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야를 말하는 '대한민국 대통령' 노무현
<기고> 국민을 향한 반란,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배반
민주적 당내 경선을 통해 정당의 대통령 후보가 된 사람이며, 민주적이고 절차적인 선거를 통해 16대 대한민국 대통령이 된 사람이다. 우리나라 헌정사상 역대 대통령들 가운데 그 만큼 형식적, 절차적 과정을 거쳐 민주적 정통성을 확보한 채 대통령에 당선된 인물은 없을 것이다. 이는 분명 지난 50년 동안 유지해 왔던 우리의 대통령제 민주주의 역사가 진보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한국정치의 발전 또한 지속가능한 상황으로 진화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한국의 대통령제 민주주의는 새로운 시련을 맞게 되었다. 그것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의 무능과 외부의 요구가 아니라 대통령 스스로가 능력의 함량미달로 더 이상 대통령직 수행이 힘들다는 고백을 함으로써 빚어질 수 있는 통치불능상태가 초래될 가능성 때문이다.
대통령이란 자리가 대통령 개인이 하고 싶다고 해서 유지되고, 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버릴 수 있는 자리인가?
분단의 삶의 현장에 서 있는 대한민국 대통령은 4천 8백만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야 하는 군 최고 통수권자이다. 그리고 의회의 관점과 정치인의 시각에서 본다면 협상의 최고 책임자이다. 여기에 4대강대국에 둘러 싸여 있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입장에서 본다면 대통령은 제1의 대사이자 최고의 외교관이어야 한다. 그리고 요즘처럼 어려운 우리나라의 경제현실을 감안한다면 경제의 관리자란 직책까지 떠안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고도 대통령의 지위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대통령은 자신이 소속한 정당의 최고 지도자이기도 하다. 우리는 본인만이 아니라 당과 당원 그리고 선거 후보들을 위해 좋은 정책을 만들어 달라는 요구를 하며 국정을 잘 이끌어 달라고 끊임없이 재촉한다. 그리고 우리는 국정운영에 필요한 예산과 정책 실행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대통령이 의회 지도자들, 의원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 나가길 바란다.
내가 생각하는 대통령이란 자리와 기능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대통령은 그 나라의 국목(國牧)이란 생각을 갖고 있다. 그는 국가의 위기나 재앙의 희생자들을 달래고 격려하며 돌봐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국가와 국민을 대표하는 대통령은 우리나라를 찾아오는 무수한 외국관료나 친구 그리고 방문객들에게는 나라의 집주인 노릇도 해야 한다. 물론 대통령은 행정부의 수반이기 때문에 정부 부처나 정부 기관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에 대해서도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하고, 이런 모든 공적 의무의 이행자와 책임자의 역할이 끝나가는 지점에서 비로소 한 가정의 남편이자 아이들의 아버지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대통령직에 대한 정의다. 나의 이런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아가 대통령이 될 경우 감수해야 할 당연적 일상사가 있다면, 그것은 정치적 공격의 첫 번째, 그리고 영원한 타깃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지난 4년 동안 노무현 대통령은 과연 얼마나 대통령직에 충실했을까?
많은 의문이 남는다. 28일 노무현 대통령은 청와대 국무회의장에서 “다만 임기를 다 마치지 않은 첫 번째 대통령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라는 발언을 했다. 하야 가능성을 시사한 발언이다. 이 발언은 "대통령직 못해 먹겠다"(2003년 5월), "재신임 묻겠다"(2003년 10월), "권력을 통째로 내놓겠다"(2005년 8월)라는 발언에 이어 벌써 네번째에 해당하는 '국민을 향한 도발적 반란'이다. 무엇 때문에 그런 발언을 했는지 매우 궁금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왜 자신이 이런 발언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심회도 간접적으로 드러내 보여 줬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 지명한 헌법재판소장 후보에 대해 국회가 표결 거부로 인준을 해 주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과 불평이었다. 의회의 표결 거부 행위를 불법적인 횡포라 표현하기도 했다.
미안하지만 이런 노대통령의 발언을 보면서, 노대통령은 아직도 대통령직이 어떤 자리인지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임기가 1년 3개월도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대통령직을 버리고 하야 할 수도 있다?
