 한국 사회에서 엄마와 아들의 관계는 끔찍하다. 그 사이로 아버지란 존재가 개입될 틈은 별로 없다. 이 지점에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균열이 간다. 최소한 한국 사회에서만큼은 말이다.
적지 않은 나이를 먹은 필자 역시 엄마가 있다. 그녀에게 나는 여전히 어린 시절의 그 위태로운 아들로 고착되어 있다. 밥은 먹고 다니는 지, 어디 아픈 데는 없는지, 교통사고 조심하라고 돈 버느라 고생한다고 이래저래 온갖 걱정에 시름하신다. 온통 그 걱정으로 눌려서 사신다. 자식은 그런 것이다. 죽기 전까지 오로지 그 자식 걱정으로 노심초사하다가 자멸한다.
어머니들에게 가족구성원은 그녀의 전부다. 대부분 그녀의 삶은 오로지 그 가족을 위해 희생된다. 그녀의 삶은 부재하다. 자신의 분신인 그 새끼의 그림자로 자족한다.
그림 속 그녀는 누군가의 부인이고 아기 엄마며 그리고 작가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스스로 주체적인 자리를 갖기 보다는 가족구성원의 일원으로서만 호명된다. 누구누구의 부인, 애기엄마 등으로 불린다. 자신의 이름이 불려지지 않는다. 여자들은 이 사회에서 오랫동안 이름이 지워져있었다.
김은진은 이 위태로운 세상에서 아들과 함께 힘겹게 살아갈 시간을 떠올렸다. 그러나 동시에 아들과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은 또한 더없는 위안이고 행복이다. 화면은 뜨거운 에너지로 들끓는다. 그것은 이미지와 색채의 비등점으로 달아올랐다. 중심도 주변도 없이 화면 가득 강렬한 도상적 이미지가 흩어져 있는가 하면 종교화를 연상시킨다. 날것의 내음을 풍기는 원색들이 그 도상들을 불질러놓아 마냥 환하다. 온통 '발광'發光한다.
익숙해 보이면서도 낯설고 생경한 그림 안에는 다양한 종교적 도상들이 본래의 모습에서 조금씩 변형된 체 풍경으로 펼쳐져있고 그것은 작가의 내면과 의식을 환각적으로 엿보게 하는 장면화가 되고 있다. 이 비현실계는 현실계를 흐트러트리고 교란하고 의식과 이성이 지배하는 실세계의 고리를 끊는다. 그것은 오로지 꿈과 몽상, 환영, 상상력에 의해 유희되는 만화경 같다. 그래서인지 이 채색화는 조금은 낯설고 독하다.
그것은 근대 이후 이 땅에서 전개된, 서구에서 수용된 미술에 관한 개념적 게임의 추종과 연결된 것도 아니고 동양화의 전통을 강박적으로 의식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민화나 종교적 도상의 치졸한, 소박한 각색과도 거리가 멀다. 형상과 색채를 빌어 장식하고 이야기를 가설하고 자신의 상상력을 온전히 시각화 하는 일이 구도처럼 전개되는 그림그리기다. 상상의 원초적 흐름과 함께 하는 그림이기도 하다. 그것들이 온전히 화면을 장악하고 탱탱하게 화면을 찢어 놓는다.
키치적인 이미지연출에 가까워 보이면서도 그것의 가벼움에 비해 좀 비장하고 괴이하다. 보는 이들을 당혹스럽게 하는 서사와 연출은 그만큼 낯설고 새로운 이종과 변성으로 '마구' 나아간다. 뇌 속에 들어와 있는 모든 이미지들을 호명하는 작가의 음성은 초혼과도 같고 천지간 신들을 깨우고 불러들이는 종소리 같다.
