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원조 로펌 '김 · 장 · 리'
[김진원의 로펌 이야기] <8> 정일형-이태영 부부 큰 역할
이쯤해서 국내 로펌업계에 대한 개괄적인 소개를 한번 하고 가야 할 것 같다. 시리즈가 계속되면서 독자들도 많은 요청을 해 왔다.
약 반세기전으로 이야기가 거슬러 올라간다. 국내 로펌 1호는 서울 종로구 원서동에 자리잡고 있는 '김 · 장 · 리 법률사무소'다.
1958년 후반이다. 국제변호사 1호인 김흥한 변호사가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이태영 변호사와 함께 서울 광화문에 '이&김'이란 이름으로 영어식 간판을 내걸었는데, 이것이 국내 최초의 로펌인 '김 · 장 · 리'의 출발이다.
여성변호사 1호인 이태영 변호사는 나중에 김 변호사의 장모가 되기도 했지만, 김 변호사의 국제변호사 사무실 설립에도 관여한 것이다. 여기에다 김 변호사의 미국 유학을 알선한 사람도 이 변호사의 부군(夫君)인 정일형 박사이고 보면, 국내 로펌업계의 태동에 정일형 · 이태영 두 원로의 역할이 알게 모르게 스며 있는 셈이다.
김흥한 변호사는 대법관과 검찰총장을 지낸 김익진씨의 아들로, 서울대 법대 학장을 역임한 김증한 교수가 형이다. 49년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제3회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해 51년부터 서울지법 판사로 있었다. 그러면서 당시 국회의원이던 정일형 박사의 비서 격으로 심부름을 적지않이 해 왔는데, 정 박사가 장학금을 주선해 주며 미국 유학을 권해 미국행 화물선에 몸을 싣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가 53년 7월로, 6.25가 끝나기 얼마 전이다.
김 변호사는 "정 박사가 '너는 머리도 좋고 판사 자격도 가지고 있으니 미국에 가서 공부하면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미국의 한 문화재단을 연결해 주었다"고 미국 유학을 가게 된 사연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워싱턴에 있는 아메리카 대학의 학부과정 서머 스쿨(Summer School)을 거쳐 조지워싱턴대 로스쿨에서 비교법학석사(M.C.L.)와 법학석사(LL.M.)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 취득에 필요한 학점까지 이수했으나, 학위 취득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신청 자체가 봉쇄됐다. 미국변호사 시험을 보아 미국변호사가 되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고 한다.
동양인으로서의 한계를 느낀 그는 미국땅을 밟은 지 4년 10개월만인 58년 5월 귀국했다. 이어 서너달이 지나 '이&김'의 간판을 올리게 된 것이다.
이후 '이&김'은 5.16직후 판사 출신의 장대영 변호사가 합류하면서, 고시 합격 순서대로 성을 따 '김 · 장 · 리'로 이름을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창립 멤버라고 할 수 있는 세사람 모두 지금은 고인이 됐다.
5.16때의 일화 하나.
김 변호사는 민주당 정권 시절 장면 총리의 비서실장으로 있었다. 5.16이 일어나 '잡혀 가겠구나' 하고 집에 있는데, 아무도 붙잡으러 오지 않아 '괜찮은가 보다' 하고 변호사일을 다시 시작했다고 김 변호사가 생전에 술회한 적이 있다.
오히려 5.16은 김 변호사가 국제변호사로 이름을 날리는 발전적인 계기가 됐다. 군사정부가 경제개방 정책을 취하면서 외국인들의 국내 투자가 쏟아져 들어오게 되자 유창한 영어실력에 미국법과 국제법에 능통한 김 변호사 사무실이 고기가 물을 만난듯 바빠지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 사람들은 사업할 때 먼저 변호사부터 찾습니다. 영어가 되는 사람, 미국법 · 미국제도를 아는 변호사를 구하는데 국내에선 제 이름밖에 나오지 않으니 제 사무실로 사건이 쏟아질 수 밖에요."
기자가 김 변호사를 만났을 때 그는 "5.16 이후 엄청난 호황을 누렸다"며 "시간은 한정돼 있는데 상담하겠다고 기다리는 사람은 많아 그야말로 화장실 갈 시간, 밥 먹을 시간도 없이 바쁘게 일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에 따르면 상담을 해주고도 시간으로 환산해 수임료를 청구할 시간이 없어 차일피일 미루다가 끝내 돈을 받지 못한 경우도 허다했다고 한다.
