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만든 '오픈프라이머리' 덫에 걸린 힐러리
[김동석의 뉴욕통신] 힐러리, 끝난 게임에도 오기로 버텨
미국의 젊은이들이 영문도 모른 체 이역만리 정글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국가의 이익도 아니고 인간의 자유를 수호하는 일도 아님을 점차 깨달아 갔다. 우선은 대학에서 학생들이 용기 있게 전쟁반대를 외쳤고 다음은 시민사회의 지식인 사회에서 들고 나왔다. 이어서 문화.예술인들이 특히 대중스타들이 반전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1960년대 말에 서서히 불붙기 시작한 월남전 반대운동은 순식간에 미국 전역으로 들불같이 번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치인들은 국제사회에서의 미국의 위치와 역할을 이유로 반전운동에 동의하지 않았다. 특히, 국민들이 기대했던 민주당도 이를 외면했다. 오랫동안 민주당에서 잔뼈가 굵은 당료들이 문제였다. 반전운동의 대열에 있는 수많은 젊은이들과 젊은 민주당원들이 의기투합했다. 모두가 민주당으로 들어가서 민주당에서 후보를 만들고 그런 후보를 미국의 대통령으로 만들어서 (월남)전쟁을 끝내겠다는 군중들의 전략이었다. 이제 막 월남전에서 살아 돌아온 "존 케리"(2004년 민주당 대통령후보)가 시민사회에서 반전운동을 이끌어 나갔고 그 유명한 존 레논의 반전가요 '이매진(Imagine)'이 이때에 뉴욕의 '브라이언트 파크'에서 발표되었다. 유명한 할리우드 스타인 제인 폰다가 전국을 다니면서 반전운동을 이끌었다. 그래도 닉슨 대통령은 들은 척도 안했다. 젊은이들 사이에 '당으로 들어가자'라는 공감대가 형성 되었다.
1972년 시카고 민주당 전당대회에는 유례없이 젊은층들이 대거 참가했다. 젊은 민주당원들이 내세운 대통령후보는 사우스 다코타의 상원의원인 "조지 맥거번"이었다. 그러나 당의 간부가 아니면 의사표시 한마디 할 수 없었던 것이 당시 민주당의 경선방식이었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당시에 맥거번의 선거운동을 총 지휘했다. 힐러리 클린턴도 '맥거번 대통령만들기'에 적극 참가했다. 이들이 추진한 제도가 "오픈 프라이머리" 제도였다. 당 간부들의 전횡과 횡포를 제도적으로 차단하는 방식이 바로 "오픈 프라이머리" 제도이다. 당시 20대 청년으로 이 운동에 가장 앞장섰던 사람이 바로 힐러리 클린턴이었다.
힐러리 후보는 슈퍼대의원 수로는 앞서지만 바로 이 오픈프라이머리에서 확보하는 대의원수에서 오바마 후보에게 크게 뒤지고 있다. 자신이 앞장서서 만든 제도로 인하여 최초의 여자대통령, 부부대통령의 신화를 포기해야만 할 순간에 왔다.
빌 클린턴의 오랜 친구이고 힐러리 클린턴 후보의 지지자로 알려진 '조지 맥거번'이 노스캐롤라이나, 인디애나의 경선결과를 보고 힐러리 후보에게 후보사퇴를 공개적으로 권고하고 나섰다. "힐러리 클린턴이 후보가 될 가능성은 이제 없어졌다"라고 하면서 직접 빌 클린턴에게 전화를 걸어서 사퇴를 종용했다. 동시에 힐러리 후보를 지지했던 슈퍼대의원 4명이 공개적으로 오바마 후보로 지지를 바꾸었다.
