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밥 먹는 '서글픈 자화상'
[박영택 교수의 '화가의 얼굴에서 내 얼굴을 보다']
혼자 밥 먹는 사람은 어딘지 슬퍼 보인다. 그는 진정 이 세상에서 홀로 남아 그렇게 목숨을 마지못해 영위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조금은 처량하고 안스럽다고나 할까. 어디에도 시선을 주지 않고 오로지 식탁에 눈을 고정한 체 꾸역꾸역 목구멍으로 음식물을 밀어 넣는 모습은 분명 인간이란 존재가 지닌 서글픈 형상이다.
가끔씩 그/그녀는 허공을 향해 혹은 양 옆으로 시선을 의무적으로 던지곤 한다. 민망함을 덮으려는 제스처다. 초점을 잃은 눈동자, 혼자 밥 먹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는 표정, 다소 급한 몸놀림 그리고 아무런 감정 없이 오로지 먹는 행위에만 집중하는 모습은 서글픈 풍경이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가능한 누군가와 함께 밥을 먹고자 한다. 혼자 먹는 일은 가급적 피한다. 식사 때가 되면 어김없이 누구와 먹을까 하는, 매번 반복되는 그러나 매순간 선택의 기로에 서게 하는 다소 곤혹스러운 문제와 직면한다. 밥은 최소한 불편하고 싫은 사람하고는 결코 먹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는 동안 사람들은 좋은 사람과 밥을 먹기를 간절히 원한다. 언제 한 번 밥이나 먹자는 소리는 그래서 늘 의미심장한 전언으로 들린다.
그림 속 주인공은 여자다. 그림 그린 이의 모습이다. 일반적인 자화상과는 조금 다르다. 거울이 아닌 주전자의 표면에 비친 밥 먹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종이에 수묵과 모필로 그려진 그림이다. 이제 막 숟가락을 떠서 입안으로 집어넣기 직전에 문득 앞에 놓인 주전자의 몸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 안에 비친 풍경은 식사 때를 놓치고, 그래서 누군가와 함께 먹기도 어려운 그러나 배가 고파서 밥은 먹어야 하는 그런 시간대에 식당에 와서 혼자 밥 먹는 자신의 처지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거울에 비친 시계가 늦은 점심이 분명함을 지시한다. 어쩌다 식사 때를 놓쳤을까? 일이 바빴을까? 아니면 늦게 일어나 이제야 점심을 먹는 것일까? 여러 사연이 있을 것이다. 아마도 작가는 자신의 작업실 근처에 있는 식당에 와서 홀로 국밥을 시켜먹고 있나보다. 식당의 주메뉴가 순대국밥과 해장국이다. 혹 간밤에 과음을 해서 늦은 해장을 하는 것은 아닐까? 그림 속 표정도 어딘지 그래 보인다. 속이 불편한 것도 같고 매우 배가 고픈 것도 같은 그런 표정이다. 다소 야수 같은 표정으로 게걸스럽게 먹기 직전의 고정된 모습이다.
혼자 식사할 때 사람들은 대개 볼거리를 필요로 한다. 시선처리에 더없이 좋기에 그럴 것이다. 나 역시 주로 혼자 밥 먹는 일이 많은데 그때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게 신문이다. 신문을 천천히 보면서 혼자 밥 먹는 일은 견딜만하다. 다른 사람의 시선도 피하고 심심한 시간도 죽이고 읽을거리까지 함께 하니 더없이 즐거운 식사시간이다. 조금은 외롭긴 하지만 말이다. 작가도 신문을 펼쳐놓고 국밥을 먹는다. 출입문을 마주하고 앉아 있다. 식탁에는 컵과 신문, 국밥과 반찬그릇 하나로 단촐하다. 그리고 수저를 들고 있는 자신의 오른손이 그려져 있다.
혼자 밥 먹는 모습을 담담히 비쳐주던 주전자를 바라보던 작가가 이를 기억해두고 작업실로 와서 그렸을 것이다. 색다른 자화상이다. 밥을 먹고 있는 자화상. 결코 아름답다거나 자의식이 있거나 심오한 의미를 부여하기 곤란한 지극히 평범한 그런 일상의 모습 속에 자리한 자화상이다.
