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갑제 "尹 발표 보니 1976년 포항석유 대소동 떠올라"
[전문] "유전 발견은 물리탐사 아닌 시추로 확인되는 것"
조 전 대표는 이날 <조갑제닷컴>에 올린 <윤석열의 포항 앞바다 유전 가능성 발표와 박정희의 포항석유 대소동이 겹친다!>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이같이 밝혔다.
그러면서 "유전 발견은 물리탐사가 아니라 시추로 확인되는 것인데 물리탐사에만 의존하여 꿈 같은 발표를 하는 윤 대통령은 박정희의 실패 사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며 "이하는 <박정희 전기>에 실린 포항석유 대소동 전말기"라며 관련 내용 전문을 실었다.
그는 박정희 포항석유 대소동 당시 국제신문 사회부 기자로 재직하다가 <한국의 석유개발: 비공개 자료의 분석에 의한 전망과 제언>이라는 포항석유의 경제성에 강한 의문을 제기한 논문을 썼다가 중앙정보부 조사를 받고 해직됐다. 그는 그후 중정부장이 신직수에서 김재규로 바뀐 뒤에야 복직할 수 있었다.
다음은 조 전 대표의 글 전문.
<박정희 전기> 중 '포항석유 발견 대소동' 전문
1975년 12월5일 朴대통령은 중화학공업 담당 수석비서관 吳源哲을 서재로 불리는 집무실로 불렀다. 朴대통령은 회의용 탁자에 앉아 吳수석을 맞았다고 한다.
『부르셨습니까?』
『어, 이봐, 포항에서 석유가 나왔대』
朴대통령은 시커먼 액체가 들어 있는 링거병을 보여주더니 마개를 뽑고 액체를 큼직한 재떨이에 조금 부었다. 성냥으로 불을 붙이니 재떨이에 번졌다. 시커먼 연기도 났다. 吳源哲은 순간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原油에는 가스 성분, 휘발유 성분, 輕油, 重油 성분 등이 복합적으로 들어 있다. 여기에 불을 붙이면 가스 성분이 펑하고 소리를 내면서 불이 붙는다. 그런데 이 기름은 精製되어 나온 석유처럼 얌전하게 불탔다. 吳씨는 직감적으로 원유가 아니란 생각을 했다. 朴대통령과 함께 기뻐할 기분이 내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吳씨는 『석유가 나온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라고만 했다.
『각하, 그 기름을 분석해보겠습니다. 제게 주십시오』
吳씨는 링거병을 가져와서 金光模 비서관에게 보였다.
『또 누가 엉터리 보고를 했구먼요』
594 『원유가 아니라 輕油입니다』
그때만 해도 吳수석이나 金비서관은 포항에서 정보부가 시추를 하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두 사람은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석유가 나왔다는 흥분된 보고가 허위로 밝혀지는 경우를 여러 번 겪었었다. 우물을 파다가 기름이 떠오른다고 해서 현장조사를 해보면 근처에 미군이 6·25전쟁 때 기름탱크를 갖고 있었고 그 기름이 땅속으로 스며들어 우물을 팔 때 물에 섞여나왔다는 식이었다.
金光模 비서관은 가까이 지내는 호남정유의 기획담당 임원이자 일류 화학기사인 韓聖甲(한성갑)을 불렀다. 吳源哲 수석은 기름이 든 유리병을 韓씨에게 넘겨주면서 엄숙하게 말했다.
『가장 빠른 편으로 미국 칼텍스에 보내서 시험을 하되 신중을 기하시오. 원유일 가능성에 대해서도 의견을 보내주시오』
韓씨는 『어디서 나온 겁니까』라고 물었다.
『더 이상 묻지 말아요. 비밀을 철저히 지켜야 합니다』
한 4일이 지났을까, 韓씨가 분석보고서를 들고 들어와 吳수석에게 설명해갔다.
『이것은 原油가 아니고 輕油입니다. 이걸 보십시오』
포항에서 나온 기름을 갖고 가서 蒸溜(증류)시험한 그래프를 펴보였다. 원유에 열을 가하면 어떤 성분은 낮은 온도에서 증발하고 무거운 성분은 높은 온도에서 증발한다. 이걸 온도곡선으로 그리면 野山의 능선 모양이 된다. 그런데 韓聖甲이 보여준 그래프는 담배갑을 측면으로 세워놓은 모습이었다. 제로 상태가 한동안 계속되다가 輕油가 증발하는 온도에서 갑자기 선이 수직으로 올라가서 한동안 평평해졌다가 경유 성분이 끝나는 곳에서 갑자기 떨어져 다시 제로가 되는 모습이었다. 이 그래프를 보고 吳源哲은 이 기름은 경유 성분만 있고 다른 성분은 없다는 것을 간파했다. 휘발유, 등유, 경유, 중유 성분까지 두루 갖추고 있는 것이 원유인데 경유 성분만 검출되니 이 기름은 경유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韓씨는 이렇게 덧붙였다고 한다.
『이 그래프를 보니 호남정유에서 경유를 만드는 온도곡선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니 대한석유공사 제품일 것입니다』
『경유는 거의 투명한데 무엇이 섞여 있다는 거요?』
『重質油가 극소량 있습니다』
吳源哲 수석은 지질연구소 소장을 전화로 불렀다.
『포항에서 기름을 파고 있다면서요?』
소장은 마지못한 듯 『그렇습니다』라고 했다.
『시추할 때 경유를 潤滑(윤활)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吳源哲은 포항 B孔에서 경유가 나왔고 정보부에서 이를 原油라고 오해한 까닭을 이렇게 추리해보았다.
1. B공 지하 1475m에 空洞(공동)이 있었다. 그 공동은 물로 차 있었을 것이다. 이 공동 부근의 지층에는 틈이 많이 가 있었다.
2.B공 가까운 곳에서 A공을 먼저 시추할 때 냉각수로서 물을, 윤활제로서는 경유를 상당량 高壓으로 注入시켰다. 시추기를 가동하면서 기어오일이나 그리스 같은 機械油(기계유)도 썼다. A공이 지하 1500m쯤에 도달했을 때 「이런 기름 섞인」 물의 일부가 바위 속 틈을 타고 이동해갔다. 모여든 곳이 B공 지하 1475m 공동이었다. 여기에 조금씩 모여든 기름이 수십 리터가 되었다.
3. 이런 상황에서 새로 시추하기 시작한 B공의 위치가 바로 이 공동이 있는 地上이었다. B공 시추기가 지하 1475m까지 도달하여 이 공동을 뚫고 지나가게 되었다. 이 시추기는 이 지점에서 2m쯤 뚝 떨어지는 현상이 생겼다. 경유와 윤활유 등은 공동 안의 물 위에 떠 있었는데 시추 坑井을 메우고 있는 순환 泥水를 타고 지표면으로 올라오게 되었다. 이것을 본 현장 사람들이 원유가 나왔다고 오해한 것이다. 때는 1975년 12월3일 새벽 2시30분이었다.
595 실망한 대통령:『정보부장을 부르라』
이런 추측 겸 해석을 한 吳源哲은 韓聖甲이 가져온 보고서를 들고 金正濂 비서실장을 찾아갔다. 金실장과 吳源哲은 마주 앉아 걱정을 많이 했다고 한다. 朴대통령은 原油가 나왔다고 여러 사람들에게 자랑을 많이 하고 있는데 만일 원유가 아니라면 거짓말을 한 셈이 된다. 두 사람은 그래도 사실대로 보고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吳源哲은 『경사 난 집에 재를 뿌리는 것과 같은 이런 보고는 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가장 기분 나쁜 보고거리일 것이다』고 회고했다. 잠시 후 金正濂 실장은 분석보고서를 갖고 吳수석을 데리고 朴대통령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吳수석이 보고할 것이 있다고 합니다. 포항에서 나왔다는 기름은 원유가 아니라고 합니다. 吳수석 직접 보고하시오』
吳源哲은 사실대로 설명했다. 朴대통령은 『金실장!』하고 부르더니 『중앙정보부장을 당장 불러!』라고 했다. 吳源哲은 대통령이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은 그 전에도 그 후에도 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朴대통령은 회의용 탁자 정면에 앉아 微動(미동)도 하지 않는다. 아무 말 없이 앞만 노려보고 있다. 金실장과 吳源哲 수석은 그 왼쪽에 앉아 무거운 침묵을 견디고 있었다. 세 사람 중 어느 누구도 침묵을 깨려고 하지 않았다. 吳源哲은 『처단을 기다리는 포로신세 같았다』고 한다. 기나긴 15분이 흘렀다. 남산에서 출발한 申稙秀(신직수) 부장이 황급히 들어왔다. 인사를 하고 오른쪽에 앉았다.
朴대통령은 인사도 제대로 받지 않고 『申부장, 포항에서 나온 기름은 원유가 아니라면서! 어떻게 된 거야?』라고 말했다. 吳源哲이 살펴보니, 申부장은 갑자기 당하고 보니 안색이 변했을 뿐 대답할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吳수석, 임자가 설명해!』
吳수석은 괜히 이런 惡役을 맡게 되었다고 원통한 생각이 들었다. 포항에서 나온 기름이 진짜 원유라면 여기 모인 사람들이 모두 좋아할 텐데…. 비밀공작 하듯이 석유탐사를 벌이고 있는 정보부에 吳수석의 기술자적인 오기가 칼을 들이댄 꼴이 되었다. 吳수석은 될 수 있는 대로 간단하게 요점만 설명하기로 했다.
