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기자들까지 전율케 한 위안부할머니들 절규
[김동석의 뉴욕통신] 종군위안부결의안 美청문회 '막전막후'
15일 오전11시(현지시간)에 매샤추세츠 애브뉴 주미한국대사관 인근의 이탈리안 식당에서 한국에서 오신 이용수할머니와 호주에서 오신 오헤르너 할머니를 뵈었다. "미국동포가 우리의 한을 풀어준다"면서 보자마자 눈물을 감추지 못하고 덥석 껴안아 주시는 이용수 할머니와 뭔가 해보이겠다고 결의찬 웃음을 갖고 포옹을 하시는 올해 84세의 오헤르너 할머니를 만나고서야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이틀전 호주에서 워싱턴으로 오는 길의 중간기착지인 샌프란시스코에서의 비행기 결항으로 잠시 행방이 묘연했던 것을 혹시나 어떤 방해가 아닌가..? 그래서 오헤르너 할머니를 찾으러 버클리대학 한국학생들이 총출동했던 소동이 있었기 때문에 얼마나 반가웠었는지 몰랐다. 이미 캘리포니아를 돌면서 증언을 하시고 워싱턴에 와 계신 김군자 할머니는 그쪽의 관계자들과 함께 청문회장에서 만나기로 했다고 한다. 청문회를 기획하고 가장 큰 걱정이 연로하신 증언자들을 무사히 워싱턴 DC로 오시도록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일단 안심이 되었다.
작년 의회 109회기 국제관계위에 기습적인 상정과 만장일치 통과를 했음에도 전체회의에 붙여지지 못한 아쉬움이 있지만 이를 계기로 우리는 어렴풋하게나마 워싱턴 DC의 작동방식을 알게 되었다. 외교위원회내의 분위기를 우선 잘 파악해야 한다는 것과 상임위에선 회기 초반에 상정.통과를 시켜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따라서 작년 중간선거 직후에 분명히 혼다의원이 들고 나와야 하고 공화당 중진급 이상이 공동으로 발의해 주어야 된다는 것에 주목했다.
선거결과 다수당이 바뀌었고 하원에 신인이 대거 진출해서 새롭게 외교위에, 특히 동아태 소위에 포진되는 의원들을 파악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110회기 연방의원 전원에게 당선축하 카드와 편지를 일제히 발송했고 특히 작년 이 결의안에 협조하고 동의해준 의원들에겐 3회에 걸쳐서 유권자센터 이름으로 또 다시 협력해 줄 것을 간곡하게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우리의 이러한 노력에 혼다측 사무실서 반응이 왔다. 새 회기 시작전인 12월이었다.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혼다측에선 외교위원회내 공화당 거물인 크리스토퍼 스미스 의원을 설득해 줄 것을 요청했고 다행히 스미스 의원의 지역구가 한인세탁업자들의 밀집지역이라 일에 속도가 붙었다. 1월4일 회기가 시작되니 상임위 배정과 양당의 의원 워크숍, 보좌관 배정...등 너무나 바쁜 와중이라 대답이 느렸다. 정말로 초조했다.
그렇게 지역구를 통해서 재촉한지 꼭 3주만인 1월30일 화요일 정오를 지나서 " 스미스의원이 공동발의에 동의해 주겠다는 답신을 보내라고 했습니다" 라는 내용의 스미스의원 보좌관으로부터 얌전한 이메일을 받았다. 난방비를 걱정해서 썰렁하기만 했던 유권자센타의 뉴욕시 후미진 사무실에 환호성이 터졌다. 즉시 상임위에 상정을 할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우린 이것을 혼다 의원 측에 알렸고(혼다사무실서도 이미 통보를 받아서 결의안 초안을 최종 점검하고 있었다.), 혼다 의원측은 작년 759법안보다 한층 강화된 "일본총리의 공식사과" 가 더해진 결의안 초안을 보내왔다. 혼다 의원은 그 이튿날인 1월31일 오후에 동료의원 (공화당 의원 2명을 포함해서) 6명의 동의를 받아 공동으로 외교위에 상정을 했고 2월1일 오전 9시30분에 [ H. Res 121 ] 라는 110회기 결의안 공식번호를 받게 되었다.
110회기에서의 결의안 통과를 위해서는 전략이 필요했다. 작년에 무조건 덤벼들어 상임위는 넘어갈 수 있었지만 전체회의에서 일본의 로비벽에 무너지고 말았는데 만일에 조직적인 전략이 있었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었던 것이었다. 109회기 레임덕 세션까지 목을 매고 기대했다가 폐기된 결과를 놓고서 유권자센터는 철저하게 시나리오를 만들었다. 결론은 이 결의안이 일본과 한국과의 관계로 비추어지는 것을 철저하게 미국시민의 입장과 일본 로비스트와의 대결로 만들어서 미디어를 활용하면 전체회의에서도 일본의 로비와 싸워서 충분한 승산이 있다는 결론을 냈다. (사실, 이 전략은 워싱턴 DC의 지인으로부터 소개를 받은 외교위 전문위원을 오랫동안 지낸 사람의 힌트를 받은 것이다 ).