걸프오일사를 시작으로 수많은 다국적기업, 은행들이 김 변호사의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코카콜라, 웨스팅하우스, IBM, 체이스맨해턴은행 등 '포춘(Fortune) 500'에 드는 상당수의 기업을 고객으로 확보하고 있었다는 게 '김 · 장 · 리' 관계자의 전언이다.
이런 '김 · 장 · 리'인 만큼 국내 로펌업계의 발전에서 차지하는 비중 또한 간단치 않았다.
무엇보다도 많은 후배 변호사들이 '김 · 장 · 리'를 거쳐 국제변호사로 성장했다. 말 그대로 국내 최초의 로펌으로서의 역할을 해 온 것이다. 주요 로펌의 대표와 파트너 변호사중엔 한때 '김 · 장 · 리'에 몸담았던 변호사가 적지 않다.
법원과 검찰의 고위직을 지낸 재조 출신 중에도 '김 · 장 · 리'와 인연을 맺은 사람이 적지 않다. 윤영철 헌법재판소장도 대법관을 마친 후 헌재 소장이 되기 전 얼마동안 '김 · 장 · 리' 에서 고문으로 활동한 적이 있다.
그러나 '김 · 장 · 리'의 성장사가 꼭 평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국내 로펌업계에서 상당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90년대 들어 더 이상 메이저로 도약하지 못하고 중소 로펌의 규모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현재 김흥한 변호사의 동서인 김의재 변호사, 김흥한 변호사의 사위인 최경준 변호사, 홍일표 전 사법연수원장 등을 주축으로 20여명의 변호사가 포진하고 있다.
93년 5월엔 경영담당 파트너변호사를 맡았던 황주명 변호사 등 16명의 변호사가 함께 '김 · 장 · 리'를 나와 충정합동법률사무소로 독립하는 일도 있었다. 충정 합동은 이후 법무법인 충정으로 조직을 일신하며 중견 로펌으로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국내외 변호사만 약 60명이다.
후발주자들이 지속적으로 규모를 키워가고 있는 반면 '김 · 장 · 리'는 창업주가 닦아 놓은 바탕에서 좀 더 크게 발전하지 못한 채 오히려 업계내에서의 위상이 축소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이런 가운데 '김 · 장 · 리'가 지난해 3월 법무법인 바른법률과의 합병을 선언, 또한번 업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당시 양측이 밝힌 내용에 따르면 두 법률회사가 합쳐 법무법인 바른으로 통합하되, 외국 클라이언트를 겨냥한 영문 이름만 'KIM, CHANG & LEE'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비록 국내에서 '김 · 장 · 리'의 이름은 없어지지만, 발전을 위한 또하나의 전기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바른법률은 대법관과 검사장 등을 지낸 재조 출신의 쟁쟁한 변호사들이 포진한 송무가 발달한 로펌이다. 따라서 뛰어난 자문능력과 함께 외국 클라이언트를 많이 보유하고 있는 '김 · 장 · 리'와의 합병이 적지않은 시너지를 가져다 줄 것이란 게 많은 사람들의 분석이기도 하다.
합병 작업이 진행돼 지난해 말엔 통합법인인 법무법인 바른이 출범했다. 강북에 사무소가 있는 '김 · 장 · 리'는 간판을 내리는 대신 법무법인 바른의 강북사무소로 법적 위상을 새롭게 했다. 바른의 본사무소는 서울 삼성동에 새로 건물을 임대해 입주했으며, 최종영 전 대법원장과 박재윤 전 대법관을 영입하는 등 중량급 변호사들을 꾸준히 영입하고 있다.
그러나 두 법률사무소가 사건 수임과 회계를 따로 운영하는 등 완전한 형태의 합병에는 아직 이르지 못하고 있어 시너지의 창출에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브랜드 통합 정도까지만 진행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인적 요소가 강한 로펌들 사이의 합병은 이처럼 단계별로 추진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무튼 '김 · 장 · 리'는 58년 국내 로펌업계에 닻을 내린 지 47년만에 법무법인 바른으로 일단 말을 갈아 탄 입장이다. '김 · 장 · 리'의 변신을 많은 사람들이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다.