지난 6일 인디애나에서의 승리연설이 경선포기 선언이었으면 훨씬 영예로웠을 것이란 지적도 나왔다. 그래도 경선완주를 주장하는 힐러리를 겨냥해서 주류 미디어들이 "힐러리의 오기" 라고 비아냥투의 논평을 쏟아내고 있다. 8일자 <뉴욕타임스>는 한술 더 떠서 아예 힐러리 후보를 빼고서 존 맥케인과 오바마의 경쟁력을 비교하는 기사를 냈다. 슈퍼화요일 당시에 <뉴욕타임스>는 힐러리 후보를 지지했었다. NBC의 '언론과의 만남(Meet the Press)' 진행자인 팀 러서트는 "이제 우리는 민주당 후보를 결정하게 되었다"고 까지 했다. 공화당측의 존 맥케인 진영은 아예 힐러리에 관해선 언급을 하지 않고 있기도 하다. 오바마를 민주당 후보로 인정하고 있음이다.
필자는 힐러리 후보의 사퇴 선언을 예상했다. 금세기 가장 걸출한 여성정치인의 역사적인 영예로운 결단을 직접 목격하기 위해서 인디애나폴리스를 찾아갔다. 시내 한복판 대형극장안에 마련된 그녀의 연설장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무려 3시간을 기다렸다. 그녀는 아슬아슬한 2% 차이의 승리임에도 오히려 경선완주를 선언했다. 웨스트버지니아로, 또 오레곤과 캔터키를 겨냥한 의지를 나타냈다. 앞으로 쏟아질 사퇴압력을 그녀가 어떻게 견뎌낼지 궁금함보다는 불안감이 앞선다.
필자
김동석 미 뉴욕.뉴저지 한인유권자센터 소장 겸 본지 편집위원은 1985년 미국으로 건너간 뒤 한인들의 정치 참여를 통한 권리 찾기와 한인들의 정치적 위상 높이기를 목표로 93년 뉴욕 등 미 동부 대도시에 ‘한인유권자센터’를 만들어 15년째 활동해온 대표적인 정치 비정부기구(NGO) 운동가다.
한인들의 정치력을 높여온 김 소장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93년 당시 7%에 불과하던 한인들의 평균 투표율은 2004년 25%로 뛰어올랐다. 최근에는 미하원의 '종군위안부 결의안' 통과와 한국국민 비자면제프로그램(VWP) 성사에 주도적 역할을 하면서, 워싱턴 정가에서 미국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대표적인 한국인 출신 시민운동가로 꼽히고 있다. 2008년 미국 대선이 열리는 코커스와 프라이머리 현장을 모두 찾아 대선 현장을 생중계하고, 이를 한국과 한인들의 미국내 정치력을 높일 기회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정치인들은 국제사회에서의 미국의 위치와 역할을 이유로 반전운동에 동의하지 않았다. 특히, 국민들이 기대했던 민주당도 이를 외면했다. 오랫동안 민주당에서 잔뼈가 굵은 당료들이 문제였다. 반전운동의 대열에 있는 수많은 젊은이들과 젊은 민주당원들이 의기투합했다. 모두가 민주당으로 들어가서 민주당에서 후보를 만들고 그런 후보를 미국의 대통령으로 만들어서 (월남)전쟁을 끝내겠다는 군중들의 전략이었다. 이제 막 월남전에서 살아 돌아온 "존 케리"(2004년 민주당 대통령후보)가 시민사회에서 반전운동을 이끌어 나갔고 그 유명한 존 레논의 반전가요 '이매진(Imagine)'이 이때에 뉴욕의 '브라이언트 파크'에서 발표되었다. 유명한 할리우드 스타인 제인 폰다가 전국을 다니면서 반전운동을 이끌었다. 그래도 닉슨 대통령은 들은 척도 안했다. 젊은이들 사이에 '당으로 들어가자'라는 공감대가 형성 되었다.
1972년 시카고 민주당 전당대회에는 유례없이 젊은층들이 대거 참가했다. 젊은 민주당원들이 내세운 대통령후보는 사우스 다코타의 상원의원인 "조지 맥거번"이었다. 그러나 당의 간부가 아니면 의사표시 한마디 할 수 없었던 것이 당시 민주당의 경선방식이었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당시에 맥거번의 선거운동을 총 지휘했다. 힐러리 클린턴도 '맥거번 대통령만들기'에 적극 참가했다. 이들이 추진한 제도가 "오픈 프라이머리" 제도였다. 당 간부들의 전횡과 횡포를 제도적으로 차단하는 방식이 바로 "오픈 프라이머리" 제도이다. 당시 20대 청년으로 이 운동에 가장 앞장섰던 사람이 바로 힐러리 클린턴이었다.