『석유가 나왔다고 해서 너무 기뻤습니다. 그 원유를 미국의 칼텍스에 보내어 분석을 시켰습니다. 그 결과 원유가 아니고 경유란 판단이 나왔습니다』
보고서를 申부장에게 넘겨주니 수행한 간부가 받아본다. 대통령이 먼저 이 어색하고 긴장된 분위기를 풀려고 했는지 吳源哲을 향해서 『吳수석, 임자 생각은 어때?』라고 말했다.
『각하, 정보부에서 보고한 대로 시추작업에서 채취된 기름이란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전문가가 아니라 원유로 잘못 판단한 것 같습니다』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것은 아니다」고 정보부를 변호하는 답변을 했다. 朴대통령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그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申부장, 포항에 석유가 있다느니 없다느니 말썽이 많으니 이번 기회에 속시원히 뚫어서 확인토록 하시오』
그제야 吳源哲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申稙秀 부장이 상처를 받지 않고 이 침통한 분위기에서 헤어난 것이 다행스럽게 생각되었다. 朴대통령의 절묘한 결심에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朴대통령은 申부장을 수행한 간부에게 말했다.
『앞으로 석유탐사를 할 때는 吳수석과 자주 상의를 하라. 그리고 吳수석을 통해서 보고토록 하라』
596 성공한 鄭長出의 로비
1968년에 일단 석유가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났던 포항시추는 왜 시작되었으며 그것도 왜 정보부가 그 일을 하게 되었는가? 1960년대 포항 드라마의 주인공이 鄭宇眞(나중에 鄭盛燁으로 改名)이었다면 1970년대의 주인공은 그의 큰형 鄭長出이었다. 그는 대단한 手腕(수완)의 소유자였다. 鄭씨는 5·16 전후 정당 간부생활도 했고 비록 낙선했지만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본 경험이 있었다. 鄭長出은 학자들과의 이론투쟁보다는 정치력을 동원해서 일이 되는 쪽으로 꾸미는 데 전념했다. 먼저 일본인 친구를 찾아내 자민당 중의원 다나카 다츠오(田中龍夫)와 나카니시 이치로(中西一郞)를 소개받은 뒤 자신의 복안을 전했다. 1975년 1월12일 자민당 국회의원단 16명이 訪韓(방한)했을 때 훗날 문부상이 되는 다나카 다츠오 의원이 자민당 대외경제 협력 위원장 자격으로 끼어 있었다. 다나카와 나카니시 의원은 鄭長出과 만나 포항지역의 한일 공동개발문제를 구체적으로 논의했다.
2월14일 일본 의원단은 朴正熙 대통령을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두 의원은 포항 석유를 한일 양국이 공동개발할 것을 제의했다. 朴대통령은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이 없었다고 한다. 이들은 다음날 金鍾泌 총리를 방문해서도 그 계획을 털어 놓았지만 金총리도 듣고만 있었다고 한다. 일이 어느 정도 추진됐다고 판단한 鄭長出은 포항 1차 시추 때부터 친면있던 고려대 趙東弼(조동필) 교수의 소개로 코리아 타코마의 金鍾珞(김종락) 회장과 공화당 鄭泰成(정태성) 의원을 만나 한일 민간자본으로 포항 석유를 개발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2월4일 이들 네 사람은 金鍾泌 총리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鄭長出은 한아름의 보고서와 포항 1차 시추 때의 사진 앨범을 갖고 가 열정적으로 金총리를 설득했다. 이 무렵 포항에서 朴대통령에게 「고위 정치인들이 포항 광구를 빼앗으려 한다」는 탄원서가 올라왔다.
朴대통령은 金正濂 비서실장을 불러 탄원서를 주면서 『확인해 보라』고 지시했다. 확인 결과 진정서의 내용은 사실과 많이 달랐다. 金正濂 실장이 대통령에게 보고하자 朴正熙는 화를 내는 대신에 이렇게 말하더란 것이다.
『아무튼 석유가 나오긴 해야겠는데, 업자는 있다고 하고 기관에서는 없다고 하고, 게다가 모략까지 들어온다고 하니 참…. 아예 이해관계가 없는 정보부에 시켜서 포항 지역에 시추탐사를 하도록 하시오. 미국에도 우리 학자들이 있으니 순수한 애국심만 있는 사람들을 동원해서 반드시 이해관계 없이 중립적으로 추진하시오』
朴대통령으로부터 석유 탐사 특명을 받은 申稙秀 정보부장은 아연실색했다고 한다. 金正濂 당시 비서실장의 회고는 이렇다.
『석유에 문외한인 정보부장이 이 일을 맡게 되니 난감한 표정이 되어 땀을 흘립디다. 그래도 朴대통령은 申稙秀 부장을 믿고 맡기신 거지요. 申부장은 이해관계 없는 순수한 사람을 쓰라는 각하의 하명에 따라 시추회사의 회장격으로 정보부 陸東蒼(육동창·당시 육군준장) 국장을 발탁했어요』
2월6일 鄭長出은 뜻밖의 사람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서울 광교 부근의 어느 다방에서 만난 사람은 정보부 陸東蒼 국장이었다. 陸英修 여사의 인척이기도 한 陸국장은 그동안의 포항 시추 경과에 대해서 물었다. 鄭씨는 정보부가 고위층의 지시를 받아 움직이고 있다고 판단했다. 정보부는 鄭씨에게 정부에 요구할 사항을 물었다. 鄭長出은 시추기 두 대, 자금 2억원, 방해요인 제거를 건의했다. 陸국장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申稙秀 정보부장은 3월5일 朴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이 자리에서 朴대통령은 말했다.
『하느님은 아마도 자원을 골고루 나눠 주었을 것이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기름이 어디엔가는 숨어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나라도 이만큼 컸으니 우리 손으로 기름을 한 번 찾아보자』
대통령으로부터 특명을 받은 정보부는 즉시 포항 시추의 진행 책임을 김영수 기획조정실장 - 陸東蒼 국장-崔甲東(최갑동) 과장선으로 정했다. 현장에서 진두지휘를 할 사람으로 뽑힌 崔과장은 육군 공병 대령으로서 정보부에 파견 나가 있었다.
1975년 5월31일부터 포항에서 중앙정보부 특별 석유탐사반은 「동신산업공사」라는 위장 간판을 내걸고 鄭長出이 지목한 3개 지점 A, B, D 세 개 갱정의 시추 기공식을 올렸다. A, B공은 鄭長出, D공은 자문위원들의 의견이 많이 반영된 위치선정이었다고 한다. 정보부는 상공부로 하여금 鄭씨 형제들이 갖고 있던 이 지역의 석유개발권을 「실적이 없다」는 이유로 그 등록을 취소시켰다.
597 地下 1,475m 화강암층에서 나온 기름의 정체
정보부는 국내에 석유개발 전문가가 부족함을 알고 외국 전문가들을 수시로 초청, 의견을 들었다. 1975년 6월에는 프랑스 국립 석유연구소의 라트레이유 박사가 포항을 답사, 「퇴적층이 너무 작다. 학술 목적의 시추가 아니라면 몰라도 경제적 목적의 시추로는 적합지 않다」는 비판적인 보고서를 냈다.
시추 작업도 비관적으로 진행됐다. 퇴적층이면 으레 나오는 천연가스 발견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낭보 없이 가을로 접어들었다. 신생대 제3기 지층을 다 뚫고 중생대 화산암층을 계속 굴진해도 鄭長出(그는 시추현장에 시험실을 두고 지질 및 암석 분석을 하고 있었다)의 예견처럼 퇴적층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A孔은 지하 1150m부근에서부터 단단한 화강암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푸석한 퇴적암이어야 석유가 괼 수 있는데 강철 같은 화강암이 등장하자 자문위원들 사이에서는 『그만 끝내자』는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문제의 B공에서는 지하 900m쯤에서 화산암층이 나오다가 지하 1400m쯤에서부터 화강암층이 나타났다. 자문위원들은 『이제 그만하자』는 의견을 냈다.
1975년 12월3일 새벽 2시30분경, 포항 시추 현장 당직실에서 숙직 근무하던 광업진흥공사 파견 직원 곽승진은 전화벨 소리에 잠을 깼다.
『지금 이상한 게 올라오고 있습니다』
시추공의 흥분된 소리가 들려왔지만 곽씨는 냉정하게 말했다.
『더 자세히 살펴본 뒤에 다시 보고하시오』
그동안 포항 시추 현장 책임자였던 동신산업 崔甲東 사장(중앙정보부 과장)은 시추공들에게 『기름이 나오는 걸 발견하면 상금 1백만원을 주겠다』고 하여 종종 시추공들이 오인 보고를 해 오는 경우가 있었다.
