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을 그린 것인가, 지운 것인가
[박영택 교수의 '화가의 얼굴에서 내 얼굴을 보다']
이것은 얼굴을 그린 것인가, 아니면 지운 것인가, 구분하기 어렵다. 그리면서 동시에 지워나간 듯하다. 그리기와 지우기를 반복해서 남은 상처 같은 흔적들만이 엉켜 있다. 자신의 얼굴을 ‘재현’하려다 그것이 불가능함을 알고 머뭇거리다 짐짓 망친 듯하다. 아니 망친 그림일 수밖에 없다.
‘나’를 온전히 재현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단지 거울 속에 비친 자기 얼굴을 따라 그리면 그것이 과연 나일까? 나는 누구일까? 나는 나를 알기나 하나? 내가 모르는 나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이런저런 생각이 부풀어 오르면 내가 바라보는 나는 너무도 낯선 존재가 되어 있다. 더러 괴물 같은 때도 있다. 납득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완벽한 타자가 되었을 때 말이다. 내 몸 속의 내가 누군지 모른다는 사실은 끔찍하다.
사실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잘 모른다. 나를 내가 안다고 하지만 나는 내가 아는 것 속에 있지 않다. 나란 주체는 결국 타자와의 어떤 관계 속에서만 자리한다. 타자 없는 나는 없다. 동시에 내 얼굴은 나의 것이지만 그것은 무수한 타자의 눈에서 자리한다. 내 얼굴의 실질적인 주인은 타자들이다.
그래서 나는 나하고 무관하게 타자에게 보여 지고 뜯어 먹히고 자의적으로 해석되고 간편하게 처리되며 오해 속에 가늠된다. 그러니까 주체란 재현된 일루전이 지시해주는 것이 아니라, 무분별하고 이질적인 조각들을 대면하는 관객(나)의 의식 속에서 재구성되는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얼굴을 그리려고 하다가 끝내 못 그린 것인가? 선명한 얼굴을 그리려다가 해체되고 망실된 얼굴만이 남았다. 얼굴을 그리려고 했다가 그리지 못하고 결국 그림 그리는 과정만이 선연하게 남아 떠돈다. 붓질만이, 다소 격한 신체의 움직임만이, 자신의 얼굴을 그리려했던 순간의 마음과 호흡만이 비처럼 흐르고 바람처럼 떠돈다. 이 그림은 진동하는 자화상이다.
작가는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나란 존재를 하염없이 물어본다. 그 얼굴에 나는 있고, 없다. 얼굴은 자신의 외면과 내면 모두를 보여주는 경계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얼굴, 표면을 통해 그 이면을 떠올려본다. 상상한다. 시각적 대상이 아닌 얼굴 속은 얼굴 표면을 통해서만 유추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얼굴은 다분히 사회 속에서 조율, 관리되는 기호다. 들뢰즈는 얼굴과 머리/대가리를 구분한다. 그에 의하면 얼굴은 사회적 기호이고 머리는 생물학적인 자리다. 그래서 들뢰즈는 오로지 머리만이 진정한 주체(자신)에 속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얼굴이 사회와 부단히 연동된 것이라면 머리는 이와는 다른 차원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작가는 자신의 얼굴이 아닌 머리, 대가리를 그리려는 듯하다. “머리는 표상이 부재하는 기표인 탓에 타자에게 낯설고 심지어는 자신에게조차 낯설다”는 것이다.
이처럼 머리는 한 개인의 무의식적인 욕망, 어둡고 눅눅한 침묵, 도저히 알 수 없는 사연과 내력, 상처와 아픔, 어떤 트라우마와 연관된다. 알다시피 트라우마란 그 이유를 알 수도, 치유할 수 도 없는 일종의 존재론적 상처를 지칭한다. 자화상을 그린다는 것은 이처럼 트라우마를 지닌 얼굴, 머리와 대면하는 일이다. 인간이기에 숙명적으로 거느리고 있는 자의식으로 끈적거리는 얼굴이다. 그 얼굴, 머리는 과연 재현될 수 있는가?