그것은 결의안을 발의하고 상정시켜 통과를 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복잡한 과정)인가와 대개의 의원들은 서로간 이익관계가 충돌하면 그냥 미루고 피해가는 습성이 많다는 것이었다. 만일에 일본정부와 한국정부가 미국 의회에서 싸우는 형국이 되면 이 결의안은 그냥 물 건너간다는 것이다. 우리는 워싱턴의 한국대사관이 이것을 갖고서 왜 전면에 나서기를 꺼리고 있는지 그제야 눈치를 챘고, 처음으로 한국외교관이 일본외교관을 앞서고 있음을 경험하게 되었다. 정말로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때부터 '일본군위안부결의안'의 미국의회 통과는 미주동포의 몫이라는 명백한 결론을 얻게 되었다.
워싱턴의 고위급 한국외교관이 그래서 작년 워싱턴 DC의 의회 뉴스레터인 <더 힐>(The Hill)'에 일본로비스트와 한인들의 풀뿌리정치력의 싸움이란 기사에 그렇게 고무적인 표시를 했던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와 유사한 결의안이 1997년부터 7회에 걸쳐서 시도를 했지만 번번히 무산된 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서 청문회를 생각하게 되었고 만일에 청문회를 추진한다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혼다측과 논의를 시작하려고 하는데에 우연한 일이 기적같이 발생했다. 1월3일자 <더 힐>에 게재된 기사가 팔레오마바엥가 아태소위원장 내정자를 비롯해서 외교위의 많은 의원들의 주목을 받았고, 아메리카 사모아지역구의 팔레오마바엥가 소위원장 내정자가 직접 혼다의원에게 전화를 걸어서 관심을 보인 것이었다. 또 탐 랜토스 외교위원장에게 전화로 아태소위에서 청문회를 개최할 의사가 있음을 이야기한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증인을 불러 올 수만 있다면 청문회가 가능해진 것이다.
우리는 무조건 혼다 측에 증언자를 워싱턴 DC로 불러오겠다고 장담했다. 워싱턴 정신대대책위원회의 서옥자교수가 한국정신대대책위를 통해서 이용수, 김군자 할머니를, 그리고 아시아 폴리시 포인트(Asia Policy Point)의 민디 코틀러씨를 통해서 네덜란드계 백인 피해자인 호주 거주의 얀 뤼프 오헤르너 할머니를 모셔오기로 확정해서 드디어 1월7일 오후6시에 청문회 개최를 공식화했고, 이어 통지가 나가게 되었다.
"연방하원 외교위원회 아시아태평양환경소위원회 주도로 레이번빌딩에서 2월15일 오후1시30분에 일본군위안부결의안인 H.Res 121 를 위한 청문회를 개최하기로 공식 발표를 하였다. 역사적인 청문회가 결정이 난 것이다. 청문회 개최는 일본의 역사 왜곡의 실상을 워싱턴 정치인들에게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결의안 통과에 획기적인 계기가 될 것이 고 역사적으로 한인들의 힘으로 최초로 연방하원 청문회를 밀어 부쳐 성사시키게 된 것이다. 워싱턴정신대대책위원회의 끈질긴 노력과 현역의원을 대상으로 뉴욕,뉴저지 일원 한인동포들의 집요한 청원운동의 노력의 결실이었다.
우리는 혼다 의원측과 청문회장에서 뉴욕일원 한인동포 4천여명의 결의안 지지서명 용지를 전달하기로 약속했다. 1시 정각에 미리 나와서 대기하고 있던 혼다 의원은 묵직한 서명용지 뭉치를 전달받으면서 불과 10여일 동안 어떻게 이러한 일을 했는지 대단히 고마워 하면서 따로 서명지 1부를 청문회를 주도하는 팔레오마바엥가 소위원장에게도 전달하면 좋겠다고 본인에게 귀뜀을 해 주었다.
1시30분, 증언석에는 마이크 혼다 의원과 피해자 할머니 세 분을 비롯한 민디 캐틀러 아시아 폴리스 포인트 소장과 서옥자 정신대대책위원회장이 착석을 했고 의원석엔 팔레오마바엥가 위원장을 비롯해서 의원 3명이 참석을 했다. 혼다의원의 결의안에 대한 의의와 취지 설명이 있었고 곧이어 위원장의 사회로 캘리포니아 46지역구 출신인 공화당의 도나 로라바허 의원의 일본 두둔 발언이 시작되었다. "일본은 이미 여러 차례 사과를 했고 이제는 더 이상 과거에 매여 있어서는 안된다"라는 발언에 청중석에선 한숨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로라바허 의원은 "1994년 이후 이 문제에 대해서 일본 총리가 이미 사과를 했고 사과는 물론 일본은 아시아여성기금을 통해서 보상도 했다, 그러니까 이제는 미래를 이야기해야 한다" 라는 일본정부의 대변인 같은 발언을 했다.