비슷한 시각, 이상한 예감에 잠이 오지 않았다는 鄭長出도 전화를 받았다. 그는 즉시 현장으로 달려 나왔다. 鄭씨가 현장에 가 보니 구멍에서 나오는 물을 받아두는 큰 통에서 물이 넘쳐 배수로를 따라 논도랑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시추 구멍에서는 샘솟듯 하는 지층수와 함께 시커먼 액체가 솟아나와 수면 위로 확 번지고 있었다. 鄭씨는 논도랑을 따라 300m쯤 걸어갔다. 시커먼 액체와 뒤섞인 물이 계속 흐르고 있었다. 시추공들의 설명이 있었다.
『새벽 2시경, 시간당 1cm 정도의 느릿한 속도로 내려가던 시추봉이 지하 1475m 지점에서 갑자기 푹 꺼지듯 쑥 들어갔다. 마치 공동을 통과하듯 약 2m를 그렇게 지나갔다. 우리(야간 작업반 시추공)는 사고가 난 줄 알고 굴진을 중단했다. 그런데 갑자기 검은 액체가 시추공을 통해 솟아나기 시작했다. 불을 당기니 연기를 내며 탔다』
鄭씨는 문제의 액체를 채집하기 전에 사진 촬영부터 해 두었다. 그는 동신산업의 회장격이던 陸東蒼 국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陸국장은 『속단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고 한다.
한편 인하공대 화공과 이희철 교수는 이날 아침 8시30분경 인천의 학교로 출근했더니 정보부로부터 온 전화가 기다리고 있었다. 崔甲東 사장이었다. 즉시 서울역으로 나와 포항 시추현장으로 내려오라는 이야기였다. 李교수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포항 시추 자문위원이었던 李교수는 다른 자문위원들과 함께 바로 전날 포항에서 서울로 돌아왔던 것이다. 10여명의 자문위원들은 포항에서 이틀 동안 B공 평가회의를 가졌다. 거의 모든 학자들이 비관적인 견해를 보였다. 그런데 하루 만에 기름이 나왔다는 것이다.
李교수를 태운 정보부 승용차가 포항에 도착한 것은 정오가 조금 지나서였다. 갱정에서 샘솟듯 나오던 암갈색 액체는 오후 2시쯤 끊어졌다. 약 12시간 동안 한 드럼 가량의 액체가 나온 셈이었다. 이희철 교수는 샘플 한 통을 받아 싣고 곧장 울산 정유공장의 원유 분석실로 달려갔다. 기술자들에게 엄중한 함구령을 내린 李박사는 샘플 분석을 지시했다. 증류 시험, 가스크로마토그래피 및 형광 분석 등을 거친 뒤 분석자는 『경질의 원유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곁에 있던 정보부 직원은 이 낭보를 본부로 전했다.
이 액체는 두 갈래 경로를 따라 고위층에 전달됐다. 鄭長出은 그날 아침 서울로 전화를 걸어 부인을 급히 포항으로 내려오게 한 뒤 기름이 든 유리병을 코리아 타코마 金鍾珞 회장에게 전달했고 金회장은 친동생인 金鍾泌 국무총리에게 갖다주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崔甲東-陸東蒼-申稙秀로 연결된 정보부 명령계통을 따라 기름이 든 유리병이 옮겨 다녔다. 12월5일 申稙秀 부장은 분석표를 붙인 공식적인 기름 병을 金鍾泌 국무총리와 朴正熙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朴대통령은 기름병을 받아 들고 아이처럼 좋아했다. 곁에 서 있던 金正濂 비서실장에게 『하느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았어. 우리도 이제 산유국이 될 수 있구나』라면서 재떨이에 기름을 붓고는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이걸 그냥 마시고 싶다』고 했다는 것이다.
*598 대통령의 흥분과 자랑
12월6일. 오전 9시30분부터 청와대 회의실에서 경제 각료들과 中東문제 연구소 연구원들 간의 회의가 열렸다. 낮 12시30분경 회의가 끝나자 朴대통령은 金正濂 비서실장에게 『金실장, 내 집무실에 있는 그것 좀 가져와 보시오』라고 했다. 잠시 후 대통령의 책상 위에 검은 액체가 담긴 유리병이 올랐다. 朴대통령은 『내가 오늘 여러분께 기쁜 소식을 하나 알려 주겠소. 우리나라 포항에서 기름이 나왔습니다. 이게 바로 그 원유이니까 한번씩 돌려 가면서 보시오』라고 말했다. 어떤 사람은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기도 했다.
12월9일 朴대통령은 대구에서 열리는 전국 새마을 지도자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특별열차를 탔다. 열차가 경기도 안양에 이르렀을 때 옆 칸에 타고 있던 林芳鉉(임방현), 張東雲(장동운), 朴振煥(박진환) 특별 보좌관들을 불렀다. 朴대통령은 이들에게 원유를 개발하게 된 경위와 실용적인 단계에 이르기까지의 문제점 등을 자상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朴대통령은 석유가 나오는 꿈을 꾸다가 깨는 바람에 아쉬웠다는 이야기를 측근들에게 한 적이 있었다. 석유에 恨이 맺힌 대통령은 원유가 담긴 병을 자신의 집무실에 둔 이후부터 틈만 있으면 누군가에게 이것을 자랑하고 싶어진 것이다.
이날 저녁 숙소인 대구 수성 관광호텔에서 열린 만찬장에서도 朴대통령은 포항 석유발견의 保安을 지킬 수가 없었다. 다음날 새마을 지도자 대회가 끝난 뒤 전국 지방장관들과 가진 오찬석상에서도 朴대통령은 이 소식을 알렸다. 이로써 포항 석유의 비밀이 깨져버렸다. 1975년 歲暮(세모)의 한국사회는 대통령으로부터 번지기 시작한 석유의 꿈을 불태우며 저물어 갔다.
기자는 1976년 1월1일자 국제신문 사회면 머릿기사를 썼다. 기사 제목은 「石油여 솟아라, 浦項 일대 中生代 경상계 지층 탐사서 희망적 결론」이었다. 직설적으로 포항에서 석유가 나왔다는 언급은 없었지만 석유가 나왔다는 전제하에 油田 가능성을 지적한 내용이었다. 기자는 年初의 連休 때 포항 시추 현장을 둘러보았다. 해양석유 시추선에 눈이 익은 기자에겐 매우 초라한 규모의 시추탑이었다. 시추구멍 사이의 거리로써 背斜구조의 크기를 대강 짐작하고 왔다.
1976년 1월4일 회사에 출근하니 정보부 부산지부에서 좀 와달라는 연락이 왔다. 갔더니 『포항석유관련 기사는 쓰지 않기로 되어 있는데 무슨 의도에서 썼느냐』는 추궁이 있었다. 정보과장이 기자를 수사과 직원한테 넘겨 진술조서를 받게 했다. 몇 시간 지나 풀려나긴 했지만 정보과장의 정중한 태도가 인상에 남았다. 1979년 10월27일 아침 경찰서 출입기자이던 나는 전국에 지명수배된 대통령 시해사건 범인 자료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나를 조사한 그 정보과장이 시해범으로 지명수배되어 있는 게 아닌가. 그가 朴대통령 경호원인 안재송, 정인형 두 사람을 사살한 朴善浩(박선호) 의전과장이었던 것이다.
1976년 1월15일 당시 국제신보 사회부 소속이던 기자는 朴대통령이 연두 기자회견 때 혹시 기름에 대해 언급할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전날에 미리 포항시추 관련 기사를 몇 꼭지 써두었지만 朴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석유발견을 확인해주지 않으면 신문에 게재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599 기자회견
몇 시간이나 다소 지리하게 계속되던 일문일답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도 석유 이야기는 나오지 않고 있었다. 열 번째 질문으로 어느 기자가 이렇게 물었다.
『포항 근교에 석유가 나왔다는 說이 일부 국민간에 퍼져 있으며 제주도 남쪽 7광구에도 많은 석유가 매장되어 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어 국민들이 대단히 궁금하게 생각합니다. 이 기회에 사실여부를 밝혀주십시오』
朴대통령이 기다렸다는 듯이 답했다.
『지난해 12월 우리나라 영일만 부근에서 처음으로 석유가 발견된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 기술진이 오랫동안 탐사한 후 3개 공을 시추한 결과 그 중 한 군데에서 석유와 가스가 발견된 것이 사실입니다. 석유가 나온 양은 비록 소량이나 지하 1500m 부근에서 그것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석유가 발견된 것은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동안 KIST에 의뢰해 성분을 분석한 결과 양질의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매우 반가운 소식이고 고무적인 이야기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매장량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나 우리나라에서 석유가 나왔다는 사실 그 자체가 중요합니다. 경제성이 있을 만큼 매장량이 있을지는 더 조사해보아야 합니다. 이 지역에 대한 탐사 및 조사를 위해 연초부터 외국 기술자를 불러오고 필요한 장비를 들여오고 있습니다. 4~5개월이 지나면 그 결과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외국 기술자들이 有望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으나 땅 밑에 있는 문제로 아직은 무어라고 말할 수 없으며 더 조사해봐야 할 것입니다. 좀더 확실한 것을 안 후 발표하기 위하여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기름이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 우리나라에서 기름이 나온다니까 국민들이 흥분하고 좋아하는 심정은 충분히 알 수 있으나 직접 파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므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과 같이 국민들이 번영된 조국건설을 위해 근면, 자조, 협동으로 부지런히 일하고 열성을 다하면 하느님이 우리에게 좋은 선물을 가져다 줄지도 모르니 조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
기자는 이 대목이 끝나자마자 회사로 뛰기 시작했다. 마감시간을 늦추면서까지 석유발표를 싣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우리 신문에 준비해둔 기사를 넣기 위해서였다.