이 자화상은 클로즈업된 얼굴이다. 그것은 하나의 통일된 전체를 파괴하여 통일성이 없는 파편적인 부분들로 만들어버렸다. 통일된 유기체로서의 신체라는 조화로운 형상으로부터, 표준적 비례 속에 귀속될 수 없는 하나의 특수한 ‘파편’을 떼어내어 드러낸 것이다. 그것은 이질적이고 부수어진 세계다. 여기서 인격적 표징인 얼굴은 파편이 되었다.
조작조각 갈라지고 해체되어버리는 듯하다. 온전하고 통일성이 있고 조화로운 얼굴에서 벗어나 있다. 지시적이며 명확한 형태 속에 자리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이 자화상은 누군가의 얼굴이라기보다는 모호하고 낯선 사물로 다가온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사유하도록 강요하는 사물, 이른바 우연히 맞닥뜨리는 기호에 해당한다. 기호란 관조의 대상이 아니라 사유가 시작되도록 정신을 자극하는 대상이다. 그래서 기호를 ‘우연히’ 나타나 자기 안에 들어 있는 바를 해석하기를 ‘강요’하는 대상이라고 말한다.
박진홍의 자화상은 보는 이들에게 그 얼굴의 이면을 들여다보도록 한다. 누군가의 얼굴 속에 깃든 상처를 암시한다. 그곳을 보게 한다. 그것을 표현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일까. 작가는 그리고 지우는 과정을 반복한다. 그것은 긍정과 부정의 반복이기도 하다. 나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나는 내 얼굴이 주인이기도 하고 그 얼굴이 너무 낯설기도 하다. 그것은 그릴 수 있는 대상이면서도 도저히 그릴 수 없는 내막이다.
따라서 이 자화상은 모호하게 얼굴을 지시하고 알려주는 동시에 그것을 의도적으로 뭉갠다. 은폐한다. 긍정과 부정, 표현과 표현불가능 그 사이에서 격렬하게 떨어대는 알 수 없는 얼굴, 머리, 그것이 바로 작가의 자화상이다. 우리 모두의 얼굴이다. 대가리다.
필자 소개
성균관대대학원미술사전공, 전 금호미술관큐레이터, 현재 경기대학교예술대학 교수, 미술평론가.
저서로는 <예술가로 산다는 것>, <식물성의 사유>, <미술전시장 가는 날>, <나는 붓을 던져도 그림이 된다>, <가족을 그리다> 등이 있다.
‘나’를 온전히 재현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단지 거울 속에 비친 자기 얼굴을 따라 그리면 그것이 과연 나일까? 나는 누구일까? 나는 나를 알기나 하나? 내가 모르는 나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이런저런 생각이 부풀어 오르면 내가 바라보는 나는 너무도 낯선 존재가 되어 있다. 더러 괴물 같은 때도 있다. 납득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완벽한 타자가 되었을 때 말이다. 내 몸 속의 내가 누군지 모른다는 사실은 끔찍하다.
사실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잘 모른다. 나를 내가 안다고 하지만 나는 내가 아는 것 속에 있지 않다. 나란 주체는 결국 타자와의 어떤 관계 속에서만 자리한다. 타자 없는 나는 없다. 동시에 내 얼굴은 나의 것이지만 그것은 무수한 타자의 눈에서 자리한다. 내 얼굴의 실질적인 주인은 타자들이다.
그래서 나는 나하고 무관하게 타자에게 보여 지고 뜯어 먹히고 자의적으로 해석되고 간편하게 처리되며 오해 속에 가늠된다. 그러니까 주체란 재현된 일루전이 지시해주는 것이 아니라, 무분별하고 이질적인 조각들을 대면하는 관객(나)의 의식 속에서 재구성되는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얼굴을 그리려고 하다가 끝내 못 그린 것인가? 선명한 얼굴을 그리려다가 해체되고 망실된 얼굴만이 남았다. 얼굴을 그리려고 했다가 그리지 못하고 결국 그림 그리는 과정만이 선연하게 남아 떠돈다. 붓질만이, 다소 격한 신체의 움직임만이, 자신의 얼굴을 그리려했던 순간의 마음과 호흡만이 비처럼 흐르고 바람처럼 떠돈다. 이 그림은 진동하는 자화상이다.