힐러리 후보는 슈퍼대의원 수로는 앞서지만 바로 이 오픈프라이머리에서 확보하는 대의원수에서 오바마 후보에게 크게 뒤지고 있다. 자신이 앞장서서 만든 제도로 인하여 최초의 여자대통령, 부부대통령의 신화를 포기해야만 할 순간에 왔다.
빌 클린턴의 오랜 친구이고 힐러리 클린턴 후보의 지지자로 알려진 '조지 맥거번'이 노스캐롤라이나, 인디애나의 경선결과를 보고 힐러리 후보에게 후보사퇴를 공개적으로 권고하고 나섰다. "힐러리 클린턴이 후보가 될 가능성은 이제 없어졌다"라고 하면서 직접 빌 클린턴에게 전화를 걸어서 사퇴를 종용했다. 동시에 힐러리 후보를 지지했던 슈퍼대의원 4명이 공개적으로 오바마 후보로 지지를 바꾸었다.
지난 6일 인디애나에서의 승리연설이 경선포기 선언이었으면 훨씬 영예로웠을 것이란 지적도 나왔다. 그래도 경선완주를 주장하는 힐러리를 겨냥해서 주류 미디어들이 "힐러리의 오기" 라고 비아냥투의 논평을 쏟아내고 있다. 8일자 <뉴욕타임스>는 한술 더 떠서 아예 힐러리 후보를 빼고서 존 맥케인과 오바마의 경쟁력을 비교하는 기사를 냈다. 슈퍼화요일 당시에 <뉴욕타임스>는 힐러리 후보를 지지했었다. NBC의 '언론과의 만남(Meet the Press)' 진행자인 팀 러서트는 "이제 우리는 민주당 후보를 결정하게 되었다"고 까지 했다. 공화당측의 존 맥케인 진영은 아예 힐러리에 관해선 언급을 하지 않고 있기도 하다. 오바마를 민주당 후보로 인정하고 있음이다.
필자는 힐러리 후보의 사퇴 선언을 예상했다. 금세기 가장 걸출한 여성정치인의 역사적인 영예로운 결단을 직접 목격하기 위해서 인디애나폴리스를 찾아갔다. 시내 한복판 대형극장안에 마련된 그녀의 연설장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무려 3시간을 기다렸다. 그녀는 아슬아슬한 2% 차이의 승리임에도 오히려 경선완주를 선언했다. 웨스트버지니아로, 또 오레곤과 캔터키를 겨냥한 의지를 나타냈다. 앞으로 쏟아질 사퇴압력을 그녀가 어떻게 견뎌낼지 궁금함보다는 불안감이 앞선다.
필자
김동석 미 뉴욕.뉴저지 한인유권자센터 소장 겸 본지 편집위원은 1985년 미국으로 건너간 뒤 한인들의 정치 참여를 통한 권리 찾기와 한인들의 정치적 위상 높이기를 목표로 93년 뉴욕 등 미 동부 대도시에 ‘한인유권자센터’를 만들어 15년째 활동해온 대표적인 정치 비정부기구(NGO) 운동가다.
한인들의 정치력을 높여온 김 소장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93년 당시 7%에 불과하던 한인들의 평균 투표율은 2004년 25%로 뛰어올랐다. 최근에는 미하원의 '종군위안부 결의안' 통과와 한국국민 비자면제프로그램(VWP) 성사에 주도적 역할을 하면서, 워싱턴 정가에서 미국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대표적인 한국인 출신 시민운동가로 꼽히고 있다. 2008년 미국 대선이 열리는 코커스와 프라이머리 현장을 모두 찾아 대선 현장을 생중계하고, 이를 한국과 한인들의 미국내 정치력을 높일 기회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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