吳源哲 수석은 이 기자회견장에 배석하고 있었는데 석유관련 질문이 나오자 불안했었다고 한다. 朴대통령의 설명을 분석해보면 그는 포항석유가 원유가 아니란 사실을 알면서도 원유가 발견된 것처럼 말했고 마치 매장량이 많아 油田으로 성립될 수 있으리란 기대감을 주는 방향으로 대답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경제성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나 포항석유 발견에 대단한 의미를 두는 발언이었다. 朴대통령의 이 발표에다가 혹을 덧붙인 것이 언론의 소나기 같은 과장·조작 보도였다.
거의 모든 신문은 포항석유발견 발표를 1면 머리에 통단 컷 제목으로 보도했다. 이런 편집은 북한이 남침하거나 현직 대통령이 사망한 경우에나 사용한다. 대통령은 석유가 나왔다고만 했는데 거의 모든 신문들은 油田이 발견된 것처럼 보도했다. 퇴적층을 뚫으면 소량의 석유는 자주 나오지만 경제성이 있을 만한 유전 발견율은 2%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을 무시하고 「우리도 산유국이 되었다」느니 「이제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될 날이 오고 있다」고 보도하는가 하면, 어느 중앙지는 「포항유전의 매장량은 일본 최대 유전의 열 배, 중동 최대인 멜라님 유전과 맞먹는 69억 배럴로 추정된다」고 백일몽 같은 기사를 쓰고 있었다. 이런 기사로 해서 주식값이 연일 폭등했다.
참고로 일본에서 당시 가장 큰 유전은 매장량이 약 6천만 배럴이었고 중동에서 가장 큰 유전은 사우디 아라비아의 가와르 유전으로서 매장량이 약 700억 배럴이며 멜라님이란 유전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기자는 朴대통령의 석유발견 발표 다음날부터 포항석유에 대해서 비관론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포항시추에 관계했던 기술자들과 접촉하면서 언론보도나 朴대통령의 희망 서린 발표와는 다른 냉담한 견해를 듣기 시작한 것이다.
기자는 포항석유가 油徵(유징) 정도이고 그 한 해 전 부산 앞바다인 제6광구 도미 A 갱정에서 발견된 含油層(함유층)보다도 오히려 의미가 작은 것이란 판단을 하게 되었다. 도미 A 갱정 석유발견 특종을 해본 기자로서는 기름 몇 드럼의 발견이 유전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경우가 훨씬 많다는 것을 실감한 때문에 포항석유가 油田성립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확신할 수 없었다. 朴대통령의 언급에서 기자가 느낀 것은 『아하, 이분이 석유를 무슨 우물 파는 식으로 이해하고 있구나』 하는 점이었다. 그는 지하 1475m에서 기름이 발견되었으니 더 깊게 파면 더 많이 나온다는 식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는 感을 갖게 된 것이다. 목표로 하는 지층에서 기름이 나오지 않으면 더 깊게 판다고 해서 기름이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600 油徵과 油田의 혼동
기자는 포항석유의 가능성에 대해 부정적인 내용을 써서 사회부장에게 제출했다. 사회부장은 『어제부터 정보부에서 연락이 있었다. 이제부터는 포항석유에 대해서 일체 보도하지 못한다는 통보였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朴대통령이 포항석유 발견을 확인해준 날로부터 6일이 지나자 포항석유란 단어가 신문과 방송에서 썰물처럼 사라졌다.
기자는 이 무렵 석유개발에 대한 나름대로의 이해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것은 교실에서 배운 지식 덕분이 아니라 취재현장에서 특종을 노리고 뛴 덕분이었다. 1972년 11월13일, 동해 제6광구의 해저석유 개발권을 가진 로열 더치 쉘은 울산 正東 80km 해저(수심197m)에서 돌고래 I孔 시추를 시작했고 그때 국제신보 문화부 기자이던 필자는 「석유발견」이란 稀代의 특종을 하기 위해서 부산 감만동 바닷가에 있는 현장사무소를 들락거렸다. 필요에 의해서 기자는 미국 및 네덜란드 기술자에게 묻고 석유지질학 책을 참고하면서 「지상 최대의 도박」이라 불리는 성공률 2%의 석유개발 취재에 빠져들었다.
기자는 1973년 1월4일자 국제신보 사회면 머릿기사로 돌고래 I공의 굴착심도 2000m 지층에서 「천연가스가 발견되고 있어 油層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특종으로 보도했다. 나중에 檢層해본 결과 기름과는 관계가 없는 천연가스로 밝혀졌다. 이 지역은 油田보다는 천연가스田의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이 그때부터 확실해졌다. 최근 석유개발공사는 이 부근 해저에서 발견된 천연가스層이 경제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개발하기로 했다.
석유개발 과정을 면밀히 취재하면서 기자는 두꺼운 퇴적층을 뚫었을 때 석유가 나오는 것은 구름이 끼면 비가 오는 것처럼 아주 자연스런 현상임을 알게 되었다. 문제는 매장량이다. 육상에서는 수백만 배럴의 매장량도 油田으로서 경제성이 있으나 해저유전은 수천만 배럴의 매장량도 비싼 개발비 때문에 경제성이 없을 수가 있다. 이런 사정을 잘 모르는 기자들, 국민들, 그리고 나중에는 朴正熙 대통령까지도 기름 몇 드럼 정도가 발견되어도 흥분하려는 태세였다. 외국에선 퇴적층을 시추할 때 석유가 안 나오면 오히려 이상하게 여기는 판인데 우리나라에선 당연히 나와야 할 천연가스에도 흥분하고 그것을 곧장 유전 발견으로 연결시켜 확대 해석하곤 했다. 시추의 목적은 천연가스나 油徵이 아니라 경제성이 있을 만큼 多量으로 매장된 유전이나 가스田의 발견이란 것을 망각한 데서 포항석유 대소동이 있었다.
기자도 처음부터 그런 사실을 알아버린 것이 아니라 취재과정의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배웠던 일이었다. 1975년 6월 로열 더치 쉘은 제6광구의 제주도 동쪽 82km에서 도미 A공 시추를 再開했다. 굴착심도 2,400m 부근 沙岩層(사암층-모래가 굳어서 된 틈이 많은 퇴적암. 이 틈 속에 석유나 가스가 괸다)을 뚫을 때부터 원유가 검출되기 시작했다. 포항석유가 아니라 이 원유검출이 우리나라에서 최초였다.
기자는 1975년 6월17일 국제신문 1면 머릿기사로 「원유가 나왔다」고 보도했다. 이 油層은 2,480m 부근에 있었다. 이 지층에 대한 檢層 결과 경제성이 있을 만한 매장량을 갖고 있지 않음이 밝혀졌다. 기자는 유전 발견으로 이어지지 않았던 이 두 개의 불발 특종 - 천연가스 발견과 油徵발견의 경험을 통해서 浦項석유발견을 냉정하게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기자는 포항석유의 수준을 아무리 높게 잡더라도 제6광구 도미 A孔에서 발견된 원유 정도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포항유전의 가능성을 최초로 제기했으나 1975~77년 시추에는 관계하지 않았던 鄭盛燁(鄭宇眞의 改名)은 이즈음 정보기관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거의 모든 신문은 포항석유발견의 主役(주역)이 鄭盛燁이라고 誤報를 했었다. 이번 포항시추는 鄭長出의 활약에 의해 착수되었다는 것을 모른 언론이 옛날 신문철을 뒤져서 쓴 기사 때문이었다. 당국에선 鄭盛燁이 자신의 이름을 내기 위해 그렇게 떠들고 다녔다고 오해를 한 것이다.
이 무렵 기자는 어떤 충동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 「포항석유는 경제성이 없다」고 소리치고 싶은 충동이었다.
이런 충동에는 기자가 알고 있는 진실을 전하고자 하는 욕심에다가 석유개발에 관한 지식을 과시하고 싶은 생각도 깔려 있었다. 명예욕과 정의감이 뒤섞인 충동을 자제하지 못한 기자는 언론종사자와 지질학자들, 그리고 관계 공무원들을 상대로 한 편의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601 석유축제설과 논문 소동
1976년 5월에 들어서자 포항석유에 대한 2차 발표가 있을 것이란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5월16일엔 석유축제가 열릴 것이란 소문이 돌기도 했다. 주식이 또다시 뛰기 시작했다.
이때 기자는 논문을 완성했다. 「한국의 석유개발: 비공개 자료의 분석에 의한 전망과 제언」이란 제목의 원고지 250장 분량의 소책자를 200부 찍었다. 인쇄비 11만원은 『제발 그런 위험한 짓 그만두라』고 말리던 아내가 댔다. 이 책자를 연구소, 관청, 언론사로 보냈다. 정보부의 지시에 의해서 모든 언론이 포항시추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논문이라도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 비슷한 것이 있었기에 논문들을 다 보내고 나니 후련하기도 했다.