그러나 곧 이어 할머니들이 털어놓은 역사의 진실 앞에서 로라바허 의원의 발언 논리는 무참하게 깨어지고 말았다. 군 위안부 피해자인 세 할머니들의 과거 경험담과 그들의 한과 고통이 절절히 배인 절규에는 가슴에 응어리로 안고 살아온 비참한 고통이 생생하게 재현되고 있었고, 청중석에선 가느다란 탄식과 한숨소리가 터져나왔다. 심지어는 일본측 취재진들마저도 몸서리를 치며 몸을 움추렸다. 이용수 할머니는 "사냥당한 동물처럼 구석에서 웅쿠린채 기도할 시간을 간청했고, 내가 기도하는 시간에 일본군인은 옷을 벗었고 겁탈 당하는 동안 눈물이 시냇물처럼 흘렀습니다. 찢겨진 옷가지를 들고 목욕실로 달려가서 피가 터질 때까지 몸을 씻고 또 씻었습니다. 치욕이 물에 씻겨 가기를 바랬지만 밖에는 병사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옥같은 시간의 연속이었습니다"라고 아픈 기억을 증언을 통해 되살렸다.
오헤르너 할머니는 "일본군은 내 청춘을 무참하게 짓밟고 모든 것을 빼앗아 갔다. 일본은 잔학행위를 시인하고 역사를 똑바로 가르쳐라 "고 책상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80세의 김군자 할머니는 "16세에 끌려가서 저항하다가 무수하게 맞아서 고막이 터졌다. 죽지 않을 만큼 매를 맞아서 지금도 온몸에 상처투성이다. 하루에 40여명의 성노리개가 되어야 했고 수차례 자살을 시도했지만 죽지 못하고 이렇게 살아남았다. 내가 지금 어떻게 해야 사과를 받아낼 수 있겠는지 위원장은 말해 달라"라고 증언했다.
"20만 명이 넘는 피해자 가운데에 일본기금을 받은 사람은 왜서 2백83명에 불과한가..?"라는 위원장의 질문에 이용수 할머니는 손을 높이 치켜들고 발언을 신청해서 오히려 반대질문에 나섰다. 2백83명이란 숫자는 어떻게 어느 곳에서 받은 숫자인가? 집요하게 따져서 일본측으로부터 나온 통계임을 밝히게 했다.
이용수 할머니는 일본측 입장의 발언을 한 뒤 이미 자리를 떴던 공화당의 로라바허 의원의 발언에 대하여 "사과가 무엇인가? 범죄자가 사과를 한다면 피해자에게 해야지, 내가 피해자인데 나는 지금까지 어떠한 사과도 받아본 적이 없다. 사과를 왜 워싱턴의 로라바허 의원에게 하는가?" 라고 따졌고 이 발언에 탄복한 위원장이 "변호사 출신이 아닌가?"라고 반문하자, 이용수 할머니는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숨겨진 이러한 잔악성을 폭로하고 국제법에 고발하려고 늙은 사람이 한국의 대구에 있는 경북대학교 법대에 입학해서 국제법을 배웠다"고 토로해서 청문회장을 숙연케 했다.
할머니들이 청문회장에서 의원들이 자리를 뜬 것에 의아해 하는 것을 보고, 혼다의원은 보통 의원들이 일정이 바빠서 이렇게 하며, 청문회 발언은 모두 기록되고 녹음되어 의원들이 청취를 하고 지금 보좌관들이 참석해서 메모를 하고 있으니 기탄 없이 발언하라고 격려하기도 했다.
그런데 청문회에 참석한 의원 한 사람이 필자에게 낯이 퍽 익은 사람이었다. 곰곰이 생각하니 지난번 뉴저지 저지시티, 유니온 카운티의 13지역구의 밥 메넨데스 후임에 의원직을 물려받은 알비오 사이레스 의원이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듯이 행운이었다. 초선의원이 외교위원회에 들어 왔다는 것은, 그것도 아태소위원회에 배정된 것은 분명히 이것은 이 결의안을 위한 행운이라는 것말고는 해석할 방도가 없는 것이다.
필자는 즉시 뉴욕의 사무실로 전화를 했고 그곳에서 워싱턴 사무실로 접촉을 시도, 이튿날 11시에 의원을 직접 만나는 약속을 했다. 의원 한사람을 확고하게 확보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워싱턴의 작동방식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두 번의 설명이 필요 없는 일이다. 청문회는 3시간을 넘기고 있었고 시간은 5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필자는 내내 뉴욕동포 4천여명의 지지 서명용지를 위원장에게 전달할 궁리를 하고 있었다. 고민 끝에 청문회가 끝나면 무조건 단상으로 돌진할 결심을 했다. 필자는 청문회가 끝나기가 무섭게 앞으로 뛰어나가서 위원장에게 내용을 이야기했고, 팔레오마바엥가 위원장은 서명지 뭉치를 전달 받으면서 자기도 결의안 통과를 위해서 최대한 노력을 하겠다고 약속을 했다.
