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태준의 '뚱땡이의 인생철학'
[박영택 교수의 '화가의 얼굴에서 내 얼굴을 보다']
흡사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라는 그림, 그러니까 프리드리히 자신의 내면의 자화상을 패러디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의미는 사뭇 다르다.
바닷가 모래밭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온 몸으로, 온 배로 맞이하며 자칫 비장하고 심각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이는 현태준 자신이다. 그런데 그 모습이 좀 우스꽝스럽다. 작고 뚱뚱한 몸매, 더구나 엄청나게 튀어나온 배, 커다란 머리, 잠수부들이 쓰는 안경을 닮은 두툼한 안경테, 망토 차림 등은 평소 그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이에게는 친숙한 모습이다. 그림 속의 작가는 면도를 한 비교적 깔끔한 얼굴이다. 평상시는 수염이 덥수룩한 편이다.
현태준은 장난감수집가이자 만화가로 알려져 있다. 나 역시도 그의 팬이다. 그가 쓰고 그린 책들을 모조리 읽었고 전시회도 갔으며 오래 전엔 그의 작업실에서 만나보기도 했다.컴퓨터를 활용해 그린 이 그림은 만화이자 일러스트레이션이다.
그는 일상적인 언어로, 자신의 생활 속에서 보고 느낀 것, 아는 것을 중심으로 솔직하게 그리고 쓴다. 그에게 만화는 적극적인 표현수단 중의 하나다. 그는 자신의 성향에 충실하고 솔직하고자 한다. 격식이나 체면, 관습, 도덕, 내숭을 혐오한다. 그는 자신의 수준을 숨김없이 보여주며 자신을 비하하고 못돼먹게 그림으로써 타인에게, 관자에게 턱없는 우월감 같은 것도 기꺼이 선사해준다. 그는 그냥 자신의 수준을 있는 그대로 가감 없이 보여준다. 그래서 그의 만화는 우리의 감추어진 내면을 즐겁게 들추어낸다. 그것을 보고 있노라면 억압된 내 안의 모든 것들이 개화되는 듯하다.
그는 먹는 것을 좋아하고 사람들과 어울려 술자리를 갖는 것도 좋고 혼자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노는 것을 제일 좋아한다고 한다. 스스로를 “예쁜 아가씨들이 지나가면 엉큼한 눈길을 주기도 하고, 돈 몇 푼 가지고 쩔쩔매고, 가족들 눈치에 찔끔거리며, 아무 데서나 담배를 팍팍 피며 술 먹고 해롱거리는 흔해빠진 아저씨”라고 표현한다. 제육볶음과 탕수육을 좋아하고 언제나 땀과 찌개국물이 배어 있거나 묻어 있는, 보편적인 뚱뚱한 아저씨의 모습, 바로 자신의 모습이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당당하게 증명한다.
그런데 그 같은 아저씨의 도상은 사실 젊은 세대들에게는 혐오의 대상이다. 촌스럽고 냄새나고 엉큼하고 속물적이며 비열하고 무지하게 밝히고 탐욕스럽고 예의와 공중도덕, 타자에 대한 배려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그런 존재다. 보수적이고 광신적이며 극우적인 데다 이기주의와 편협한 가족주의, 혈연주의로 똘똘 뭉쳐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 바로 옆에 그와 함께 사는 아줌마가 있다. 둘이 막상막하다. 물론 대한민국의 모든 아저씨, 아줌마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생각해보면 그 아저씨, 아줌마는 바로 나의 부모와 조부모이기도 하고 이모이자 고모부, 고모에 다름 아니다. 또한 이 아저씨들은 대부분 우리 사회에서 성공하거나 존경받거나 주목받는 이들은 아니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대한민국’에서 경쟁구조와 성공에서 뒤떨어진 그런 흔한 남자들이 아저씨와 동일시되기도 하는데 그런 면에서 이들은 ‘남자와 싸나이의 담론에서 배제된 타자’이기도 하다. ‘루저’들이다.
그는 자신의 모습을 그렇게 낙오된, 속물적인 아저씨란 존재와 동일시하고 있다. 그 같은 자기 비하와 비꼼을 통해 사실은 현대 일반 남성의, 아니 일반 성인의 삶과 욕망을 비꼬고 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현태준은 그림 안에 자신의 삶의 철학, 일종의 좌우명을 써놓았다. 읽는 순간 웃음이 나온다. 그런데 맞는 말이다. 정리해보자면 낙관적으로 살면서 본능에 충실하고 절대 조급해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우리 사회가 써놓고 강제하는 교훈이나 금언들과는 다른 맥락에 있다. 사회구조가 만들어놓은 거대한 기호, 말씀들을 전복시킨다. 그러한 금언, 명언, 금기의 말씀들, 너무 뻔한 말씀들이 많은 나라는 사실 아마추어 사회다. 시내 한복판, 커다란 바위 가운데를 파서 ‘바르게 살자’라고 써놓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그 돌이 우리를 바르게 살게 해주나? 아니 바르게 산다는 것은 또 무엇일까? 보고 있으면 바위만큼 답답하고 우울하다. 저런 무지막지한 조형물, 구조물들은 전국 이곳저곳에 박혀있다.