곡면 거울 같은 주전자 표면은 가까운 것은 더욱 가깝게 하고 먼 것은 더 멀리 느껴지게 하면서 시야를 넓게 잡아준다. 중심 되는 부분은 크게 하고 주변부는 더 작게 보여주면서 현실풍경을 다분히 비현실적으로 만들고 있다. 볼록거울에 비친 상이 그것이다. 이 왜곡된 상은 현실을 재현하는 동시에 다분히 비재현적인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화면의 중앙에는 과장해서 크게 그린 주전자가 차지하고 있다. 주전자 표면이 왜곡상을 만든 원인이다. 주전자는 화면 안에 또 다른 화면을 만들어놓는다.
우리는 두 명의 작가를 동시에 본다. 수저를 들고 있는 손만을 보여주고 있는 작가, 그 모습을 비춰주는 주전자 표면의 작가가 그것이다. 실제 작가를 보여주지는 않는 자화상인데 대신 주전자에 비친 작가 모습이 이를 대신한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보는 것은 비춰진 상, 작가가 작가 자신을 보고 있는 그 시선을 마주한다. 우리를 보는 자화상, 자신을 들여다보고 작가를 보는 우리들의 시선이다.
그것은 실체와 가상을 동시에 보게 한다. 작가 자신이 보는 것과 자신이 보고 있는 시선까지 포함되어 있다. 동시에 작가가 앉아있는 뒷부분의 공간까지도 보여준다. 따라서 화면은 평면이지만 파노라마적인 효과를 자아낸다. 작가는 문듯 시선에 걸려든 자신을 보고 있는 자기를 그렸다.
이는 다분히 자기 정체성을 질문하는 자화상에 해당한다. 그녀는 노려보듯 주전자의 표면에 비친 자기를 본다. 마치 ‘‘너는 누구냐? ’’ 라고 묻는 듯 하다. 더 나아가 “먹기 위해 사니, 살기 위해 먹니?” 라고 묻는다. 자신이 자신을 낯선 존재로 볼 때, 그렇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나는 도대체 누구이며, 저 안에 비친 모습이 진정 나일까? 도대체 내 몸은 누구의 것인가?
나조차 내 몸이 알 수 없는 신비이고 이질적이며 무엇인지 모를 때가 많다. 특히 배가 고파 밥을 먹으면서 어쩔 수 없는 동물성의 육체를 실감하고 있을 때면 그런 실존적인 질문이 꼬리를 문다. 그래서 밥을 먹을 때, 특히 혼자 밥을 먹고 있을 때 우리는 모두 철학자가 된다.
필자 소개
성균관대대학원미술사전공, 전 금호미술관큐레이터, 현재 경기대학교예술대학 교수, 미술평론가.
저서로는 <예술가로 산다는 것>, <식물성의 사유>, <미술전시장 가는 날>, <나는 붓을 던져도 그림이 된다>, <가족을 그리다> 등이 있다.
가끔씩 그/그녀는 허공을 향해 혹은 양 옆으로 시선을 의무적으로 던지곤 한다. 민망함을 덮으려는 제스처다. 초점을 잃은 눈동자, 혼자 밥 먹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는 표정, 다소 급한 몸놀림 그리고 아무런 감정 없이 오로지 먹는 행위에만 집중하는 모습은 서글픈 풍경이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가능한 누군가와 함께 밥을 먹고자 한다. 혼자 먹는 일은 가급적 피한다. 식사 때가 되면 어김없이 누구와 먹을까 하는, 매번 반복되는 그러나 매순간 선택의 기로에 서게 하는 다소 곤혹스러운 문제와 직면한다. 밥은 최소한 불편하고 싫은 사람하고는 결코 먹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는 동안 사람들은 좋은 사람과 밥을 먹기를 간절히 원한다. 언제 한 번 밥이나 먹자는 소리는 그래서 늘 의미심장한 전언으로 들린다.
그림 속 주인공은 여자다. 그림 그린 이의 모습이다. 일반적인 자화상과는 조금 다르다. 거울이 아닌 주전자의 표면에 비친 밥 먹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종이에 수묵과 모필로 그려진 그림이다. 이제 막 숟가락을 떠서 입안으로 집어넣기 직전에 문득 앞에 놓인 주전자의 몸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 안에 비친 풍경은 식사 때를 놓치고, 그래서 누군가와 함께 먹기도 어려운 그러나 배가 고파서 밥은 먹어야 하는 그런 시간대에 식당에 와서 혼자 밥 먹는 자신의 처지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거울에 비친 시계가 늦은 점심이 분명함을 지시한다. 어쩌다 식사 때를 놓쳤을까? 일이 바빴을까? 아니면 늦게 일어나 이제야 점심을 먹는 것일까? 여러 사연이 있을 것이다. 아마도 작가는 자신의 작업실 근처에 있는 식당에 와서 홀로 국밥을 시켜먹고 있나보다. 식당의 주메뉴가 순대국밥과 해장국이다. 혹 간밤에 과음을 해서 늦은 해장을 하는 것은 아닐까? 그림 속 표정도 어딘지 그래 보인다. 속이 불편한 것도 같고 매우 배가 고픈 것도 같은 그런 표정이다. 다소 야수 같은 표정으로 게걸스럽게 먹기 직전의 고정된 모습이다.