16일 아침에 필자는 롱워스하우스빌딩 1024호를 방문했다. 알비오 사이레스 의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히려 그가 더 반가워했다. 121 결의안에 대해서 아직 잘은 모른다고 했다. 우리는 열심히 설명했고 4천여명의 서명용지를 전달했다. 지역유권자들이 이렇게 많이 요청을 하는데 자기가 즉시 동의하고 주변 의원들도 설득해 주겠다고 먼저 약속을 해 주었다.
청문회까지는 우리의 전략인 '시민과 로비스트의 싸움'이 잘 유지되었다. 일본은 총리실의 공보비서실이 이 결의안 저지를 위해서 워싱턴에 옮겨왔을 정도로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일본 대사가 이것에 집중해서 의원들을 상대로 로비를 펼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본 기업들까지 나서서 로비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확인된 일본 로비스트들과 함게 일본 도쿄의 자민당 의원들이 워싱턴을 드나들고 있다. 우리가 하원전체회의 상정을 예상하는 5월엔 일본의 로비를 위해 아베 신조 총리가 방미를 예정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한국측이 철저하게 지켜야 할 것은 여의도가 술렁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워싱턴을 향한 일본 정치권의 호들갑은 그 목표가 분명히 한국정치권을 유도하는 전략의 일환이다. 워싱턴서 일본과 한국의 대결을 만드는 것이 일본 로비스트의 전략이다. 다행히 청문회 당일 워싱턴을 방문한 한국의 고위정치인인 박근혜씨 일행이 정말로 고맙게 조용히 지내주었다. 유권자센타의 전략은 미국시민과 일본 로비스트와의 싸움을 유지하는 일이다. 어떠한 로비스트나 외교관의 힘도 공개적인 정치대결에서 납세자인 유권자의 결집된 힘을 이길 수 있는 방도는 없다.
이제 아시아태평양환경소위원회에서 논의 표결을 해야 하고 외교위원회를 거쳐 전체회의를 통과해야 한다. 또 미주 전 지역의 한인동포들이 자기 지역 의원들에게 결의안 121에 동의를 해줄 것을 적극적으로 요청해야 한다. 결의안에 노골적으로 반대를 하는 로라바허 의원 지역은 LA의 한인밀집지역이다. 그 지역의 한인들이 무관심하면 그는 더 노골적으로 반대를 할 것이고 지역구 한인들이 그를 찾아가서 설득하고 요청하면 그는 반대나 부정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지난 10여년동안 뉴욕의 경험에서 터득한 철칙이다.
다만 현재 우려되는 것은 17일 현재 이 결의안에 동의한 의원은 민주당의원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이다. 결의안이 한 정당에 치우치면 당파적인 이슈로 인식되기 쉽고 그렇게 되면 양당 간 주고받는 거래 아젠다로 가게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위험천만의 일이다. 미국 연방하원에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까지 증인으로 초청해서 청문회까지 개최하자, 일본정부는 잔뜩 긴장하고 있다. 4월 아베 총리의 미국방문을 계획하고 이미 홍보담당 보좌관을 워싱턴에 파견해 놓은 상태이다. 이번 청문회에 관해서 일본 정부는 공식 논평은 피하고 있지만 워싱턴 대형 로펌인 호건 앤드하트슨 헥트스펜서의 값비싼 로비스트를 내세워서 현재 마이클 폴리의 주도하에 4명의 풀타임 로비스트가 이를 저지하기 위한 로비에 열을 올리고 있다.
유권자센터는 미주동포의 결집된 정치력으로 연방의회에서 청문회를 개최하는 역사적인 사건을 만들었다. 동포들의 의지가 일을 해냈다. 물론 지난 10여 년 동안 워싱턴정신대대책위원회의 끈질긴 노력과 한국대사관 내 담당외교관의 전략적 처신이 잘 결합된 것이 주효했다. 서울서 오신 증언자의 비용은 서울 정신대대책위원회에서, 그리고 본인들이 부담을 했고 호주에서 증인을 모시는 일은 뉴욕의 동포 독지가가 적잖은 비용을 기꺼이 내 주셨다.
미 의회의 결의안에는 아태소위의 표결과 통과 그리고 외교위원회 상정 통과, 전체 본회의의 통과라는 순서가 있다. 그러나 청문회의 내용이 외교위원회의 기록으로 의회 역사에 기록될 것이고 동시에 미디어를 통해서 전체 의원들에게 설득력을 갖게 될 것이다. 또한 이번 결의안 재상정에서 청문회 까지는 미주동포의 정치력으로 워싱턴을 움직이는 최초의 성과라는 것에 큰 의미가 있고 이후 미주동포의 정치력 신장운동에 탄력이 생길 것으로 기대된다.
필자
김동석 미 뉴욕.뉴저지 한인유권자센터 소장 겸 본지 편집위원은 1985년 미국으로 건너간 뒤 한인들의 정치 참여를 통한 권리 찾기와 한인들의 정치적 위상 높이기를 목표로 93년 뉴욕 등 미 동부 대도시에 ‘한인유권자센터’를 만들어 15년째 활동해온 대표적인 정치 비정부기구(NGO) 운동가다.