이는 국민과 국가를 내 팽개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대통령의 자리란 로버트 라이시의 지적처럼 더 이상 '국가의 일'이 아니라 사적 지위로 전락되는 순간이다. 우리는 지금 이런 대통령에게 나라를 맡겨놓고 있다. 그러면서 이런 나라가 정상적으로 작동되길 바라고 또 바래왔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지고 있다. 이는 노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율이 9%대로 하향직하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대통령의 발언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그의 발언 내용을 관찰해 보면, 매우 치밀하게 준비된 고도의 게임언술적 성격을 담고 있음을 금세 알 수 있다. 그리고 참으로 많은 고민을 통해 나름의 정제된 말을 하겠다는 결심 끝에 이런 발언이 나왔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노대통령의 발언이 겨냥하고 있는 타깃과 목표지점도 매우 선명하게 드러난다. 자신을 지지해 왔던 세력들에겐 “동정과 분노”를, 자신의 반대자들에게는 “환멸과 무관심”으로 더 이상 노대통령이 수행하는 국정에 관심과 간섭을 포기토록 하는 의도가 깊게 배어 있음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다. 자신의 지지자들은 적대감으로 응집시키고, 반대자들에겐 체념을 유도하고 있는 그의 이중적 발언은 지금 대한민국을 난폭한 3류 국가로 만들고 있고, 우리 국민을 혼란의 수렁으로 빠지게 하고 있다. 아니, 대한민국을 버려진 늪지대와 같은 '무정부 국가'로 만들어 가고 있고, 국민을 '무국적 사생아'로 내몰고 있다. 물론 자신을 파멸의 터널로 진입시키고 있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 나라 최고 통치권자인 대통령이란 존재가 중소기업을 관리하고 있는 '외곽 경비원' 보다 미약한 존재로 느껴진 것은 비단 필자만의 생각일까?
자신의 인사권을 의회가 견제하고 표결 거부를 한다고 해서 이를 위헌적 행위로 규정하고 의회의 횡포로 규정한 노대통령의 발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혹시 이 나라가 삼권분립의 정신에 입각한 권력분립의 나라가 아니라, '노무현 전체주의' 혹은 '노무현식 자유방임주의 국가'인 것으로 착각해 온 것은 아닐까?
의회와 반대 언론들의 횡포 때문에 대통령직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는 상황을 맞을 수도 있다는 이 헌정 위기적 발언이, 북한 핵실험과 급등하는 부동산 값에 요동치는 성난 민심을 앞에 두고 과연 이 나라 대통령으로서 할 소리인가?
또 한번의 코리안 드림을 이끌어 나가야 할 이 나라 지도자가 할 수 있는 발언인가?
일국의 지도자가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채 얼떨결에 대통령직에 오르게 되면, 얼마나 많은 국민피해와 국력 손실이 초래 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또 한번의 쓰라린 교훈을 우리 국민은 오늘의 역사에서 목도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야당도 침몰하는 대한민국을 어떻게 구제해야 한다는 대안을 갖고 있지 못하다.
시간만 기다렸다가 다음번에 정권만 되찾아 오면 된다는 생각으로 시계추만 쳐다보고 있는 것이 국민의 시름을 더욱 깊게 만든다. 대한민국호가 침몰해 가는 이 순간에도 팔짱을 끼고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이다. 과연 그런 정당이 다음번 대한민국을 책임질 수 있을까? 그런 정당에게 우리는 또 다시 국가의 운명을 맡겨야 하는가?
지금 대한민국 정치인들은 여야를 떠나 사실상 헌정위기가 초래되고 있다는 현실 앞에 이 난국을 어떻게 타개해 나갈 것인가에 생각을 집중해야 한다. 대통령의 통치 불능상태로 인해 헌정중단위기를 맞게 될 경우, 이런 국가적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여 대한민국을 안정적으로 이끌어 나갈 것인가에 대한 액션 플랜을 준비해 나가야 한다.
헌정 중단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4가지 액션 플랜이 있다.