혼자 식사할 때 사람들은 대개 볼거리를 필요로 한다. 시선처리에 더없이 좋기에 그럴 것이다. 나 역시 주로 혼자 밥 먹는 일이 많은데 그때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게 신문이다. 신문을 천천히 보면서 혼자 밥 먹는 일은 견딜만하다. 다른 사람의 시선도 피하고 심심한 시간도 죽이고 읽을거리까지 함께 하니 더없이 즐거운 식사시간이다. 조금은 외롭긴 하지만 말이다. 작가도 신문을 펼쳐놓고 국밥을 먹는다. 출입문을 마주하고 앉아 있다. 식탁에는 컵과 신문, 국밥과 반찬그릇 하나로 단촐하다. 그리고 수저를 들고 있는 자신의 오른손이 그려져 있다.
혼자 밥 먹는 모습을 담담히 비쳐주던 주전자를 바라보던 작가가 이를 기억해두고 작업실로 와서 그렸을 것이다. 색다른 자화상이다. 밥을 먹고 있는 자화상. 결코 아름답다거나 자의식이 있거나 심오한 의미를 부여하기 곤란한 지극히 평범한 그런 일상의 모습 속에 자리한 자화상이다.
곡면 거울 같은 주전자 표면은 가까운 것은 더욱 가깝게 하고 먼 것은 더 멀리 느껴지게 하면서 시야를 넓게 잡아준다. 중심 되는 부분은 크게 하고 주변부는 더 작게 보여주면서 현실풍경을 다분히 비현실적으로 만들고 있다. 볼록거울에 비친 상이 그것이다. 이 왜곡된 상은 현실을 재현하는 동시에 다분히 비재현적인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화면의 중앙에는 과장해서 크게 그린 주전자가 차지하고 있다. 주전자 표면이 왜곡상을 만든 원인이다. 주전자는 화면 안에 또 다른 화면을 만들어놓는다.
우리는 두 명의 작가를 동시에 본다. 수저를 들고 있는 손만을 보여주고 있는 작가, 그 모습을 비춰주는 주전자 표면의 작가가 그것이다. 실제 작가를 보여주지는 않는 자화상인데 대신 주전자에 비친 작가 모습이 이를 대신한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보는 것은 비춰진 상, 작가가 작가 자신을 보고 있는 그 시선을 마주한다. 우리를 보는 자화상, 자신을 들여다보고 작가를 보는 우리들의 시선이다.
그것은 실체와 가상을 동시에 보게 한다. 작가 자신이 보는 것과 자신이 보고 있는 시선까지 포함되어 있다. 동시에 작가가 앉아있는 뒷부분의 공간까지도 보여준다. 따라서 화면은 평면이지만 파노라마적인 효과를 자아낸다. 작가는 문듯 시선에 걸려든 자신을 보고 있는 자기를 그렸다.
이는 다분히 자기 정체성을 질문하는 자화상에 해당한다. 그녀는 노려보듯 주전자의 표면에 비친 자기를 본다. 마치 ‘‘너는 누구냐? ’’ 라고 묻는 듯 하다. 더 나아가 “먹기 위해 사니, 살기 위해 먹니?” 라고 묻는다. 자신이 자신을 낯선 존재로 볼 때, 그렇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나는 도대체 누구이며, 저 안에 비친 모습이 진정 나일까? 도대체 내 몸은 누구의 것인가?
나조차 내 몸이 알 수 없는 신비이고 이질적이며 무엇인지 모를 때가 많다. 특히 배가 고파 밥을 먹으면서 어쩔 수 없는 동물성의 육체를 실감하고 있을 때면 그런 실존적인 질문이 꼬리를 문다. 그래서 밥을 먹을 때, 특히 혼자 밥을 먹고 있을 때 우리는 모두 철학자가 된다.
필자 소개
성균관대대학원미술사전공, 전 금호미술관큐레이터, 현재 경기대학교예술대학 교수, 미술평론가.
저서로는 <예술가로 산다는 것>, <식물성의 사유>, <미술전시장 가는 날>, <나는 붓을 던져도 그림이 된다>, <가족을 그리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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