한인들의 정치력을 높여온 김 소장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93년 당시 7%에 불과하던 한인들의 평균 투표율은 2004년 25%로 뛰어올랐고, 미국의 상원과 하원의원들이 한국어 정치광고를 할 정도로 한국의 위상을 높임에 따라 워싱턴 정가에서 미국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대표적인 한국인 출신 시민운동가로 꼽히고 있다.
이틀전 호주에서 워싱턴으로 오는 길의 중간기착지인 샌프란시스코에서의 비행기 결항으로 잠시 행방이 묘연했던 것을 혹시나 어떤 방해가 아닌가..? 그래서 오헤르너 할머니를 찾으러 버클리대학 한국학생들이 총출동했던 소동이 있었기 때문에 얼마나 반가웠었는지 몰랐다. 이미 캘리포니아를 돌면서 증언을 하시고 워싱턴에 와 계신 김군자 할머니는 그쪽의 관계자들과 함께 청문회장에서 만나기로 했다고 한다. 청문회를 기획하고 가장 큰 걱정이 연로하신 증언자들을 무사히 워싱턴 DC로 오시도록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일단 안심이 되었다.
작년 의회 109회기 국제관계위에 기습적인 상정과 만장일치 통과를 했음에도 전체회의에 붙여지지 못한 아쉬움이 있지만 이를 계기로 우리는 어렴풋하게나마 워싱턴 DC의 작동방식을 알게 되었다. 외교위원회내의 분위기를 우선 잘 파악해야 한다는 것과 상임위에선 회기 초반에 상정.통과를 시켜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따라서 작년 중간선거 직후에 분명히 혼다의원이 들고 나와야 하고 공화당 중진급 이상이 공동으로 발의해 주어야 된다는 것에 주목했다.
선거결과 다수당이 바뀌었고 하원에 신인이 대거 진출해서 새롭게 외교위에, 특히 동아태 소위에 포진되는 의원들을 파악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110회기 연방의원 전원에게 당선축하 카드와 편지를 일제히 발송했고 특히 작년 이 결의안에 협조하고 동의해준 의원들에겐 3회에 걸쳐서 유권자센터 이름으로 또 다시 협력해 줄 것을 간곡하게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우리의 이러한 노력에 혼다측 사무실서 반응이 왔다. 새 회기 시작전인 12월이었다.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혼다측에선 외교위원회내 공화당 거물인 크리스토퍼 스미스 의원을 설득해 줄 것을 요청했고 다행히 스미스 의원의 지역구가 한인세탁업자들의 밀집지역이라 일에 속도가 붙었다. 1월4일 회기가 시작되니 상임위 배정과 양당의 의원 워크숍, 보좌관 배정...등 너무나 바쁜 와중이라 대답이 느렸다. 정말로 초조했다.
그렇게 지역구를 통해서 재촉한지 꼭 3주만인 1월30일 화요일 정오를 지나서 " 스미스의원이 공동발의에 동의해 주겠다는 답신을 보내라고 했습니다" 라는 내용의 스미스의원 보좌관으로부터 얌전한 이메일을 받았다. 난방비를 걱정해서 썰렁하기만 했던 유권자센타의 뉴욕시 후미진 사무실에 환호성이 터졌다. 즉시 상임위에 상정을 할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우린 이것을 혼다 의원 측에 알렸고(혼다사무실서도 이미 통보를 받아서 결의안 초안을 최종 점검하고 있었다.), 혼다 의원측은 작년 759법안보다 한층 강화된 "일본총리의 공식사과" 가 더해진 결의안 초안을 보내왔다. 혼다 의원은 그 이튿날인 1월31일 오후에 동료의원 (공화당 의원 2명을 포함해서) 6명의 동의를 받아 공동으로 외교위에 상정을 했고 2월1일 오전 9시30분에 [ H. Res 121 ] 라는 110회기 결의안 공식번호를 받게 되었다.
110회기에서의 결의안 통과를 위해서는 전략이 필요했다. 작년에 무조건 덤벼들어 상임위는 넘어갈 수 있었지만 전체회의에서 일본의 로비벽에 무너지고 말았는데 만일에 조직적인 전략이 있었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었던 것이었다. 109회기 레임덕 세션까지 목을 매고 기대했다가 폐기된 결과를 놓고서 유권자센터는 철저하게 시나리오를 만들었다. 결론은 이 결의안이 일본과 한국과의 관계로 비추어지는 것을 철저하게 미국시민의 입장과 일본 로비스트와의 대결로 만들어서 미디어를 활용하면 전체회의에서도 일본의 로비와 싸워서 충분한 승산이 있다는 결론을 냈다. (사실, 이 전략은 워싱턴 DC의 지인으로부터 소개를 받은 외교위 전문위원을 오랫동안 지낸 사람의 힌트를 받은 것이다 ).
