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리 정운찬', 그를 기다리는 '혹독한 질문들'
<뷰스칼럼> '포지티브 이미지'냐 '네거티브 이미지'냐
아주 오래전인 1990년, 노태우 정권하 강영훈 총리 시절 이야기다.
당시 청와대에서는 '경제 전권'을 쥔 김종인 경제수석이 부동산투기를 잡기 위해 재벌의 비업무용 토지 매각 지시 등 강도 높은 드라이브를 걸기 시작한 때였다. 김종인 경제수석은 강영훈 총리에게 재벌 총수들에게 정부 방침에 협조해줄 것을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얼마 뒤 강 총리로부터 김 수석에게 연락이 왔다. "기업 총수들이 총리를 핫바지로 아는 것 같아. 보자고 하는데도 연락도 안 와. 허허"
김 수석은 "알았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라고 전화를 끊은 뒤, 곧바로 5대 재벌 기조실장을 청와대로 소집해 호통을 쳤다. "비업무용 토지 매각은 대통령 특명이다. 항명하겠다는 거냐." 화들짝 놀란 재계는 그제서야 서둘러 눈물을 머금고 토지 매각에 나섰다.
총리가 서열상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나 대통령의 힘이 실리고 안실리고에 따라, 실제 파워는 크게 다를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특히 한국 같은 절대권력의 대통령제 하에선 그러하다.
반면에 실제로 총리가 맹위를 떨쳤던 시절도 있다. 노무현 대통령 당시 이해찬 총리가 그런 대표적 예다. 이 총리는 노 대통령의 분신과 다름없었다. 국회에서도 거침없이 야당 의원들과 설전을 벌였고 밀어붙일 건 밀어붙였다.
노 대통령은 이 총리에게 거의 전권을 부여한 뒤 "총리가 모든 일을 처리하니 내가 할 일이 없네"라며 대만족감을 표시했다.
'정운찬 총리'는 과연 두 명의 총리 유형 중 어떤 총리가 될 것인가. 이 대통령은 '정운찬 총리'를 어떤 총리로 만들 건가.
JP의 두 모습, '그림자'와 '야수'
역시 1990년대 초 풍광이다.
3당합당으로 만들어진 민자당의 김종필 공동대표(JP)는 더없이 노태우 대통령에게 깍듯했다.
"대통령은 만인지상이다. 밑에 사람들은 대통령의 그림자도 밟아선 안된다. 나는 노 대통령을 뵐 때마다 그림자를 밟지 않기 위해 서너 발짝 뒤에서 걷는다."
하지만 YS가 내각제 개헌을 하기로 한 '3당합당 밀약서'를 공개하며 밀약을 무력화시키려 들고 치열한 전쟁 끝에 결국 노 대통령이 백기 항복을 하자, JP는 싹 바뀌었다.
"물태우"라는 경멸적 표현을 비롯해, 차마 활자로 옮길 수 없는 그 이상의 '원색적 표현'까지 총동원하며 무기력한 노 대통령을 맹비난했다. '야수'가 연상될 정도로 적개감과 전투력이 넘실댔다.
'현실권력'과, '미래권력'을 꿈꾸는 정치세력간 관계는 이처럼 한순간에 돌변할 수 있는 것임을 JP는 생생히 온 몸으로 보여줬다.
진성호 "정운찬과 강만수, 치열히 토론해야"
"경제이론가인 정운찬 총리와 실제 행정 현장에서 오래 일하셨던 강만수 특보라든지 이런 분들하고 내부적으로 치열한 토론을 했으면 좋겠다."
친이계인 진성호 한나라당 의원이 4일 언론과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여권 내에서 정운찬 내정자를 어떻게 자리 매김하고 있는가를 엿볼 수 있는 발언이다. '총리'와 '특보'를 거의 동급처럼 취급한다. 왜 그럴까.
이 대통령과 강 특보는 십수년 야인 세월을 함께 보낸 절친한 지인 사이이자 종교동지다. 반면에 정 내정자는 지난 2년간 만난 적이 없다가 총리 발표 직전인 지난 3일 오전에야 잠시 만났다. 그러기에 여권에선 강 특보를 정 내정자 못지않은 '실세'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이 대통령마저 정 내정자를 '이 정도' 위치로 생각한다면, 양자 만남의 시너지 효과는 멀지 않아 소멸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정운찬 총리', 멀고도 험한 길
정운찬 내정자 모친은 생전에 아들이 "한 나라의 재상"이 되기를 바랬다. 정 내정자는 이제 그 꿈을 이뤘다.
하지만 "서민" "경제" "통합" 등 그가 총리 입각의 이유로 밝힌 명분을 실현하기 위해선 넘어야 할 장애가 한둘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인사청문회에서 그를 단단히 벼르고 있는 야당의원들은 이런 질문들을 던질 것이다.
"용산참사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용산에 직접 가 유족들을 만날 생각이 있나."
"아파트값, 전세값 폭등을 어떻게 막을 건가. 그린벨트에 수십만 아파트를 짓는다고 막을 수 있겠나."
"4대강 사업 때문에 민생예산, 지역SOC예산이 대폭 깎이고 있는데, 4대강 사업을 원안대로 계속 밀어붙여야 한다고 보나."
"2차 부자감세를 중단해야 한다고 보나, 계속해야 한다고 보나."
"미디어법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엄기영 MBC사장을 잘라야 한다고 보나. <PD수첩>을 없애야 한다고 보나."
정 내정자가 학자 시절에는 막힘없이 답할 수 있는 질문들이다. 그러나 '총리 정운찬'이 답하기엔 한결같이 쉽지 않은 질문들일 거다. 이 대통령을 비롯해 정부여권과 야권도 그의 입을 예의주시할 것이다.
'포지티브 이미지'냐 '네거티브 이미지'냐
2007년 대선 출마를 적극 검토하던 정 내정자가 출마를 포기하게 된 이유는 '조직과 돈'이 가장 큰 것이었지만, 또 하나는 '인지도 부족'이었다.
충청권 출신인 그는 당시 그 지역에서 언론사를 하던 지인의 도움으로 '인지도 조사'를 한 바 있다. 그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자신의 출신지역에서조차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서울대 총장'이라면 모두가 알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일부 지식인과 중산층 정도에서만 그의 이름 석 자를 알 뿐이었다.
정 내정자의 인지도는 앞으로 급속히 높아질 것이다. 문제는 그 인지도가 '포지티브'가 될 거냐, '네거티브'가 될 거냐다. 물론 계층이나 이해관계자에 따라 포지티브가 될 수도, 네거티브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정 내정자가 출사표로 "서민"을 내건 만큼 서민이 앞으로 그를 어떻게 평가할지가 관건일 거다. 진정으로 서민 편에 서서 서민을 힘들게 하는 집값-전세값 폭등을 막기 위해 분투하고, 서민복지를 위해 4대강 예산을 줄이고 부자감세를 막고, 서민 일자리를 위해 지속가능한 성장을 이끌어 낸다면 '총리 정운찬'은 대성할 것이다.
아울러 가만 있어도 그는 '차기 대권주자'의 반열에 당당히 낄 것이다. 하지만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면, 그는 역대 무수했던 '여러 총리' 중 한 명으로 기록될 것이다. 선택의 몫은 그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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