「한국의 석유개발」 제5장에서 기자는 포항에서 정보부가 뚫고 있는 시추공의 위치와 이미 밝혀진 지질단면도를 결합시켜 가능한 최다량의 원유 매장량을 계산해보았다. 유전 유망지역의 평면적을 최대로 10평방 킬로미터로 잡고 油層의 두께는 10m, 유층을 형성하는 지층의 암석 空隙率(공극률-바위 안에 듬성듬성 구멍이 나 있는 공간의 비율. 이 값이 높아야 기름이 많이 스며 있다는 것이 된다) 20%, 含油率 50%, 採油率 50%로 계산해보니 可採매장량은 약 3천만 배럴이란 추산이 나왔다. 이 수치는 모든 가능성 가운데 최고치를 가정하여 계산한 것이다.
이 최대치를 기준으로 해도 포항 석유로 한국이 석유를 자급자족하게 되었다느니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느니 하는 보도는 터무니없는 과장이라고 기자는 지적했다. 기자는 포항석유는 경제성이 없거나 있어도 매장량은 적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한 보름 뒤 정보부 부산지부에서 좀 보자는 연락이 왔다. 일본 산케이 신문에서 나의 논문을 인용하여 「포항 석유의 경제성은 비관적이다」고 기사를 썼다는 것이다. 정보부에선 기자가 배포한 보고서를 모두 회수하라고 강요했다. 그들은 내가 「부득이한 사정으로 논문을 되돌려주십시오」란 요지의 글만 써주면 자신들이 대신 회수해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해주었다. 그 보름 뒤 기자는 근무하던 국제신보에서 쫓겨나 실업자가 되었다. 정보부에선 두 번이나 정보부의 보도지침을 위반한 기자를 몰아내도록 회사에 압력을 넣었던 것이다.
나중에 기자가 산케이 신문을 얻어 읽어보니 이 신문의 서울특파원이 쓴 기사는 「한국 포항 유전 소규모」란 제목으로 외신면 머릿기사에 실려 있었다. 그 요지는 「석유전문기자인 국제신문의 趙甲濟 기자가 포항석유와 관련된 試錐자료를 근거로 하여 포항석유에 대해서 비관적인 전망을 했다」는 것이었다. 이 기사는 「탄화수소(석유와 가스의 화학성분)를 저장해야 하는 지층의 두께가 얇고 탄화수소를 생성시키는 母岩의 발달이 부족하다」면서 「정부에서 발표한 포항석유발견이 과연 油層의 존재를 의미하는지 고립된 소량의 석유발견을 의미하는지조차 확실하지 않다」는 필자의 주장을 인용했다. 이 기사는 이어서 「趙기자는 과대평가를 해서 매장량을 추산해도 포항석유는 한국의 연간 소비량에도 미치지 못한 정도라고 주장했다」고 보도했다.
졸지에 실업자가 된 기자는 잡지에 글을 쓰면서 몇 달을 버티다가 국제상사 신발공장에 간부사원으로 입사했다. 그 1년 뒤 申稙秀 부장이 金載圭로 바뀐 다음 정보부에서는 「조용히 신문사로 복직하면 우리도 가만히 있겠다」는 암시가 왔다. 기자는 1977년 10월1일자로 국제신문 사회부로 복귀했다.
기자가 실직자 생활을 하고 있던 1976년 8월 朴대통령은 진해별장에서 여름 휴가를 보내면서 기자회견을 했다. 그는 『포항에서 석유탐사를 계속했지만 아직 경제성은 확인하지 못했다』고 발표했다. 그동안 포항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602 뚫어도 뚫어도
1976년 연두 기자회견 석상에서 한 朴대통령의 석유 발견 발표 이후 정보부는 바빠졌다. 申稙秀 부장은 검사 출신답게 합리적이고 신중한 사람이었다. 정보부는 朴대통령이 그런 발표를 하는 것에도 반대했다고 한다. 언론의 과장 왜곡보도로 여론이 과열되자 우선 언론의 포항관련 보도를 일체 금지시킨 다음 정보부는 미국에서 5000m까지 뚫을 수 있는 유전시추기를 도입하고 미국인 석유시추 기술자 20여명도 데리고 왔다. 명인성, 김연수 박사 등 해외에서 활동중이던 한국인 전문가들도 초빙했다. 동신산업은 현대적 석유개발회사로 변모했다. 3월에 정보부의 위장회사 동신산업은 기름이 나온 B공 북서쪽 약 50m 지점에서 DS 1호공을 뚫기 시작했다. B공 시추는 일반광산용 시추기를 사용했기 때문에 구멍이 지름 2.7cm로 좁아 檢層(검층-지층의 상태를 조사하여 유전의 자격이 있는지 여부를 검사하는 작업)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추기가 掘進(굴진)심도 1000m를 넘어 석유가 나왔던 1475m를 향해 접근하자 누구보다도 가슴을 죄기 시작한 것은 현장책임자인 동신산업 사장 崔甲東이었다. 육군대령이던 그는 포항석유발표 직후 준장으로 진급했다. 지하 1394 ∼ 96m 안산암에서 형광반응이 있었으나 기름은 비치지 않았다.
시추봉은 지하 1400m를 넘어섰다. 메마르고 단단한 화강암층을 갈아서 부수면서 조금씩 조금씩 파고들어갔다. 崔사장은 寢食(침식)을 잊다시피하여 현장에 나와 초조하게 작업을 지켜보았다. 정보부, 청와대로 매일 아침 보고를 했다.
그는 졸도했다. 긴장의 연속에 의한 신경성 고혈압 때문이었다. 병원에 며칠 입원해 있다가 링거병을 팔뚝에 꽂은 채 현장에 다시 나타났다. 『문제의 油層심도에 접근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병상에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1450m, 1470, 1480, 1490, 1500, 1550m. 기름은 나오지 않았다. 崔사장은 눈에 띄게 초췌해졌다. 초조하게 좋은 소식을 기다리는 정보부장과 대통령 쪽으로 매일 「油徵 없음」이란 보고를 하는 것도 이만저만한 고역이 아니었다. 마침내 申稙秀 부장은 석유보다도 건강이 더 중요하다고 훈계를 한 뒤 그를 부산의 동래 온천장으로 강제 휴양을 보내버렸다.
B孔에서 불과 50m 거리를 두고 뚫었는데도 기름이 나오지 않았으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含油層은 보통 고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수㎢나 수십㎢ 뻗어 있는 법이기 때문에 같은 그 지층에 도달하면 유징이 나오게 되어 있다. DS 1호공 시추는 지하 2176m까지 뚫고 끝냈다. 화강암층이 끝날 줄 몰랐기 때문이다.
기름은 沙岩, 石灰岩 같은 무른 퇴적층에 스며 있지 강철 같은 화강암층에선 발견되지 않는다. 정보부는 화강암을 지나면 또다시 퇴적층이 나오겠지 하는 기대를 버리지 않고 굴진을 계속했으나 인간의 소망이 아무리 간절하다고 한들 자연의 이치가 바뀔 리가 없었다.
정보부는 이어서 기름이 나온 B공에서 남동쪽으로 수십m 떨어진 장소에서 DS 2호공을 시추하기 시작했다. 문제의 지하 1,475m 지층을 목표로 했다. 이런 시추는 아마도 세계 석유개발사상 처음이었을 것이다. 마당만한 면적에 세 구멍을 뚫는다는 것은 이미 유전을 찾자는 것이 아니었다. 한국 대륙붕 시추에서는 수십 평방킬로미터의 평면적을 가진 油田 유망지층에 대한 평가를 단 한 구멍의 시추로 결론을 내렸다. 포항시추는 유전이 아니라 대통령이 발표한 석유발견의 진실성을 확인하는 것으로 그 성격이 변질되어 버렸다. DS 2호공 시추도 지하 1475m를 아무 소식없이 통과했다. 매일 아침 『아무 징후 없습니다』란 보고를 정보부, 청와대 비서실로 올려야 하는 崔甲東 동신산업 사장의 괴로움이 극에 달하고 있었다. 吳源哲 수석은 직접 전화를 걸어와 『무슨 소식이 있습니까?』하고 물어오기도 했다. 멀리 떨어져 있는 朴대통령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했다. 朴대통령은 그해 3월 포항의 시추현장을 찾아 격려하고 올라가지 않았던가.
단단한 화강암층을 파고들어가는 것을 보다못한 한 미국인 기술자는 자문위원인 이희철 교수(인하대학)에게 『당신들은 차라리 금을 찾는 것이 낫겠다』고 말하더란 것이다. 새 구멍 굴진을 시작하는 한 기공식에 참석한 김영수 정보부 기조실장은 崔甲東에게 『이번에도 기름이 나오지 않으면 너를 이 구멍에 파묻어버리겠다』고 농담을 했다. DS 2호공에서 油徵이 나오지 않자 정보부는 지하 1823m에서 굴진을 종료했다. 다른 지역의 시추공에서도 아무 성과가 없었다.
기자가 『포항석유는 경제성이 의문시된다. 있다 해도 소규모일 것이다』는 요지의 논문을 써낸 것은 이처럼 정보부의 신경이 예민해져 있을 때였다.
603 고개를 드는 의문점
시추현장에서도 이즈음 B공 원유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국립지질조사소에서 현장에 파견나가 있던 석유지질 전문가 곽영훈 박사(현재 한국자원연구소 소장)는 그 의문점을 이렇게 요약했다.