그것은 결의안을 발의하고 상정시켜 통과를 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복잡한 과정)인가와 대개의 의원들은 서로간 이익관계가 충돌하면 그냥 미루고 피해가는 습성이 많다는 것이었다. 만일에 일본정부와 한국정부가 미국 의회에서 싸우는 형국이 되면 이 결의안은 그냥 물 건너간다는 것이다. 우리는 워싱턴의 한국대사관이 이것을 갖고서 왜 전면에 나서기를 꺼리고 있는지 그제야 눈치를 챘고, 처음으로 한국외교관이 일본외교관을 앞서고 있음을 경험하게 되었다. 정말로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때부터 '일본군위안부결의안'의 미국의회 통과는 미주동포의 몫이라는 명백한 결론을 얻게 되었다.
워싱턴의 고위급 한국외교관이 그래서 작년 워싱턴 DC의 의회 뉴스레터인 <더 힐>(The Hill)'에 일본로비스트와 한인들의 풀뿌리정치력의 싸움이란 기사에 그렇게 고무적인 표시를 했던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와 유사한 결의안이 1997년부터 7회에 걸쳐서 시도를 했지만 번번히 무산된 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서 청문회를 생각하게 되었고 만일에 청문회를 추진한다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혼다측과 논의를 시작하려고 하는데에 우연한 일이 기적같이 발생했다. 1월3일자 <더 힐>에 게재된 기사가 팔레오마바엥가 아태소위원장 내정자를 비롯해서 외교위의 많은 의원들의 주목을 받았고, 아메리카 사모아지역구의 팔레오마바엥가 소위원장 내정자가 직접 혼다의원에게 전화를 걸어서 관심을 보인 것이었다. 또 탐 랜토스 외교위원장에게 전화로 아태소위에서 청문회를 개최할 의사가 있음을 이야기한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증인을 불러 올 수만 있다면 청문회가 가능해진 것이다.
우리는 무조건 혼다 측에 증언자를 워싱턴 DC로 불러오겠다고 장담했다. 워싱턴 정신대대책위원회의 서옥자교수가 한국정신대대책위를 통해서 이용수, 김군자 할머니를, 그리고 아시아 폴리시 포인트(Asia Policy Point)의 민디 코틀러씨를 통해서 네덜란드계 백인 피해자인 호주 거주의 얀 뤼프 오헤르너 할머니를 모셔오기로 확정해서 드디어 1월7일 오후6시에 청문회 개최를 공식화했고, 이어 통지가 나가게 되었다.
"연방하원 외교위원회 아시아태평양환경소위원회 주도로 레이번빌딩에서 2월15일 오후1시30분에 일본군위안부결의안인 H.Res 121 를 위한 청문회를 개최하기로 공식 발표를 하였다. 역사적인 청문회가 결정이 난 것이다. 청문회 개최는 일본의 역사 왜곡의 실상을 워싱턴 정치인들에게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결의안 통과에 획기적인 계기가 될 것이 고 역사적으로 한인들의 힘으로 최초로 연방하원 청문회를 밀어 부쳐 성사시키게 된 것이다. 워싱턴정신대대책위원회의 끈질긴 노력과 현역의원을 대상으로 뉴욕,뉴저지 일원 한인동포들의 집요한 청원운동의 노력의 결실이었다.
우리는 혼다 의원측과 청문회장에서 뉴욕일원 한인동포 4천여명의 결의안 지지서명 용지를 전달하기로 약속했다. 1시 정각에 미리 나와서 대기하고 있던 혼다 의원은 묵직한 서명용지 뭉치를 전달받으면서 불과 10여일 동안 어떻게 이러한 일을 했는지 대단히 고마워 하면서 따로 서명지 1부를 청문회를 주도하는 팔레오마바엥가 소위원장에게도 전달하면 좋겠다고 본인에게 귀뜀을 해 주었다.
1시30분, 증언석에는 마이크 혼다 의원과 피해자 할머니 세 분을 비롯한 민디 캐틀러 아시아 폴리스 포인트 소장과 서옥자 정신대대책위원회장이 착석을 했고 의원석엔 팔레오마바엥가 위원장을 비롯해서 의원 3명이 참석을 했다. 혼다의원의 결의안에 대한 의의와 취지 설명이 있었고 곧이어 위원장의 사회로 캘리포니아 46지역구 출신인 공화당의 도나 로라바허 의원의 일본 두둔 발언이 시작되었다. "일본은 이미 여러 차례 사과를 했고 이제는 더 이상 과거에 매여 있어서는 안된다"라는 발언에 청중석에선 한숨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로라바허 의원은 "1994년 이후 이 문제에 대해서 일본 총리가 이미 사과를 했고 사과는 물론 일본은 아시아여성기금을 통해서 보상도 했다, 그러니까 이제는 미래를 이야기해야 한다" 라는 일본정부의 대변인 같은 발언을 했다.
