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어떤 동물보다 새를 동경한다
[박영택 교수의 '화가의 얼굴에서 내 얼굴을 보다']
인간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어떤 동물들보다 새를 동경했다. 새는 대지에서 떠나는 이들이다. 머리 위에서 선회하며 무한한 창공을 가로지르는 새들을 보는 것은 경이롭고 부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사람들은 새처럼 날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현실이 고달프고 팍팍할수록, 상처를 받을수록 그에 비례해 어디론가 자유롭게 비상하고 싶은 것이다.
날개가 달린 인간을 그토록 염원했음은 천사와 조인(鳥人) 이미지에서 숱하게 만나고 있다. 고구려고분벽화에는 온통 날개 달린 사람들로 가득하다. 죽은 이가 저 세계로 환생해 가기를 고대했던 도상들이다. 새란 이승과 저승을 매개해주는 영물로 여겼던 것이다. 솟대 역시 우리가 새를 토템으로 한 민족이었음을 여전히 상기시킨다. 옛사람들은 모자에 깃을 꽂고 사람이 죽으면 새의 커다란 날개를 가슴에 얹혀주었다고 한다.
나아가 새의 모습을 흉내 내고 새의 날개를 옷으로 대체해 입었다. 한복의 선은 날개에서 나오고 처마 끝 날렵하게 올라간 선도 현실에 붙잡힌 거주 공간, 우리네 삶을 저 곳으로 끌어올리고자 하는 간절한 믿음에서 몸을 내민다. 현실계를 완강하게 규정하는 중력의 법칙으로부터 훌훌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은 그만큼 원초적이고 본능적이다. 그것은 자연법칙의 금기를 위반 하는 일이자 자신의 육체적 한계를 넘어서려는 부단한 욕망이다. 이 변신에 대한 꿈과 욕망이 신화를 낳고 이미지를 낳았다.
임태규는 날개 단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얇고 예민한 선들로 이루어진 윤곽선은 불안한 존재를 포착하고 있다. 다소 어정쩡한 자세로 작은 날개를 부여잡고는 “날 수 있다”고 외친다. 스스로 최면을 건다. 그는 날개를 짊어지고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나는 날 수 있다고, 날아야 한다고...그는 어디론가 가고 싶어 한다.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이 세계가 낯설 때 사람들은 다른 공간을 꿈꾼다.
생각해보면 모든 현실은 폭력적이다. 내가 지금, 이곳에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것은 내 의지와는 다소 무관한 셈이다. 그리고 모든 타자들은 낯설고 수수께끼들이다. 그러나 사회는 그런 알 수 없는 타자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 것이고 무한히 욕망하고 욕망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이런 식의 삶이 아닌 다른 식의 삶을 생각해보지만 어렵다. 작가는 자기 몸에 알맞다고 여겨진 작은 날개를 등에 오려놓고 힘을 내본다.
선의 유연한 궤적과 맛이 경쾌하고 무척 감각적으로 다가온다. 간결하고 세련된 화면 구성과 담백한 표현도 돋보인다. 특히 동양화가 여전히 선의 묘미를 극대화하는 장르라면 이 그림은 그 선의 또 다른 운용을 활달하게 보여주고 있다. 다만 작가는 모필뿐만 아니라 연필을 주된 매체로 사용하면서 한지와 먹, 그리고 연필이 만나 이루는 선의 운용에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그리고 핵심을 떠내는 묘사에 의존한 캐리커처나 크로키에 유사한 인물을 그렸다. 캐리커처란 외형적 측면에서는 ‘인간형태의 과장’이며, 내용적 측면에서는 외형적 과장을 통한 시대와 사회 풍자미술로서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대중적인 어법(뉘앙스)을 포함하며 사건에 대한 보고적 (혹은 구체적)요소에 근거하는 한편 사회와 인간 속에서 존재 의미가 있는 캐리커처의 속성을 적극 끌어들여 이를 동양화 작업과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자유롭고 분방하며 형식적이지 않은 인물의 재현에 연필이란 간편한 도구 및 캐리커처 형식이 적합하다는 생각도 가능했을 것이다.
