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전쟁영웅' 김영옥은 독립운동가 아들
2차대전-한국전때 전설적 무공 세워, 소수인 위해 여생 보내
일제의 종군위안부 만행을 규탄하는 미 하원의 위안부결의안 채택의 숨은 주역이었음이 뒤늦게 밝혀진 고 김영옥 미육군 예비역 대령은 생전에 '살아있는 신화'이자 '전설적 전쟁영웅'이었다.
1919년 독립운동가의 아들로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난 고인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전선에서 유색인 미국 장교로 맹활약해 전설적 전투기록을 남겼다. 고인은 특히 1944년 미국내에서 핍박받던 일본계로 구성된 미 육군 442연대의 100대대 작전장교(당시 대위)로 전투에 참가, 프랑스 동북부 보슈산맥 인근 브뤼에르, 비퐁텐느 지역을 해방시켰다. 프랑스 현지에서는 지금도 '카피텐느 김(김대위)'이 전설적인 인물로 묘사되고 있고 마을 성당 문 옆에 붙어있는 동판에도 "100대대 영웅들중 한 명인 김영옥 대위, 이 성당 문 앞 왼쪽에서 부상했으나, 치넨(의무병 이름)과 함께 성공적으로 탈출했다'고 적혀 있다. 김 대령은 당시 독일군 기관총탄 3발을 맞고 사경을 헤매다 '신약' 페니실린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구했다.
그는 그후 일본계 부대를 이끌고 연합군의 로마 해방을 앞당겨, 미국인들로부터 멸시와 탄압을 받던 일본계 미국인들로부터 '신앙적 존경'을 받았다. 고인이 생전에 일본의 거센 반발로 위기에 처했던 종군위안부 결의안을 '일본계 미국인 참전용사'들을 설득해 채택할 수 있게 했던 것도 바로 이같은 '신앙적 존경'이 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고인은 공로로 2차대전때 혁혁한 공로로 1945년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최고무공훈장을, 1950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십자무공훈장을 받은데 이어 2005년 2월에는 프랑스 국가 최고훈장인 레종 도뇌르(Legion d'Honneur) 무공훈장도 받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잠시 세탁소를 운영했던 그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자원입대해 미 육군 7사단 31연대 1대대장으로 중부전선에 참전, 전선을 약 60㎞ 북상시키는 등 전공을 세웠다. 참전 기간중 그는 수많은 전쟁고아를 거둬 이들을 돌보기도 했다. 그는 63년 군사고문으로 다시 한국에 와 3년간 국군 최초의 미사일부대를 창설하는 등 한국의 국방능력 신장에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고인은 전후에 여러 한인 단체들의 태동에 관여하고 일본계 교육재단 `고 포 브로크'의 설립에도 기여하는 등 미국내에서 한인뿐 아니라 일본계 등 소수 약자들의 권익을 신장하는 데 평생을 바쳐왔다.
그는 지난 10월 한국전 당시 공로를 인정받아 2003년 뒤늦게 우리 정부로부터 무공훈장 중 최고등급인 태극무공훈장 수여받았다. 또한 국사편찬위원회는 재외동포사에 30쪽에 달하는 김영옥 일대기를 싣기로 하기도 했다. 미주 한인 100년 역사에 이승만 대통령 등 유명인사가 많지만 '재외동포사 북미편'에 한 인물의 일대기를 집중 소개되는 것은 김영옥 대령이 유일하다. 그는 생전에 "나는 100% 한국인이자, 100% 미국인"이라며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염원했었다.
생전에 이렇듯 조국과 핍박받는 소수파를 위해 많은 일은 한 고인은 향년 86세를 일기로 2005년 12월29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1919년 독립운동가의 아들로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난 고인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전선에서 유색인 미국 장교로 맹활약해 전설적 전투기록을 남겼다. 고인은 특히 1944년 미국내에서 핍박받던 일본계로 구성된 미 육군 442연대의 100대대 작전장교(당시 대위)로 전투에 참가, 프랑스 동북부 보슈산맥 인근 브뤼에르, 비퐁텐느 지역을 해방시켰다. 프랑스 현지에서는 지금도 '카피텐느 김(김대위)'이 전설적인 인물로 묘사되고 있고 마을 성당 문 옆에 붙어있는 동판에도 "100대대 영웅들중 한 명인 김영옥 대위, 이 성당 문 앞 왼쪽에서 부상했으나, 치넨(의무병 이름)과 함께 성공적으로 탈출했다'고 적혀 있다. 김 대령은 당시 독일군 기관총탄 3발을 맞고 사경을 헤매다 '신약' 페니실린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구했다.
그는 그후 일본계 부대를 이끌고 연합군의 로마 해방을 앞당겨, 미국인들로부터 멸시와 탄압을 받던 일본계 미국인들로부터 '신앙적 존경'을 받았다. 고인이 생전에 일본의 거센 반발로 위기에 처했던 종군위안부 결의안을 '일본계 미국인 참전용사'들을 설득해 채택할 수 있게 했던 것도 바로 이같은 '신앙적 존경'이 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고인은 공로로 2차대전때 혁혁한 공로로 1945년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최고무공훈장을, 1950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십자무공훈장을 받은데 이어 2005년 2월에는 프랑스 국가 최고훈장인 레종 도뇌르(Legion d'Honneur) 무공훈장도 받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잠시 세탁소를 운영했던 그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자원입대해 미 육군 7사단 31연대 1대대장으로 중부전선에 참전, 전선을 약 60㎞ 북상시키는 등 전공을 세웠다. 참전 기간중 그는 수많은 전쟁고아를 거둬 이들을 돌보기도 했다. 그는 63년 군사고문으로 다시 한국에 와 3년간 국군 최초의 미사일부대를 창설하는 등 한국의 국방능력 신장에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고인은 전후에 여러 한인 단체들의 태동에 관여하고 일본계 교육재단 `고 포 브로크'의 설립에도 기여하는 등 미국내에서 한인뿐 아니라 일본계 등 소수 약자들의 권익을 신장하는 데 평생을 바쳐왔다.
그는 지난 10월 한국전 당시 공로를 인정받아 2003년 뒤늦게 우리 정부로부터 무공훈장 중 최고등급인 태극무공훈장 수여받았다. 또한 국사편찬위원회는 재외동포사에 30쪽에 달하는 김영옥 일대기를 싣기로 하기도 했다. 미주 한인 100년 역사에 이승만 대통령 등 유명인사가 많지만 '재외동포사 북미편'에 한 인물의 일대기를 집중 소개되는 것은 김영옥 대령이 유일하다. 그는 생전에 "나는 100% 한국인이자, 100% 미국인"이라며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염원했었다.
생전에 이렇듯 조국과 핍박받는 소수파를 위해 많은 일은 한 고인은 향년 86세를 일기로 2005년 12월29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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