『우선 석유가 나올 수 없는 지층에서 나왔다는 점이었습니다. 석유지질학설로는 어떤 경우에도 설명이 되지 않는 석유발견이었습니다. 즉, 과학으론 해명이 되지 않는 현상이었다는 점입니다. 포항지역에서 석유가 나올 가능성이라고 있는 곳은 최대 두께가 800미터쯤 되는 제3기 海成層(바다 밑에서 퇴적된 지층)뿐입니다.
그런데 이 3기층을 여러 번 뚫어보니 석유를 生成하기엔 지층의 成熟이 미흡하다는 결론이 났습니다. B공의 기름은 이 3기층이 아니라 中生代의 백악기층, 그것도 화강암, 정확히 말하면 규장암 지층에서 나왔단 말입니다. 다른 지층에서 생성된 것이 틈을 따라 이동하여 이곳까지 왔다고 설명하려고 해도 무리였습니다. 중생대 퇴적층은 제3기층과 달리 過성숙되어 기름을 생성시킬 수 없다고 우리는 판단했습니다. 중생대 퇴적층이라면 또 모를까 화강암층에서 나왔으니 더욱 석유발견을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또 한 가지 B공 기름에 대한 유공과 KIST의 최초 분석에 대한 오해입니다. 이 분석은 原油여부를 판별한 것이 아니라 原油라는 전제하에서 성분을 알아본 것이었습니다』
郭박사는 『KIST에 B공 기름을 분석하러 갈 때 나도 동행했다』면서 『성분 분석을 해보니 더욱 원유가 아니란 생각이 굳어졌다』고 했다. 郭박사는 『원유인가 아닌가를 분석하는 확인법이 당시 국내에선 정립이 되어 있지 않았다』면서 『원유인가 아닌가를 알아보려면 분석화학적 여러 가지 시험과 함께 석유지질학적인 검토가 따라야 하는데 어느 것도 되지 않았다』고 했다. 이미 대통령이 원유라고 발표하고 무서운 정보부가 대통령의 말씀을 사후적으로 뒷받침하려고 달려들고 있는 판에 자문위원들이 제기하는 이런 異見(이견)은 그냥 묻혀 넘어갔다.
하루는 金正濂 실장이 吳源哲을 부르더니 『이젠 포항탐사를 매듭지을 때가 된 것 같다』고 했다. 두 사람은 우선 정보부를 납득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吳源哲은 걸프의 석유탐사 전문가 레딩 햄을 초빙하여 포항을 시찰하게 하고 탐사자료를 검토하도록 했다. 조선호텔에서 정보부 탐사반 사람들과 만난 그는 간단하게 『석유부존의 가능성은 없다』고 결론내렸다. 하루 500달러, 10일 기한으로 온 오일맨의 권위 앞에서 정보부도 反論을 제기하지 못했다.
동신산업 회장으로 통하던 정보부의 陸東蒼 국장이 吳源哲 수석을 찾아 와 『이제부터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하면서 상의하더라고 한다. 吳源哲은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오래 끌수록 정보부도 빠져나오기 어려울 것입니다. 정보부는 이 일에서 손을 떼고 장비와 殘務(잔무)를 국립지질조사소에 인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동신산업이 마지막으로 뚫은 것은 칠포해수욕장 남쪽 해안 언덕의 DS 4호공이었다. 최후를 의식해서인지 가장 깊게 뚫었다. 최종심도는 3117m. 역시 화산암층을 헤쳐나오지 못하고 굴진은 끝났다. 1976년 말에 중앙정보부장으로 취임한 金載圭는 시추종료를 朴대통령에게 건의했다. 이 자리에서 대통령은 『석유가 있는가 없는가를 확인하는 것도 통치자의 의무가 아니겠는가』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연인원 약 4만명, 약 70억원의 예산, 12개 구멍 시추, 延 25000m 굴착. 그 흔적은 암석표본과 각종 檢層자료로만 남았다. 朴대통령, 金鍾泌 당시 총리, 鄭長出, 崔甲東, 그리고 현장의 몇 사람들은 B공에서 나온 기름을 기념으로 조금씩 얻어가 최근까지 보관했다.
1981년 여름 기자는 포항시추 현장을 5년 만에 둘러보았다. 기름이 나왔던 B공은 시추파이프가 박힌 채 남아 있었고 가스가 지층수에 섞여 보글보글 올라오고 있었다. 풀밭 속에 버려진 이 坑口(갱구)가 기름에 한맺혔던 대통령과 온 국민들을 흥분시켰던 곳인 줄 아는 행인들은 별로 없었다. 뜨거운 지하수가 나왔던 D공 주변은 정부가 주변의 땅과 집들을 사들여 통제구역으로 설정해놓았다. 坑口의 손잡이를 트니 뜨거운 물이 쏟아졌다. 국립지질조사소의 後身인 동력자원연구소의 현장관리소 직원들은 굴착장비에 기름칠을 해가며 다시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604 일본인의 분석 결과도 「원유가 아니라 輕油」
자, 이제부터는 吳源哲씨가 주장한 『포항석유는 원유가 아니라 정제된 輕油였다』는 내용을 검증할 차례이다. 吳씨는 그런 주장을 1997년 5월호 월간 WIN에 「중앙정보부가 연출한 국가적 해프닝-포항석유탐사」란 題下의 기고문에 실었고 그해 7월에 나온 「한국형 경제건설 제6권」에도 記載했다. 이 두 글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저널리즘의 기준으로 본다면 이것은 吳源哲씨의 주장일 뿐이다. 이 주장을 검증하는 절차를 거쳐서 사실이나 허위로 확인하는 작업은 그 뒤 진행되지 않았다. 지금부터 기자는 이 일을 하려는 것이다.
먼저 吳씨가 朴대통령으로부터 받은 유리병에 든 석유를 미국으로 보내 분석하는 데 있어서 중계역할을 했던 韓聖甲씨를 찾았다.
韓씨는 1976년 뒤에는 호남정유 부사장, LG소재(주) 사장을 거쳤다. 그는 吳源哲씨가 기록한 과거사를 대체로 사실이라고 확인해주었다. 다만 자신이 『이 기름은 유공에서 만든 경유제품과 같다』고 말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고 했다.
『저는 당시 호남정유 서울 본사 기획-수급담당 임원이었습니다. 吳수석 밑에 있던 金光模 비서관과 친했습니다. 저는 吳源哲 수석으로부터 받은 기름샘플을 미국의 칼텍스로 보냈더니 며칠 있다가 분석치가 왔고 이것을 吳수석에게 보고하였습니다. 미국 연구소의 분석결과는 원유가 아니란 것이었습니다. 아주 단정적으로 이것은 원유가 아니고 정제된 기름이다, 라고 판단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도 朴正熙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하면서 포항에서 양질의 原油가 발견되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충격을 받지 않았습니까.
『저는 그분이 무슨 정치적인 의도가 있어 그렇게 말하는 줄로만 알았죠』
1970년대 포항시추를 성사시킨 주인공 鄭長出은 포항 B孔과 C孔 및 경북 의성군 多仁지역 시추에서 나온 기름을 유리병에 넣어 보관하고 있다가 1980년에 일본의 저명한 석유지질학자 기노시다(木下浩二) 박사에게 맡겨 분석을 의뢰했다. 鄭長出에 따르면 1980년 3월 그는 기노시다 박사에게 한국의 中生代 지층인 慶尙系에 대한 공동연구와 유전탐사 指導를 의뢰했다고 한다. 기노시다 박사는 1945년 구슈제국대학 지질학과를 졸업한 이후 제국석유, 석유자원, 미쓰비시 석유, 중동석유 등에서 석유지질학자로 일했다. 鄭씨는 원유분석에 정통한 기노시다 박사에게 그동안 보관하고 있던 기름을 보낸 것이다. 기자는, 기노시다 박사가 1981년 4월14일 鄭長出에게 보낸 분석 결과보고서와 분석표의 全文을 鄭씨로부터 입수할 수 있었다.
그 요지는 이러하다.