자유롭게 그려나간 이 자화상은 어린 시절 연필로 도화지 위에 즐겁게 인물을 그려나가던 추억을 슬며시 부감시켜 준다. 어떻게 보면 손을 떼지 않고 한 번에 지속해서 선을 연결해 그려나간 사람의 이미지다. 순간의 직관에 따라 인상적인 장면을 압축해서 그린 그림, 인물화이며 그리기의 본능을 껴안은 낙서에 가깝기도 하다.
작가는 우선 못 쓰는 한지에 먹을 충분히 적신 후 적당히 마르면 그 위에 종이를 얹고 연필로 선을 그어나간다. 그러면 형상이 종이 표면 위로 자연스레 배어 나오면서 여러 겹의 공간을 보여준다. 그렇게 밀려 올라오는 화면은 깊이와 함께 다양한 효과를 중첩해서 흥미로운 화면을 만들어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힘 조절에 따라 재미있는 선의 강약과 표면 위로 올라오는 먹의 번짐과 응고가 눈에 두드러지게 자리한다. 먹에 흠뻑 젖은 두터운 장지 위에 얇은 한지를 대고 그리는 형식을 취하는 이 방법론은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신의 내부, 현대인이 지닌 이면의 속성, 여러 갈래의 심리적인 층차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효과적인 장치로 보인다.
임태규는 자신을 주변인으로 간주한다. 그는 현실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겉도는 인간이다. 그렇게 생각한다. 현실은, 삶은 늘 어렵고 불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현실로부터 한시도 벗어나지 못한다. 어느 면에서 우리는 모두 사회제도와 규범에 강하게 매여 살지만 동시에 그 틀 안에서 늘 적응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존재, 부적응자들이다. 그에 따르면 주변인이란 여러 문화 속에서 어느 쪽에도 동화되지 않은 사람들, 정체성을 잃고 부유하는 열정을 지닌 이들이다.
이 자화상은 주변인으로서의 자신의 모습이자 동시에 현대인들의 초상이다. 사실 주변인은 우리의 모습, 자신을 포함한 누구나가 될 수 있는 존재이자 부유하는 의식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문화적 혼성 속에 부침하는, 표류하는 현대인의 얼굴에서 작가는 문득 자신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 얼굴에, 몸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독백처럼 “나는 날 수 있다”고 중얼거리면서...
필자 소개
성균관대대학원미술사전공, 전 금호미술관큐레이터, 현재 경기대학교예술대학 교수, 미술평론가.
저서로는 <예술가로 산다는 것>, <식물성의 사유>, <미술전시장 가는 날>, <나는 붓을 던져도 그림이 된다>, <가족을 그리다> 등이 있다.
날개가 달린 인간을 그토록 염원했음은 천사와 조인(鳥人) 이미지에서 숱하게 만나고 있다. 고구려고분벽화에는 온통 날개 달린 사람들로 가득하다. 죽은 이가 저 세계로 환생해 가기를 고대했던 도상들이다. 새란 이승과 저승을 매개해주는 영물로 여겼던 것이다. 솟대 역시 우리가 새를 토템으로 한 민족이었음을 여전히 상기시킨다. 옛사람들은 모자에 깃을 꽂고 사람이 죽으면 새의 커다란 날개를 가슴에 얹혀주었다고 한다.
나아가 새의 모습을 흉내 내고 새의 날개를 옷으로 대체해 입었다. 한복의 선은 날개에서 나오고 처마 끝 날렵하게 올라간 선도 현실에 붙잡힌 거주 공간, 우리네 삶을 저 곳으로 끌어올리고자 하는 간절한 믿음에서 몸을 내민다. 현실계를 완강하게 규정하는 중력의 법칙으로부터 훌훌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은 그만큼 원초적이고 본능적이다. 그것은 자연법칙의 금기를 위반 하는 일이자 자신의 육체적 한계를 넘어서려는 부단한 욕망이다. 이 변신에 대한 꿈과 욕망이 신화를 낳고 이미지를 낳았다.
임태규는 날개 단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얇고 예민한 선들로 이루어진 윤곽선은 불안한 존재를 포착하고 있다. 다소 어정쩡한 자세로 작은 날개를 부여잡고는 “날 수 있다”고 외친다. 스스로 최면을 건다. 그는 날개를 짊어지고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나는 날 수 있다고, 날아야 한다고...그는 어디론가 가고 싶어 한다.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이 세계가 낯설 때 사람들은 다른 공간을 꿈꾼다.