시각적인 볼거리가 가득한 이 화면은 환각적 상상력과 기묘한 서사장면 등이 하나로 수놓아져 있고 작가의 의식과 상상의 풍경 또한 함께 펼쳐져 있다. 모든 것들은 용광로 같은 그림 안에서 죄다 녹는다. 삶의 야생의 에너지가 작가를 통해 그림으로 흘러나온다.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온통 그림에 집중하고 있다. 이 세상의 모든 도상들은 유한한 생을 지닌 나약한 인간들이 지닌 그 공포와 불안을 이기고자 염원했던 것들로서 서늘하고 측은하고 서럽고 두려우며 더러 황홀하게 매만져져 있는 것들이다.
김은진은 그렇게 ‘쌔고’ 강렬하며 섬뜩한 주술적 도상들을 자유롭게 편집, 재배열하고 그 위에 자신의 자유롭고 적극적인 상상력의 힘에 의해 불거진 이야기를 올려놓는다. 다양한 시공간 속에서 기능했던 도상 혹은 주술적 이미지들은 단어나 음표, 음절이 되어 재구성되고 재배치된다. 그것들은 본래의 문맥에서 빠져나와 한 개인의 서사에 주술적 차원으로 다시 변환된 것들, 새롭게 모여 이동 중인 것들이다.
김은진은 타고난 이야기꾼이고 이야기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재능이 돋보인다. 그 이야기는 기존 미술의 관례적 서사에서 이탈해있다. 그것은 근대 미술 이전으로 회귀하여 길어올린 것들이자 그것들과 함께 했었던 이들의 마음을 다시 환생시키고 기억하는 가운데서 색다르고 흥미로운 이야기로 다시 출현한다.
작가는 전통 채색화와 이야기 그림, 종교화 등이 무엇이었는지를 상기시키고 그것이 여전히 오늘날 한 개인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기능하는 지점에 대해 발언한다. 김은진은 이 도상적 전통의 내음이 진하게 풍기는 것들을 가지고 현재 자신의 감정과 상황, 염원, 꿈과 악몽, 기원 등을 보여주는 맥락에서 주무르고 있다. 그것은 여전히 이미지의 물신주의를 실현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이미지를 통한 영생과 치유, 간절하고 뜨거운 바람의 형상화!
이 채색화는 박생광, 천경자로 이어지는 한국 현대 채색화의 물신주의 전통과 연결되어 있다. 채색화 전통을 새삼 환기시키는 동시에 이를 단순한 장식성이나 소재주의로 전락시키지 않고 자신의 서사에 연결, 이야기 그림으로 풀어나가고 있다. 아울러 그것은 세련되거나 정교하다기 보다는 날것으로, 야성으로 번득인다. 한 개인의 감성과 상상력, 감각이 색과 도상으로 자유롭게 펼쳐진다.
강렬하고 생경한 색상의 충돌과 조합은 이미지의 낯설음을 증폭한다. 그것은 익숙하면서도 어딘지 불길하고 그로테스크하면서도 눈을 쉽게 거두지 못하게 한다. 절제되지 않은 도상들과 화려한 색채들은 화면 안에서 산맥과 폭포와 바다를 이루고 있다. 지천에 꽃이 만발하고 그칠 줄 모르고 지속해서 쏟아지는 물줄기와 어디론가 흐르는 엄청난 물/바다를 보여주는 풍경은 자기 내면에 담긴 세상의 장면이다. 특히 흐르고 쏟아지는 물은 유동하는 힘과 에너지, 무한히 반복되는 생의 윤회를 은유한다.
그 풍경 안에 작가와 아들이 등장한다. 이 물은 또한 씻어냄, 죄사함, 세례, 정화 그리고 삶과 인생의 난관과 역경 등도 은유한다. 아울러 물을 삶의 시련이나 인생의 경로에 비유한다면 작가는 그 물속에서 바둥대는 자신의 모습을 본다. 그 안에 아이와 자신도 그렇게 정처없이 떠밀려 흐른다.
필자 소개
성균관대대학원미술사전공, 전 금호미술관큐레이터, 현재 경기대학교예술대학 교수, 미술평론가.
저서로는 <예술가로 산다는 것>, <식물성의 사유>, <미술전시장 가는 날>, <나는 붓을 던져도 그림이 된다>, <가족을 그리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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