작가는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나란 존재를 하염없이 물어본다. 그 얼굴에 나는 있고, 없다. 얼굴은 자신의 외면과 내면 모두를 보여주는 경계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얼굴, 표면을 통해 그 이면을 떠올려본다. 상상한다. 시각적 대상이 아닌 얼굴 속은 얼굴 표면을 통해서만 유추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얼굴은 다분히 사회 속에서 조율, 관리되는 기호다. 들뢰즈는 얼굴과 머리/대가리를 구분한다. 그에 의하면 얼굴은 사회적 기호이고 머리는 생물학적인 자리다. 그래서 들뢰즈는 오로지 머리만이 진정한 주체(자신)에 속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얼굴이 사회와 부단히 연동된 것이라면 머리는 이와는 다른 차원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작가는 자신의 얼굴이 아닌 머리, 대가리를 그리려는 듯하다. “머리는 표상이 부재하는 기표인 탓에 타자에게 낯설고 심지어는 자신에게조차 낯설다”는 것이다.
이처럼 머리는 한 개인의 무의식적인 욕망, 어둡고 눅눅한 침묵, 도저히 알 수 없는 사연과 내력, 상처와 아픔, 어떤 트라우마와 연관된다. 알다시피 트라우마란 그 이유를 알 수도, 치유할 수 도 없는 일종의 존재론적 상처를 지칭한다. 자화상을 그린다는 것은 이처럼 트라우마를 지닌 얼굴, 머리와 대면하는 일이다. 인간이기에 숙명적으로 거느리고 있는 자의식으로 끈적거리는 얼굴이다. 그 얼굴, 머리는 과연 재현될 수 있는가?
이 자화상은 클로즈업된 얼굴이다. 그것은 하나의 통일된 전체를 파괴하여 통일성이 없는 파편적인 부분들로 만들어버렸다. 통일된 유기체로서의 신체라는 조화로운 형상으로부터, 표준적 비례 속에 귀속될 수 없는 하나의 특수한 ‘파편’을 떼어내어 드러낸 것이다. 그것은 이질적이고 부수어진 세계다. 여기서 인격적 표징인 얼굴은 파편이 되었다.
조작조각 갈라지고 해체되어버리는 듯하다. 온전하고 통일성이 있고 조화로운 얼굴에서 벗어나 있다. 지시적이며 명확한 형태 속에 자리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이 자화상은 누군가의 얼굴이라기보다는 모호하고 낯선 사물로 다가온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사유하도록 강요하는 사물, 이른바 우연히 맞닥뜨리는 기호에 해당한다. 기호란 관조의 대상이 아니라 사유가 시작되도록 정신을 자극하는 대상이다. 그래서 기호를 ‘우연히’ 나타나 자기 안에 들어 있는 바를 해석하기를 ‘강요’하는 대상이라고 말한다.
박진홍의 자화상은 보는 이들에게 그 얼굴의 이면을 들여다보도록 한다. 누군가의 얼굴 속에 깃든 상처를 암시한다. 그곳을 보게 한다. 그것을 표현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일까. 작가는 그리고 지우는 과정을 반복한다. 그것은 긍정과 부정의 반복이기도 하다. 나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나는 내 얼굴이 주인이기도 하고 그 얼굴이 너무 낯설기도 하다. 그것은 그릴 수 있는 대상이면서도 도저히 그릴 수 없는 내막이다.
따라서 이 자화상은 모호하게 얼굴을 지시하고 알려주는 동시에 그것을 의도적으로 뭉갠다. 은폐한다. 긍정과 부정, 표현과 표현불가능 그 사이에서 격렬하게 떨어대는 알 수 없는 얼굴, 머리, 그것이 바로 작가의 자화상이다. 우리 모두의 얼굴이다. 대가리다.
필자 소개
성균관대대학원미술사전공, 전 금호미술관큐레이터, 현재 경기대학교예술대학 교수, 미술평론가.
저서로는 <예술가로 산다는 것>, <식물성의 사유>, <미술전시장 가는 날>, <나는 붓을 던져도 그림이 된다>, <가족을 그리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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