생각해보면 모든 현실은 폭력적이다. 내가 지금, 이곳에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것은 내 의지와는 다소 무관한 셈이다. 그리고 모든 타자들은 낯설고 수수께끼들이다. 그러나 사회는 그런 알 수 없는 타자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 것이고 무한히 욕망하고 욕망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이런 식의 삶이 아닌 다른 식의 삶을 생각해보지만 어렵다. 작가는 자기 몸에 알맞다고 여겨진 작은 날개를 등에 오려놓고 힘을 내본다.
선의 유연한 궤적과 맛이 경쾌하고 무척 감각적으로 다가온다. 간결하고 세련된 화면 구성과 담백한 표현도 돋보인다. 특히 동양화가 여전히 선의 묘미를 극대화하는 장르라면 이 그림은 그 선의 또 다른 운용을 활달하게 보여주고 있다. 다만 작가는 모필뿐만 아니라 연필을 주된 매체로 사용하면서 한지와 먹, 그리고 연필이 만나 이루는 선의 운용에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그리고 핵심을 떠내는 묘사에 의존한 캐리커처나 크로키에 유사한 인물을 그렸다. 캐리커처란 외형적 측면에서는 ‘인간형태의 과장’이며, 내용적 측면에서는 외형적 과장을 통한 시대와 사회 풍자미술로서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대중적인 어법(뉘앙스)을 포함하며 사건에 대한 보고적 (혹은 구체적)요소에 근거하는 한편 사회와 인간 속에서 존재 의미가 있는 캐리커처의 속성을 적극 끌어들여 이를 동양화 작업과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자유롭고 분방하며 형식적이지 않은 인물의 재현에 연필이란 간편한 도구 및 캐리커처 형식이 적합하다는 생각도 가능했을 것이다.
자유롭게 그려나간 이 자화상은 어린 시절 연필로 도화지 위에 즐겁게 인물을 그려나가던 추억을 슬며시 부감시켜 준다. 어떻게 보면 손을 떼지 않고 한 번에 지속해서 선을 연결해 그려나간 사람의 이미지다. 순간의 직관에 따라 인상적인 장면을 압축해서 그린 그림, 인물화이며 그리기의 본능을 껴안은 낙서에 가깝기도 하다.
작가는 우선 못 쓰는 한지에 먹을 충분히 적신 후 적당히 마르면 그 위에 종이를 얹고 연필로 선을 그어나간다. 그러면 형상이 종이 표면 위로 자연스레 배어 나오면서 여러 겹의 공간을 보여준다. 그렇게 밀려 올라오는 화면은 깊이와 함께 다양한 효과를 중첩해서 흥미로운 화면을 만들어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힘 조절에 따라 재미있는 선의 강약과 표면 위로 올라오는 먹의 번짐과 응고가 눈에 두드러지게 자리한다. 먹에 흠뻑 젖은 두터운 장지 위에 얇은 한지를 대고 그리는 형식을 취하는 이 방법론은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신의 내부, 현대인이 지닌 이면의 속성, 여러 갈래의 심리적인 층차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효과적인 장치로 보인다.
임태규는 자신을 주변인으로 간주한다. 그는 현실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겉도는 인간이다. 그렇게 생각한다. 현실은, 삶은 늘 어렵고 불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현실로부터 한시도 벗어나지 못한다. 어느 면에서 우리는 모두 사회제도와 규범에 강하게 매여 살지만 동시에 그 틀 안에서 늘 적응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존재, 부적응자들이다. 그에 따르면 주변인이란 여러 문화 속에서 어느 쪽에도 동화되지 않은 사람들, 정체성을 잃고 부유하는 열정을 지닌 이들이다.
이 자화상은 주변인으로서의 자신의 모습이자 동시에 현대인들의 초상이다. 사실 주변인은 우리의 모습, 자신을 포함한 누구나가 될 수 있는 존재이자 부유하는 의식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문화적 혼성 속에 부침하는, 표류하는 현대인의 얼굴에서 작가는 문득 자신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 얼굴에, 몸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독백처럼 “나는 날 수 있다”고 중얼거리면서...
필자 소개
성균관대대학원미술사전공, 전 금호미술관큐레이터, 현재 경기대학교예술대학 교수, 미술평론가.
저서로는 <예술가로 산다는 것>, <식물성의 사유>, <미술전시장 가는 날>, <나는 붓을 던져도 그림이 된다>, <가족을 그리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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