현태준의 ‘인생철학’은 60, 70년대 이후 추구되었던 근대화, 자본주의화가 요구하던 일반적인 이데올로기, 그러니까 맹목적으로 매달렸던 경제대국과 고도성장 사회를 위해 요구되었던 근면. 성실, 검소 정신과 바른생활 및 ‘타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우리 사회의 강압적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있다. 현태준은 그것을 의도적으로 해체시킨다. 그 이데올로기로 인해 억압받았던 것들을 회생시키려한다. 오로지 미래를 위해 투사되었던 현재의 삶을 적극적으로 즐기라고 말한다. 나만을 위해서 살라고도 한다. 발전과 진보, 경쟁논리에 뒤처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면서 살아가도록 하는 이 체제에 저항한다. 시간의 덫, 미래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난 삶을 추구하도록 권유하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자본주의적 삶의 논리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아울러 사람들에게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아가라고, 허식이나 권위나 관습에서 해방되라고도 말한다. 그는 기성세대의 미학적 규범과 통상적인 윤리와 태로의 관습을 해체하고 변화시키는 지점으로 나가도록 권한다. 그는 진정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고 싶어 한다. 그는 주장한다. ‘남이 뭐라 해도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하자!’ 그것이 인생을 풍요롭게, 진정으로 자유롭게, 인간답게 사는 일일 것이다. 이 뚱땡이 아저씨는 자신만의 좌우명을 가슴 깊이 새기며 저 솟아오르는 오늘의 태양을 맞이하고 있다.
필자 소개
성균관대대학원미술사전공, 전 금호미술관큐레이터, 현재 경기대학교예술대학 교수, 미술평론가.
저서로는 <예술가로 산다는 것>, <식물성의 사유>, <미술전시장 가는 날>, <나는 붓을 던져도 그림이 된다>, <가족을 그리다> 등이 있다.
바닷가 모래밭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온 몸으로, 온 배로 맞이하며 자칫 비장하고 심각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이는 현태준 자신이다. 그런데 그 모습이 좀 우스꽝스럽다. 작고 뚱뚱한 몸매, 더구나 엄청나게 튀어나온 배, 커다란 머리, 잠수부들이 쓰는 안경을 닮은 두툼한 안경테, 망토 차림 등은 평소 그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이에게는 친숙한 모습이다. 그림 속의 작가는 면도를 한 비교적 깔끔한 얼굴이다. 평상시는 수염이 덥수룩한 편이다.
현태준은 장난감수집가이자 만화가로 알려져 있다. 나 역시도 그의 팬이다. 그가 쓰고 그린 책들을 모조리 읽었고 전시회도 갔으며 오래 전엔 그의 작업실에서 만나보기도 했다.컴퓨터를 활용해 그린 이 그림은 만화이자 일러스트레이션이다.
그는 일상적인 언어로, 자신의 생활 속에서 보고 느낀 것, 아는 것을 중심으로 솔직하게 그리고 쓴다. 그에게 만화는 적극적인 표현수단 중의 하나다. 그는 자신의 성향에 충실하고 솔직하고자 한다. 격식이나 체면, 관습, 도덕, 내숭을 혐오한다. 그는 자신의 수준을 숨김없이 보여주며 자신을 비하하고 못돼먹게 그림으로써 타인에게, 관자에게 턱없는 우월감 같은 것도 기꺼이 선사해준다. 그는 그냥 자신의 수준을 있는 그대로 가감 없이 보여준다. 그래서 그의 만화는 우리의 감추어진 내면을 즐겁게 들추어낸다. 그것을 보고 있노라면 억압된 내 안의 모든 것들이 개화되는 듯하다.