그러나 곧 이어 할머니들이 털어놓은 역사의 진실 앞에서 로라바허 의원의 발언 논리는 무참하게 깨어지고 말았다. 군 위안부 피해자인 세 할머니들의 과거 경험담과 그들의 한과 고통이 절절히 배인 절규에는 가슴에 응어리로 안고 살아온 비참한 고통이 생생하게 재현되고 있었고, 청중석에선 가느다란 탄식과 한숨소리가 터져나왔다. 심지어는 일본측 취재진들마저도 몸서리를 치며 몸을 움추렸다. 이용수 할머니는 "사냥당한 동물처럼 구석에서 웅쿠린채 기도할 시간을 간청했고, 내가 기도하는 시간에 일본군인은 옷을 벗었고 겁탈 당하는 동안 눈물이 시냇물처럼 흘렀습니다. 찢겨진 옷가지를 들고 목욕실로 달려가서 피가 터질 때까지 몸을 씻고 또 씻었습니다. 치욕이 물에 씻겨 가기를 바랬지만 밖에는 병사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옥같은 시간의 연속이었습니다"라고 아픈 기억을 증언을 통해 되살렸다.
오헤르너 할머니는 "일본군은 내 청춘을 무참하게 짓밟고 모든 것을 빼앗아 갔다. 일본은 잔학행위를 시인하고 역사를 똑바로 가르쳐라 "고 책상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80세의 김군자 할머니는 "16세에 끌려가서 저항하다가 무수하게 맞아서 고막이 터졌다. 죽지 않을 만큼 매를 맞아서 지금도 온몸에 상처투성이다. 하루에 40여명의 성노리개가 되어야 했고 수차례 자살을 시도했지만 죽지 못하고 이렇게 살아남았다. 내가 지금 어떻게 해야 사과를 받아낼 수 있겠는지 위원장은 말해 달라"라고 증언했다.
"20만 명이 넘는 피해자 가운데에 일본기금을 받은 사람은 왜서 2백83명에 불과한가..?"라는 위원장의 질문에 이용수 할머니는 손을 높이 치켜들고 발언을 신청해서 오히려 반대질문에 나섰다. 2백83명이란 숫자는 어떻게 어느 곳에서 받은 숫자인가? 집요하게 따져서 일본측으로부터 나온 통계임을 밝히게 했다.
이용수 할머니는 일본측 입장의 발언을 한 뒤 이미 자리를 떴던 공화당의 로라바허 의원의 발언에 대하여 "사과가 무엇인가? 범죄자가 사과를 한다면 피해자에게 해야지, 내가 피해자인데 나는 지금까지 어떠한 사과도 받아본 적이 없다. 사과를 왜 워싱턴의 로라바허 의원에게 하는가?" 라고 따졌고 이 발언에 탄복한 위원장이 "변호사 출신이 아닌가?"라고 반문하자, 이용수 할머니는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숨겨진 이러한 잔악성을 폭로하고 국제법에 고발하려고 늙은 사람이 한국의 대구에 있는 경북대학교 법대에 입학해서 국제법을 배웠다"고 토로해서 청문회장을 숙연케 했다.
할머니들이 청문회장에서 의원들이 자리를 뜬 것에 의아해 하는 것을 보고, 혼다의원은 보통 의원들이 일정이 바빠서 이렇게 하며, 청문회 발언은 모두 기록되고 녹음되어 의원들이 청취를 하고 지금 보좌관들이 참석해서 메모를 하고 있으니 기탄 없이 발언하라고 격려하기도 했다.
그런데 청문회에 참석한 의원 한 사람이 필자에게 낯이 퍽 익은 사람이었다. 곰곰이 생각하니 지난번 뉴저지 저지시티, 유니온 카운티의 13지역구의 밥 메넨데스 후임에 의원직을 물려받은 알비오 사이레스 의원이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듯이 행운이었다. 초선의원이 외교위원회에 들어 왔다는 것은, 그것도 아태소위원회에 배정된 것은 분명히 이것은 이 결의안을 위한 행운이라는 것말고는 해석할 방도가 없는 것이다.
필자는 즉시 뉴욕의 사무실로 전화를 했고 그곳에서 워싱턴 사무실로 접촉을 시도, 이튿날 11시에 의원을 직접 만나는 약속을 했다. 의원 한사람을 확고하게 확보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워싱턴의 작동방식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두 번의 설명이 필요 없는 일이다. 청문회는 3시간을 넘기고 있었고 시간은 5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필자는 내내 뉴욕동포 4천여명의 지지 서명용지를 위원장에게 전달할 궁리를 하고 있었다. 고민 끝에 청문회가 끝나면 무조건 단상으로 돌진할 결심을 했다. 필자는 청문회가 끝나기가 무섭게 앞으로 뛰어나가서 위원장에게 내용을 이야기했고, 팔레오마바엥가 위원장은 서명지 뭉치를 전달 받으면서 자기도 결의안 통과를 위해서 최대한 노력을 하겠다고 약속을 했다.
16일 아침에 필자는 롱워스하우스빌딩 1024호를 방문했다. 알비오 사이레스 의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히려 그가 더 반가워했다. 121 결의안에 대해서 아직 잘은 모른다고 했다. 우리는 열심히 설명했고 4천여명의 서명용지를 전달했다. 지역유권자들이 이렇게 많이 요청을 하는데 자기가 즉시 동의하고 주변 의원들도 설득해 주겠다고 먼저 약속을 해 주었다.