약 반세기전으로 이야기가 거슬러 올라간다. 국내 로펌 1호는 서울 종로구 원서동에 자리잡고 있는 '김 · 장 · 리 법률사무소'다.
1958년 후반이다. 국제변호사 1호인 김흥한 변호사가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이태영 변호사와 함께 서울 광화문에 '이&김'이란 이름으로 영어식 간판을 내걸었는데, 이것이 국내 최초의 로펌인 '김 · 장 · 리'의 출발이다.
여성변호사 1호인 이태영 변호사는 나중에 김 변호사의 장모가 되기도 했지만, 김 변호사의 국제변호사 사무실 설립에도 관여한 것이다. 여기에다 김 변호사의 미국 유학을 알선한 사람도 이 변호사의 부군(夫君)인 정일형 박사이고 보면, 국내 로펌업계의 태동에 정일형 · 이태영 두 원로의 역할이 알게 모르게 스며 있는 셈이다.
김흥한 변호사는 대법관과 검찰총장을 지낸 김익진씨의 아들로, 서울대 법대 학장을 역임한 김증한 교수가 형이다. 49년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제3회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해 51년부터 서울지법 판사로 있었다. 그러면서 당시 국회의원이던 정일형 박사의 비서 격으로 심부름을 적지않이 해 왔는데, 정 박사가 장학금을 주선해 주며 미국 유학을 권해 미국행 화물선에 몸을 싣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가 53년 7월로, 6.25가 끝나기 얼마 전이다.
김 변호사는 "정 박사가 '너는 머리도 좋고 판사 자격도 가지고 있으니 미국에 가서 공부하면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미국의 한 문화재단을 연결해 주었다"고 미국 유학을 가게 된 사연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워싱턴에 있는 아메리카 대학의 학부과정 서머 스쿨(Summer School)을 거쳐 조지워싱턴대 로스쿨에서 비교법학석사(M.C.L.)와 법학석사(LL.M.)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 취득에 필요한 학점까지 이수했으나, 학위 취득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신청 자체가 봉쇄됐다. 미국변호사 시험을 보아 미국변호사가 되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고 한다.
동양인으로서의 한계를 느낀 그는 미국땅을 밟은 지 4년 10개월만인 58년 5월 귀국했다. 이어 서너달이 지나 '이&김'의 간판을 올리게 된 것이다.
이후 '이&김'은 5.16직후 판사 출신의 장대영 변호사가 합류하면서, 고시 합격 순서대로 성을 따 '김 · 장 · 리'로 이름을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창립 멤버라고 할 수 있는 세사람 모두 지금은 고인이 됐다.
5.16때의 일화 하나.
김 변호사는 민주당 정권 시절 장면 총리의 비서실장으로 있었다. 5.16이 일어나 '잡혀 가겠구나' 하고 집에 있는데, 아무도 붙잡으러 오지 않아 '괜찮은가 보다' 하고 변호사일을 다시 시작했다고 김 변호사가 생전에 술회한 적이 있다.
오히려 5.16은 김 변호사가 국제변호사로 이름을 날리는 발전적인 계기가 됐다. 군사정부가 경제개방 정책을 취하면서 외국인들의 국내 투자가 쏟아져 들어오게 되자 유창한 영어실력에 미국법과 국제법에 능통한 김 변호사 사무실이 고기가 물을 만난듯 바빠지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 사람들은 사업할 때 먼저 변호사부터 찾습니다. 영어가 되는 사람, 미국법 · 미국제도를 아는 변호사를 구하는데 국내에선 제 이름밖에 나오지 않으니 제 사무실로 사건이 쏟아질 수 밖에요."
기자가 김 변호사를 만났을 때 그는 "5.16 이후 엄청난 호황을 누렸다"며 "시간은 한정돼 있는데 상담하겠다고 기다리는 사람은 많아 그야말로 화장실 갈 시간, 밥 먹을 시간도 없이 바쁘게 일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에 따르면 상담을 해주고도 시간으로 환산해 수임료를 청구할 시간이 없어 차일피일 미루다가 끝내 돈을 받지 못한 경우도 허다했다고 한다.