<시간이 흘렀다고 해도, 또 원유의 경질분은 휘발했다고 해도 重質分은 남아 있어야 한다. 혹은 화강암이 들어와 열에 의한 變性을 받았다고 해도 重質分은 남아 있어야 한다. 重質分의 존재 여부를 알아내는 최선의 방법은 FD-MS(Field Desorption-Mass Spectrometry) 분석법이다. 이 방법으로 시험해본 결과 1번(B공기름)과 2번(C공 기름)은 매우 특수하지만 원유일 가능성은 있다. 3번(의성군 多仁면 기름)은 경유와 윤활유가 섞인 것으로 原油가 아니다.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가스크로마토그래피 蒸溜(증류)분석을 해보았다. 칼럼안에는 重質分이 남고 주로 경질분이 관측되어야 한다. 해본 결과는 한번도 경질분이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휘발분은 원래부터 없었다는 이야기로서 原油일 가능성은 낮다는 것이 분석자의 결론이 되었다. 분석자의 중간보고는 이상과 같은데 대단히 죄송하게 되었지만 나의 견해를 덧붙여 둔다. 가벼운 휘발분도, 무거운 아스팔트 성분도 없으므로 1, 2번 샘플은 경유, 3번은 경유+윤활유의 분자량 범위 안에 있는 것이며 原油라고 한다면 극히 稀有의 타입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가스 크로마토그래피의 분석에 의하면 나프텐 성분이 많다. 이 점, 海成유기물에서 생성된 원유의 특징인데 한국의 퇴적 분지는 陸成層(注-기름이 나온 포항 B공 1,475m는 중생대 화강암층이다. 중생대 지층 가운데는 陸成퇴적층이 있고 신생대 제3기층은 海成퇴적층이다. 陸成이란 뜻은 호수나 강에 의해서 퇴적된 지층을 말한다. 海成은 바다 밑에서 퇴적된 지층이다)이라고 생각하는데 불가사의하다. 샘플분석으로 더 상세히 답한다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다. 다른 자료로 원유의 존재 가능성을 제시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원유라 해도 변질을 많이 받은 것은 확실하므로 양적으로는 큰 기대를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기노시다 박사의 분석을 요약하면 포항에서 나온 기름은 原油가 아니라 輕油일 가능성이 매우 높으나 매우 특이한 원유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전체적인 문맥으로 보아서 기노시다씨는 輕油일 가능성에 거의 절대적인 비중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그는 자신에게 분석을 의뢰한 鄭長出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輕油의 가능성이 압도적임에도 불구하고 세 번이나 분석시험을 한 뒤 「輕油이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다시 조심스럽게 「극히 특이한 원유일 가능성도 있으나 다른 자료로써 그것을 입증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고 못박았다. 그는 「대단히 죄송하게 되었지만」이란 말을 덧붙임으로써 분석 의뢰자인 鄭長出의 기대와 다른 결론이 나온 점에 대해서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다.
B공 기름을 가스크로마토그래피로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이 기름에다가 열을 가했더니 섭씨 166도에서 처음으로 증발하기 시작하여 396도까지 전체의 85%가 증발했다. 이것은 輕油成分이다. 나머지 15%는 396~760도 사이에서 증발했는데 이것은 重油성분이다.
원유라면 166도 훨씬 이하의 온도에서부터 휘발유 성분 등이 증발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전혀 보이지 않고 무거운 아스팔트 성분도 없으므로 이 기름은 원유가 아니라 경유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원유가 지층 속에서 생성된 뒤 갑자기 화산분출이 있다든지 하여 열에 의한 變性을 받았다면 휘발성분이 날아가버린 원유가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지질학적으로 설명되어야 한다(지질학자들은 포항에서 그런 현상이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다).
605 郭英勳 박사의 견해-「원유라고 설명할 도리가 없다」
포항시추 때 참여했던 郭英勳(곽영훈) 한국자원연구소 소장(당시는 지질조사소 근무)은 우리나라의 석유탐사, 그 가운데 지질분석 및 檢層 분야의 일인자로 꼽힌다. 郭소장은 1975년 12월에 기름이 나왔을 때부터 의문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다. 郭英勳 소장은 油公울산공장이나 한국과학기술연구소에서 원유라고 분석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고 했다.
『그곳에서 한 분석은 원유인가, 精油인가를 가리기 위한 게 아니었습니다. 원유란 전제하에 어떤 성분이 있느냐를 분석한 것입니다』
기자는 유공 울산공장의 시험실에 알아보았는데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당시 분석은 原油여부를 가린 것이 아니라 성분 분석이었다는 것이다. 原油여부를 가린 분석은 吳源哲 수석의 의뢰에 의해 칼텍스 시험실에서 한 것과 미쓰비시 석유의 기노시다 박사가 한 것뿐이란 이야기다. 이 두 분석에서 다 같이 「원유가 아니라 경유이다」 「원유일 가능성은 극히 낮고 경유일 가능성이 높다」란 판정이 나온 것이다.
기자는 郭英勳 소장에게 기노시다 박사의 분석자료를 팩스로 보내주고 의견을 들었다. 郭소장은 『기노시다 박사가 한 분석자료, 특히 가스 크로마토그래피의 분석자료를 보니 원유로 보기는 어렵고 경유와 비슷하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郭소장도 기노시다처럼 이 석유샘플에서 메탄, 에탄, 부탄 같은 가벼운 탄화수소 성분이 전혀 검출되지 않는 것이 원유가 아니란 중요한 증거라고 지적했다. 1975년에 나온 기름을 5년간 병에 넣어 보관했다가 분석했기 때문에 휘발분은 달아나버렸을 수도 있지만 가스 크로마토그래피 분석법은 백만분의 1(ppm) 단위 이하의 미량도 검출해내는 아주 정교한 방법이므로 휘발분이 전혀 검출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기름은 원유가 아니라 輕油라고 보는 것이지요. 精油과정에서 휘발분을 없애버리고 輕油성분만 정제해낸 제품이란 뜻입니다. 原油라면 세월이 가면서 또는 누군가가 불을 붙여서 그 휘발분을 태워없앴다고 하더라도 무거운 성분 속에 소량의 가벼운 성분이 포획되기 때문에 기노시다 박사의 분석치처럼 휘발분이 전혀 나오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지요. 이 자료를 가지고 기노시다 박사가 「이 기름은 원래부터 휘발분을 지니고 있지 않았으므로 원유가 아닌 경유로 보여진다」고 판단한 것은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기노시다 박사는 중질유의 존재여부 시험에서 아스팔트 성분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지적했습니다. 무거운 성분도 가벼운 성분도 없는 원유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원유란 복합물질로서 가벼운 가스부터 무거운 아스팔트까지를 다 포괄하고 있는 물질이니까요』
다만 한 가지 1975년 기름 발견 직후 원유說에 의문을 제기한 郭英勳 소장이 말문이 막힌 적이 있었다고 한다. B공 기름에 자외선을 비쳐보니 형광반응이 있었기 때문이다. 원유라고 믿는 사람들은 『형광반응은 경유에선 나오지 않고 원유에서만 나오니 이것을 원유라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했다고 한다. 郭英勳 박사는 나중에 원유가 아닌 그리스(重質油)성분에서도 형광반응이 나오는 것을 확인했다고 한다. 시추기계의 윤활유로 쓰이기도 하는 그리스 성분이 B孔 내부를 순환하는 물에 녹아들어 이것이 기름성분과 섞여 형광을 발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는 것이다.
606 輕油와 윤활유가 왜 地下로 들어갔을까
그러면 B孔의 기름이 原油가 아니고 輕油라고 하더라도 어떻게 해서 그 깊은 땅속에까지 스며들었을까. 이것도 수수께끼이다. 前述한 吳源哲 전 수석의 추리는 이러했다.
「A공 시추를 할 때 냉각수와 섞어 쓴 경유와 시추장비에 쓰는 윤활유 그리스油 등 重油성분이 지하의 바위틈새로 빠져나가 B공 지하 1475m에 발달한 空洞에 몰려 있다가 B공 시추 때 발견된 것이다」
郭英勳 소장은 이런 추리에 대해 『A孔과 B孔은 상당히 떨어져 있는데 과연 그런 기름의 이동이 가능했겠는지 의문이 간다』고 했다. 그보다는 『坑井 순환 泥水(갱정의 벽이 붕괴되지 않도록 뻑뻑한 물을 순환시키는데 이 물에는 화학약품이나 기름을 섞기도 한다)에 탄 乳化된 輕油가 분리되어 나왔을 가능성을 생각해본 적이 있다』고 했다. 유화제를 이용하면 물과 경유성분이 죽처럼 혼합된다. 좀처럼 기름이 따로 떨어져 나올 수가 없는데 어떤 상황에서 기름이 분리되어 표출되는 바람에 原油라고 오해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추리이다. 한 현장 기술자는 그러나 B孔에선 기름을 순환泥水에 타게 않았다고 증언했다. 郭소장은 어떤 경로로 경유가 B孔 안으로 들어갔는지는 추정만 할 뿐 밝힐 순 없게 되었다고 했다.
『趙편집장도 시추현장에 가보셔서 잘 아시겠지만 그곳에는 여러 가지 용도로 쓰이는 기름이 매우 많습니다. 시추 현장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기름이 어떤 경로로 해서 지하로 들어갔다가 굴진할 때 나오는 지층수에 묻어나올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鄭長出씨가 1979년에 경북 의성지역에서 시추할 때 계산한 예산서에 따르면 1500m를 뚫는 데 드는 경비 6800여만원 가운데 각종 油類代가 10%가 넘는 710만원이었다. 그만큼 시추현장에선 경유, 휘발유, 중유, 윤활유, 그리스유 등을 많이 쓴다는 얘기이다.
재미있는 것은 鄭長出씨가 포항에서 나온 두 가지 기름시료와 함께 일본의 기노시다 박사에게 분석을 맡겼던 제3번 시료는 鄭씨가 정부의 도움을 받지 않고 中庸石油광업주식회사란 민간회사를 통해서 경북의성군 多仁面에서 시추한 GD 1號孔 484~504m 지층에서 나온 것이란 점이다. 1979년 12월에 발견되었다는 이 기름에 대해서 鄭씨는 원유가 틀림없다고 주장해 왔었다.
기노시다 박사는 포항에서 나온 샘플 두 개에 대해서는 경유일 가능성이 매우 높지만 「그러나 매우 특이한 원유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했으나 이 多仁의 시료에 대해서는 「분석결과 이것은 경유와 윤활유가 섞인 것임이 분명하다」고 단정했다.