그는 먹는 것을 좋아하고 사람들과 어울려 술자리를 갖는 것도 좋고 혼자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노는 것을 제일 좋아한다고 한다. 스스로를 “예쁜 아가씨들이 지나가면 엉큼한 눈길을 주기도 하고, 돈 몇 푼 가지고 쩔쩔매고, 가족들 눈치에 찔끔거리며, 아무 데서나 담배를 팍팍 피며 술 먹고 해롱거리는 흔해빠진 아저씨”라고 표현한다. 제육볶음과 탕수육을 좋아하고 언제나 땀과 찌개국물이 배어 있거나 묻어 있는, 보편적인 뚱뚱한 아저씨의 모습, 바로 자신의 모습이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당당하게 증명한다.
그런데 그 같은 아저씨의 도상은 사실 젊은 세대들에게는 혐오의 대상이다. 촌스럽고 냄새나고 엉큼하고 속물적이며 비열하고 무지하게 밝히고 탐욕스럽고 예의와 공중도덕, 타자에 대한 배려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그런 존재다. 보수적이고 광신적이며 극우적인 데다 이기주의와 편협한 가족주의, 혈연주의로 똘똘 뭉쳐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 바로 옆에 그와 함께 사는 아줌마가 있다. 둘이 막상막하다. 물론 대한민국의 모든 아저씨, 아줌마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생각해보면 그 아저씨, 아줌마는 바로 나의 부모와 조부모이기도 하고 이모이자 고모부, 고모에 다름 아니다. 또한 이 아저씨들은 대부분 우리 사회에서 성공하거나 존경받거나 주목받는 이들은 아니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대한민국’에서 경쟁구조와 성공에서 뒤떨어진 그런 흔한 남자들이 아저씨와 동일시되기도 하는데 그런 면에서 이들은 ‘남자와 싸나이의 담론에서 배제된 타자’이기도 하다. ‘루저’들이다.
그는 자신의 모습을 그렇게 낙오된, 속물적인 아저씨란 존재와 동일시하고 있다. 그 같은 자기 비하와 비꼼을 통해 사실은 현대 일반 남성의, 아니 일반 성인의 삶과 욕망을 비꼬고 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현태준은 그림 안에 자신의 삶의 철학, 일종의 좌우명을 써놓았다. 읽는 순간 웃음이 나온다. 그런데 맞는 말이다. 정리해보자면 낙관적으로 살면서 본능에 충실하고 절대 조급해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우리 사회가 써놓고 강제하는 교훈이나 금언들과는 다른 맥락에 있다. 사회구조가 만들어놓은 거대한 기호, 말씀들을 전복시킨다. 그러한 금언, 명언, 금기의 말씀들, 너무 뻔한 말씀들이 많은 나라는 사실 아마추어 사회다. 시내 한복판, 커다란 바위 가운데를 파서 ‘바르게 살자’라고 써놓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그 돌이 우리를 바르게 살게 해주나? 아니 바르게 산다는 것은 또 무엇일까? 보고 있으면 바위만큼 답답하고 우울하다. 저런 무지막지한 조형물, 구조물들은 전국 이곳저곳에 박혀있다.
현태준의 ‘인생철학’은 60, 70년대 이후 추구되었던 근대화, 자본주의화가 요구하던 일반적인 이데올로기, 그러니까 맹목적으로 매달렸던 경제대국과 고도성장 사회를 위해 요구되었던 근면. 성실, 검소 정신과 바른생활 및 ‘타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우리 사회의 강압적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있다. 현태준은 그것을 의도적으로 해체시킨다. 그 이데올로기로 인해 억압받았던 것들을 회생시키려한다. 오로지 미래를 위해 투사되었던 현재의 삶을 적극적으로 즐기라고 말한다. 나만을 위해서 살라고도 한다. 발전과 진보, 경쟁논리에 뒤처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면서 살아가도록 하는 이 체제에 저항한다. 시간의 덫, 미래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난 삶을 추구하도록 권유하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자본주의적 삶의 논리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아울러 사람들에게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아가라고, 허식이나 권위나 관습에서 해방되라고도 말한다. 그는 기성세대의 미학적 규범과 통상적인 윤리와 태로의 관습을 해체하고 변화시키는 지점으로 나가도록 권한다. 그는 진정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고 싶어 한다. 그는 주장한다. ‘남이 뭐라 해도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하자!’ 그것이 인생을 풍요롭게, 진정으로 자유롭게, 인간답게 사는 일일 것이다. 이 뚱땡이 아저씨는 자신만의 좌우명을 가슴 깊이 새기며 저 솟아오르는 오늘의 태양을 맞이하고 있다.
필자 소개
성균관대대학원미술사전공, 전 금호미술관큐레이터, 현재 경기대학교예술대학 교수, 미술평론가.
저서로는 <예술가로 산다는 것>, <식물성의 사유>, <미술전시장 가는 날>, <나는 붓을 던져도 그림이 된다>, <가족을 그리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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