걸프오일사를 시작으로 수많은 다국적기업, 은행들이 김 변호사의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코카콜라, 웨스팅하우스, IBM, 체이스맨해턴은행 등 '포춘(Fortune) 500'에 드는 상당수의 기업을 고객으로 확보하고 있었다는 게 '김 · 장 · 리' 관계자의 전언이다.
이런 '김 · 장 · 리'인 만큼 국내 로펌업계의 발전에서 차지하는 비중 또한 간단치 않았다.
무엇보다도 많은 후배 변호사들이 '김 · 장 · 리'를 거쳐 국제변호사로 성장했다. 말 그대로 국내 최초의 로펌으로서의 역할을 해 온 것이다. 주요 로펌의 대표와 파트너 변호사중엔 한때 '김 · 장 · 리'에 몸담았던 변호사가 적지 않다.
법원과 검찰의 고위직을 지낸 재조 출신 중에도 '김 · 장 · 리'와 인연을 맺은 사람이 적지 않다. 윤영철 헌법재판소장도 대법관을 마친 후 헌재 소장이 되기 전 얼마동안 '김 · 장 · 리' 에서 고문으로 활동한 적이 있다.
그러나 '김 · 장 · 리'의 성장사가 꼭 평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국내 로펌업계에서 상당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90년대 들어 더 이상 메이저로 도약하지 못하고 중소 로펌의 규모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현재 김흥한 변호사의 동서인 김의재 변호사, 김흥한 변호사의 사위인 최경준 변호사, 홍일표 전 사법연수원장 등을 주축으로 20여명의 변호사가 포진하고 있다.
93년 5월엔 경영담당 파트너변호사를 맡았던 황주명 변호사 등 16명의 변호사가 함께 '김 · 장 · 리'를 나와 충정합동법률사무소로 독립하는 일도 있었다. 충정 합동은 이후 법무법인 충정으로 조직을 일신하며 중견 로펌으로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국내외 변호사만 약 60명이다.
후발주자들이 지속적으로 규모를 키워가고 있는 반면 '김 · 장 · 리'는 창업주가 닦아 놓은 바탕에서 좀 더 크게 발전하지 못한 채 오히려 업계내에서의 위상이 축소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이런 가운데 '김 · 장 · 리'가 지난해 3월 법무법인 바른법률과의 합병을 선언, 또한번 업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당시 양측이 밝힌 내용에 따르면 두 법률회사가 합쳐 법무법인 바른으로 통합하되, 외국 클라이언트를 겨냥한 영문 이름만 'KIM, CHANG & LEE'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비록 국내에서 '김 · 장 · 리'의 이름은 없어지지만, 발전을 위한 또하나의 전기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바른법률은 대법관과 검사장 등을 지낸 재조 출신의 쟁쟁한 변호사들이 포진한 송무가 발달한 로펌이다. 따라서 뛰어난 자문능력과 함께 외국 클라이언트를 많이 보유하고 있는 '김 · 장 · 리'와의 합병이 적지않은 시너지를 가져다 줄 것이란 게 많은 사람들의 분석이기도 하다.
합병 작업이 진행돼 지난해 말엔 통합법인인 법무법인 바른이 출범했다. 강북에 사무소가 있는 '김 · 장 · 리'는 간판을 내리는 대신 법무법인 바른의 강북사무소로 법적 위상을 새롭게 했다. 바른의 본사무소는 서울 삼성동에 새로 건물을 임대해 입주했으며, 최종영 전 대법원장과 박재윤 전 대법관을 영입하는 등 중량급 변호사들을 꾸준히 영입하고 있다.
그러나 두 법률사무소가 사건 수임과 회계를 따로 운영하는 등 완전한 형태의 합병에는 아직 이르지 못하고 있어 시너지의 창출에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브랜드 통합 정도까지만 진행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인적 요소가 강한 로펌들 사이의 합병은 이처럼 단계별로 추진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무튼 '김 · 장 · 리'는 58년 국내 로펌업계에 닻을 내린 지 47년만에 법무법인 바른으로 일단 말을 갈아 탄 입장이다. '김 · 장 · 리'의 변신을 많은 사람들이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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