청문회까지는 우리의 전략인 '시민과 로비스트의 싸움'이 잘 유지되었다. 일본은 총리실의 공보비서실이 이 결의안 저지를 위해서 워싱턴에 옮겨왔을 정도로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일본 대사가 이것에 집중해서 의원들을 상대로 로비를 펼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본 기업들까지 나서서 로비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확인된 일본 로비스트들과 함게 일본 도쿄의 자민당 의원들이 워싱턴을 드나들고 있다. 우리가 하원전체회의 상정을 예상하는 5월엔 일본의 로비를 위해 아베 신조 총리가 방미를 예정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한국측이 철저하게 지켜야 할 것은 여의도가 술렁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워싱턴을 향한 일본 정치권의 호들갑은 그 목표가 분명히 한국정치권을 유도하는 전략의 일환이다. 워싱턴서 일본과 한국의 대결을 만드는 것이 일본 로비스트의 전략이다. 다행히 청문회 당일 워싱턴을 방문한 한국의 고위정치인인 박근혜씨 일행이 정말로 고맙게 조용히 지내주었다. 유권자센타의 전략은 미국시민과 일본 로비스트와의 싸움을 유지하는 일이다. 어떠한 로비스트나 외교관의 힘도 공개적인 정치대결에서 납세자인 유권자의 결집된 힘을 이길 수 있는 방도는 없다.
이제 아시아태평양환경소위원회에서 논의 표결을 해야 하고 외교위원회를 거쳐 전체회의를 통과해야 한다. 또 미주 전 지역의 한인동포들이 자기 지역 의원들에게 결의안 121에 동의를 해줄 것을 적극적으로 요청해야 한다. 결의안에 노골적으로 반대를 하는 로라바허 의원 지역은 LA의 한인밀집지역이다. 그 지역의 한인들이 무관심하면 그는 더 노골적으로 반대를 할 것이고 지역구 한인들이 그를 찾아가서 설득하고 요청하면 그는 반대나 부정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지난 10여년동안 뉴욕의 경험에서 터득한 철칙이다.
다만 현재 우려되는 것은 17일 현재 이 결의안에 동의한 의원은 민주당의원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이다. 결의안이 한 정당에 치우치면 당파적인 이슈로 인식되기 쉽고 그렇게 되면 양당 간 주고받는 거래 아젠다로 가게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위험천만의 일이다. 미국 연방하원에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까지 증인으로 초청해서 청문회까지 개최하자, 일본정부는 잔뜩 긴장하고 있다. 4월 아베 총리의 미국방문을 계획하고 이미 홍보담당 보좌관을 워싱턴에 파견해 놓은 상태이다. 이번 청문회에 관해서 일본 정부는 공식 논평은 피하고 있지만 워싱턴 대형 로펌인 호건 앤드하트슨 헥트스펜서의 값비싼 로비스트를 내세워서 현재 마이클 폴리의 주도하에 4명의 풀타임 로비스트가 이를 저지하기 위한 로비에 열을 올리고 있다.
유권자센터는 미주동포의 결집된 정치력으로 연방의회에서 청문회를 개최하는 역사적인 사건을 만들었다. 동포들의 의지가 일을 해냈다. 물론 지난 10여 년 동안 워싱턴정신대대책위원회의 끈질긴 노력과 한국대사관 내 담당외교관의 전략적 처신이 잘 결합된 것이 주효했다. 서울서 오신 증언자의 비용은 서울 정신대대책위원회에서, 그리고 본인들이 부담을 했고 호주에서 증인을 모시는 일은 뉴욕의 동포 독지가가 적잖은 비용을 기꺼이 내 주셨다.
미 의회의 결의안에는 아태소위의 표결과 통과 그리고 외교위원회 상정 통과, 전체 본회의의 통과라는 순서가 있다. 그러나 청문회의 내용이 외교위원회의 기록으로 의회 역사에 기록될 것이고 동시에 미디어를 통해서 전체 의원들에게 설득력을 갖게 될 것이다. 또한 이번 결의안 재상정에서 청문회 까지는 미주동포의 정치력으로 워싱턴을 움직이는 최초의 성과라는 것에 큰 의미가 있고 이후 미주동포의 정치력 신장운동에 탄력이 생길 것으로 기대된다.
필자
김동석 미 뉴욕.뉴저지 한인유권자센터 소장 겸 본지 편집위원은 1985년 미국으로 건너간 뒤 한인들의 정치 참여를 통한 권리 찾기와 한인들의 정치적 위상 높이기를 목표로 93년 뉴욕 등 미 동부 대도시에 ‘한인유권자센터’를 만들어 15년째 활동해온 대표적인 정치 비정부기구(NGO) 운동가다.
한인들의 정치력을 높여온 김 소장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93년 당시 7%에 불과하던 한인들의 평균 투표율은 2004년 25%로 뛰어올랐고, 미국의 상원과 하원의원들이 한국어 정치광고를 할 정도로 한국의 위상을 높임에 따라 워싱턴 정가에서 미국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대표적인 한국인 출신 시민운동가로 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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