즉, 시추봉 시추파이프 갱정순환泥水 등 시추현장에 있던 경유와 윤활유가 어떤 경로로 地下로 들어갔고 구멍을 팔 때 이 경유와 윤활유 성분이 表出됨으로써 鄭長出씨가 원유로 오해했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포항에서 나온 기름도 비슷한 경과를 거친 것이 아닐까. 기노시다 박사가 분석한 포항 기름의 성분은 경유성분을 주로 하고 중질유도 조금 보이는데 이 중질성분은 윤활유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多仁지역 GD 1호공에서 일어났던 사고가 포항 B공에서도 일어났던 것이 아닐까.
吳源哲의 기억에 따르면 朴대통령이 건네준 B공 기름은 검었다고 한다. 吳수석은 「이것은 경유이다」는 분석결과표를 갖고 온 호남정유 韓聖甲씨에게 『경유라면 투명한데 왜 검지요』라고 물었다고 한다. 韓聖甲씨는 『重質油가 극소량 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吳源哲씨의 이 기억은 일본의 기노시다 박사가 분석한 B공 기름(鄭長出 보관분)의 분석결과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어 그의 증언에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
포항 B孔에서 기름이 발견된 직후 정보부는 도쿄대학의 석유전문가 가와이 고조(河井興三) 교수를 초청하여 평가를 의뢰했다. 기자는 1975년 12월17일자로 된 「浦項地區 石油 天然 가스 조사보고」란 題下의 글을 입수할 수 있었다. 이 보고서에서 가와이 교수는 「시추지구에서 나오는 천연가스의 거의 전부는 물에 녹아 있고 대부분은 메탄성분이며 가스층 부근에서는 油徵이나 석탄층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천연가스의 최대 매장량은 2천만 입방미터로서 이는 하루 3만 입방미터씩 생산할 경우 2년이면 바닥이 나는 수준이기 때문에 경제성이 없다」고 계산했다. 가와이 교수는 「3기층과 백악기층 어디에서도 유전가스 및 原油의 유징이 보이지 않는다. 배사구조의 꼭대기에 뚫은 A갱정에서도 유징이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포항지구에서는 석유의 매장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백악기층에는 화산암이 너무 많아 탄화수소 가스나 원유를 기대할 수 없다」고 단정했다. 가와이 교수는 「地熱자원으로 이용할 만한 뜨거운 水源도 없으나 다만 D孔에서 나오는 地層水는 온천으로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고 했다.
1973년 초에 로열 더치 쉘이 해저 4260m까지 뚫었던 제6광구 돌고래 A孔의 지질분석 자료를 기자는 입수했다. 이 구멍은 포항지역에 노출된 신생대 제3기층의 퇴적층이 동쪽으로 연장된 곳을 뚫은 것이다. 퇴적층의 크기와 두께가 포항보다 엄청나다. 그만큼 석유생성에 유리한 지질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얘기이다. 1973년 4월 쉘이 우리 정부에 제출한 시추결과 보고서는 부정적인 평가를 담고 있다. 이 구멍에서는 천연가스만 발견되고 유징은 일체 발견되지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서 쉘의 보고서는 「석유를 생성하는 母岩(Source Rock)의 발달이 좋지 않아 석유생성이 되지 않았다. 이런 현상은 이곳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 지역 전체의 문제인 것 같다」라고 지적했다. 이것도 포항 B孔에서 나온 기름이 原油일 수 없다는 간접 증거이다. 포항보다도 몇배나 잘 발달된 해저 퇴적층에서도 석유가 발견되지 않았는데 포항에서 원유가 나오기란 무리다.
607 自明한 결론
기자는 정보부가 만든 동신산업공사의 회장이었던 陸東蒼 당시 정보부 관리국장과 통화했다. 그는 『지금도 포항석유가 원유라고 생각하는가』란 질문에 대해 『공무상의 일이기 때문에 확인해줄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 『대통령이 이미 원유라고 발표한 것에 대해서 그런 이야기를 한다면 사실상 원유가 아니란 의미로 받아들여진다』고 답변을 재촉했으나 그는 緘口(함구)했다.
崔甲東 사장은 『지금 우리집에는 B공에서 나온 기름이 든 유리병이 보관돼 있다. 나는 지금도 원유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기자는 마지막으로 吳源哲씨와 이런 일문일답을 가졌다.
─정말 포항석유는 원유가 아니고 정제된 輕油제품이었나?
『틀림없다. 칼텍스에서 보내온 분석표를 보니 금방 알 수 있었다』
─鄭長出씨가 보관하고 있던 포항석유 시료를 분석한 일본의 기노시다 박사는 원유보다는 경유에 더 가깝다고 분석했지만 극히 예외적인 원유일 가능성도 배제하진 않았는데.
『지금 내가 말하는 것은 朴대통령으로부터 직접 받은 병에 든 석유를 말하는 것이다. 鄭長出씨가 보존하고 있었던 것이 포항석유인지 아닌지 나는 모른다. 원유란 것은 복합적인 탄화수소 성분을 가진 물질이다. 분자량이 적은 가스로부터 고체에 가까운 아스팔트 성분까지 광범위한 성분분포를 보인다. 이런 원유를 대상으로 蒸溜 시험을 하면 그 분석표는 반월형의 산능선처럼 보인다. 그런데 포항석유를 분석한 것을 보니 담배갑을 모로 세워놓은 것 같았다. 즉 가스 같은 휘발분과 무거운 重質分은 없고 가운데의 輕油성분만 검출되었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절대로 원유가 아니다. 의문의 여지가 전혀 없는 輕油였다』
─혹시 「포항석유는 원유가 아니었다」는 귀하의 글이 나간 뒤 당시 시추 관계자들로부터 항의를 받은 적은 없는가?
『없었다』
─朴대통령으로부터 포항 B공 석유에 대한 질문을 그 뒤 다시 받은 일이 있었나.
『없었다』
지금까지 이 기사를 읽은 독자들도 같은 생각이겠지만 포항 B공 기름이 원유가 아니었다는 것은 自明한 결론이 되고 말았다. 吳源哲의 증언과 韓聖甲 및 金光模의 증언으로 칼텍스가 포항 B공의 석유를 원유가 아닌 경유라고 분석한 것은 사실로 확인되었다. 그 분석기록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다행히 鄭長出이 가지고 있던 B공 기름을 분석한 기노시다 박사의 보고서는 남아 있었다.
이 기록은 吳源哲의 증언을 뒷받침한다. 기노시다 박사는 또 鄭長出이 원유라고 믿었던 의성군 多仁面의 기름을 경유와 윤활유의 혼합품이라고 단정함으로써 정보부와 鄭씨가 원유라고 믿었던 기름이 모두 「경유+重油」일 가능성을 높여주었다. B공 기름 발견 이후에 일본 도쿄대학 가와이 교수가 평가한 보고서도 발견되었고 이것 또한 포항석유는 원유가 아니란 결론을 재촉했다.
정보부가 B공 기름을 울산정유공장과 KIST에 맡겨 조사한 것은 原油 여부가 아니라 原油란 전제하의 성분분석이었음이 확인됨으로써 B공 기름이 原油라고 주장할 과학적 근거가 상실되고 말았다. 석유지질학적으로 판단할 때도 B공 기름을 原油라고 설명할 수는 없게 되어 있다. 그것이 지층속에 생성되어 있던 원유라면 바로 옆에서 뚫은 두 개의 구멍에서도 나와야 하는데 나오지 않았다.
즉, 과학으로는 포항 B공 석유가 원유라고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그런데 朴正熙의 권력은 그것이 원유라고 선언했고 그 뒤 24년 동안 과학과 사실보도의 도전을 저지하거나 피한 채 그 허위를 보호할 수 있었다. 권력은 한시적이긴 하지만 허위를 사실이라고 우길 수가 있는 것이다.
朴대통령이 서거한 뒤 그의 집무실을 정리할 때 포항 기름을 넣은 유리병이 그대로 발견되었다. 朴대통령은 왜 자신에게 실망을 안겨다 준 이 기름을 그대로 보관하고 있었을까. 더구나 吳源哲 수석이 원유가 아니라 輕油라고 보고한 「가짜 원유」인데.
풀리지 않은 의문은 왜 朴대통령이 「원유가 아니다」란 보고를 받고서도 기자회견에서 「원유가 나왔다」고 발표했을까 하는 점이다. 이때 朴대통령으로서는 너무 여러 사람들 앞에서 석유 자랑을 많이 해두었기 때문에 「가짜다」라고 고백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朴대통령으로선 또 당시 포항에서 석유시추가 계속되고 있었으므로 설사 B공 석유는 가짜라고 해도 내일, 아니면 모레, 아니면 언젠가는 석유가 솟아오를 것이라고 기대할 수가 있는 입장이었다. 석유 시추에 종사하는 이들은 시추가 최종적으로 끝나기 전까지는 항상 노다지의 꿈과 기대를 품게 되는 것이다. 포항 시추의 실패 후에도 朴대통령은 대륙붕 시추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집무실에서 최후까지 남아 있었던 기름병은 대륙붕에서 유전이 터지기를 비는 하나의 부적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것은 기름에 한이 맺힌 대통령에 어울리는 遺品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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