첫째, 여야 정치지도자들은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즉각 정치회합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대통령의 발언을 토대로 진정 대통령이 국정운영을 이끌어 나갈 의지와 열정이 결여 되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노무현 대통령을 만나 직접 확인해야 한다. 그래서 대통령이 더 이상 국정운영을 할 수 없는 것으로 확인될 경우엔, 대통령을 제외한 모든 정파들이 중심이 되어 객관적이고 중립적이며 능력 있는 인사들을 각 당에서 충원하여 거국 중립내각을 구성해야 한다. 그래서 국정의 안정과 국민 불안을 달래는 작업에 즉각 착수해야 한다. 여야 책임있는 정당들이 이를 외면만 한다면 이는 곧 국력 소진과 국정파행을 보고서도 자신들의 정치적 실리만 추구하는 집단으로 이해 될 수 밖에 없다. 나침반 없이 더 큰 위기의 바다로 항해하는 대한민국호가 점점 가라 앉고 있는 현실로부터 눈을 돌리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둘째, 여야 정치지도자들은 노무현 대통령이 자신이 제안한 정치 협상회의가 거절당하자 여야 영수들을 정치협상회의로 다시 끌어 들이기 위한 일종의 유인요소로 대통령직을 그만 둘 수도 있다는 뉘앙스의 발언을 한 것에 매우 주의해야 한다. 대통령이 거국 중립 내각 구성에 찬성하면서도 조건을 내세울 경우 이를 배제시키면서 대신 현행 대통령제가 안고 있는 한계점, 즉 대통령의 통치불능상태로 헌정중단 혹은 위기 상황이 발생했을 경우 대통령과 꼭같은 권한을 갖고 대통령직을 수행해 나갈 수 있는 제도적 장치마련에 여야가 머리를 맞대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의 현행 대통령 단임제를 정, 부통령 중임제로 전환시킬 필요가 있다고 본다.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퇴임하자 포드는 닉슨보다 안정적으로 대통령직을 유지한 선례를 남겼다.
셋째, 대통령직이 통치 불능상태에 빠지고 대통령이 통제 불능상태에 빠질 경우, 언제든지 비상시 조기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여 국정공백을 메울 수 있는 법과 제도를 정비해 나가야 한다. 지금의 제도는 비용과 절차적인 측면에서 비효율성이 매우 크다.
넷째, 국민소환제를 실시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국민의,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직접민주주의 작동원리를 강화시켜 나가기 위해서도 진지하게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노무현 대통령은 하야를 생각할 시간이 있으면 최소한 자신이 하야했을 경우 생길 수 있는 헌정위기로부터 국가와 국민을 어떻게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최소한의 장치라도 먼저 마련해 놓은 다음에 하야를 생각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그런 측면에서 위에서 제시한 몇 가지 사항들은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관심을 갖고 임기 중에 몰입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앞으로 1년 3개월 동안 노 정권이 직면할 또 다른 도전들을 생각할 때 그의 정치적 앞날이 그리 밝지만은 않은 것 같다.
아마도 노 정권은 세 가지의 역사적 선례 중 하나를 맞지 않을까 생각된다.
첫째, 김영삼 전대통령처럼 장기간 식물대통령의 레임덕 코스를 밟으면서 자신이 몸담았던 정당과 끊임없이 불화와 갈등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경우이다.
둘째, 대만의 천수이벤 총통처럼 임기 말에 빚어질 수 있는 주변 인물들의 정치적 부패 스캔들로 인하여 사실상 국정운영의 통제력을 완전 상실한 채 임기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면서 끊임없이 국민과 반대당으로부터 집단적인 정치적 공격을 받는 상황이다.
셋째, 이승만 전대통령처럼 국민 전체로부터 분노와 격분의 대상이 되어 하야하는 상황을 맞는 경우이다. 노대통령이 지금처럼 대한민국 국민을 버릴 경우, 그는 어쩌면 국민들에 의해 먼저 버림을 받을 수 있는 최악의 정치적 시련을 맞게 될 지도 모른다.
노 대통령은 대통령직을 그만 둘 수 있다는 정치적 폭력으로 국민들을 자신의 '정치적 반란'의 대상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 노 대통령은 더 이상 '민주주의를 배반'하지 말아야 한다.
필자 소개
장성민 세계와동북아평화포럼 대표는 국민의 정부 시절 초대 청와대 국정상황실장, 정무 비서관, 16대 국회의원(통일외교 통상위원)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평화방송 시사프로그램 '열린세상 오늘, 장성민입니다'의 진행을 맡고 있다. 저서 및 역서로는 <지도력의 원칙> (김영사,1999) <한국의 대통령과 권력>(나남,2000),<성공하는 대통령의 조건>(김영사,2002),<북한의 권력이동>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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