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무후무한 '한나라 정권-지자체' 충돌사태
<뷰스칼럼> 윤여준 "선의에 찬 우행은 악행으로 통한다"
"각 지자체장들의 선거공약 중에 투자유치가 많았다. 6월 지방선거에서 이에 대해 평가를 받아야 하는데 공약 이행이 부족한 상태다. 그런 와중에 세종시가 얘기되면서 '세종시 블랙홀'이 된다고 과장하는 면이 있다."
'세종시 블랙홀' 우려에 대한 전국 지자체장들의 거센 반발에 대한 정부 고위관계자의 냉담한 반응이다.
맞는 측면도 있다. 실제로 각 지자체장들이 공언한 투자유치는 거의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상황이다. 이는 새로 투자할 선도산업을 찾지 못한 데다가 글로벌 과잉공급 우려에 위축된 국내 기업들이 투자를 기피하는 데다가, 설상가상으로 세계불황으로 외국투자 유치마저 급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예로 지난해 외국인 직접투자는 전년보다 60% 가까이 줄어들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각 지자체가 앞다퉈 조성한 공단은 절반 이상이 입주기업을 찾지 못해 텅텅 빈 상태이고, 심지어는 수년 내 입주기업이 전무한 '유령공단'까지 있다. 더 심각한 것은 15개의 기존공단도 다 입주시키지 못한 마당에 새로 30개의 공단을 조성중인 경기도를 비롯해 각 지자체가 경쟁적으로 새 공단을 무더기 조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수요공급 계산도 제대로 하지 않고 '눈앞 실적'만을 위해 불도저식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가다간 전국 곳곳에 유령공단들이 속출하며 지방재정을 붕괴시킬 게 불을 보듯 훤하다.
그런 면에서 정부 고위관계자 말처럼 지자체장들이 자신들의 실정(失政)을 숨기기 위해 모든 책임을 세종시에 대기업을 끌어들이려 혈안인 중앙정부에게 떠넘기는 측면도 없지 않아 있다.
발표 사흘 전에 '없던 일'된 삼성전자 바이오시밀러 유치
그러나, 과연 정부에겐 책임이 없을까.
이명박 대통령은 지방의 반발이 거세자 타지역의 기존공장을 세종시로 이전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며, '신규사업'만 유치토록 지시했다. 이한구 한나라당 의원은 이에 대해 "실현불가능한 지시"라고 힐난했다. '신규사업'이라는 것도 이미 여러 지자체들이 오랜 기간 유치하기 위해 기업과 협상을 벌여온 사안들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신규사업들을 세종시로 몰아넣을 경우 타지방들의 반발은 보나 마나라는 게 이 의원의 지적이었다.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 총리실은 8일 삼성전자의 바이오시밀러(복제약)를 세종시에 입주하지 않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바이오시밀러는 정부의 협조요청에 따라 삼성전자가 고심 끝에 내놓은 카드였고, 바이오시밀러 입주는 이미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던 사안이었다.
그러면 정부 최종안 발표를 불과 사흘 앞둔 시점에 왜 바이오시밀러 유치는 없던 일이 됐을까. 대구 등의 강력 반발 때문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김범일 대구시장은 지난 7일 긴급 기자회견을 통해 바이오시밀러 세종시 입주에 강한 불만을 토로하며 "그동안 삼성과 직접 접촉했다"고 공식적으로 밝혔고, 대구경북 언론들은 연일 정부를 맹공했다.
바이오시밀러는 이 대통령이 말한 신규사업이 분명하나, "대정부투쟁"까지 경고하고 나선 TK의 거센 반발에 정부가 굴복해 막판에 빠진 모양새다. 말 그대로 뒤죽박죽이다.
지자체장들 "우리가 협상하던 신규사업 모조리 빼내가면서"
바이오시밀러를 빼면서, 문제는 해결된 것일까.
한 예로 정부는 바이오시밀러 대신에 삼성전자가 세종시에 고용 효과가 높은 LED(발광다이오드) 공장, 휴대전화와 전기차 배터리에 쓰이는 2차전지 사업 등 4~6개 계열사들을 입주시킬 것이라고 흘리고 있다.
문제는 이들 사업도 타 지자체들이 오랜 기간 자기 지역에 유치하기 위해 공을 들여온 사업이라는 점이다. <영남일보>는 9일 "LED분야는 지난해 2월 김범일 대구시장이 청와대를 직접 방문, 정정길 대통령실장에게 대구 유치를 건의했던 사안"이라고 보도했다. 친이계인 김 시장이 청와대와 직거래까지 해온 사안이라는 의미다.
친이계인 김문수 경기지사가 “홀대를 해도 유분수지. 다 가져가라.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되는지 한번 봐라. 나중에 표로 보여주겠다”며 펄펄 뛰는 이유중 하나도 현재 수원 삼성전자에서 가동중인 LED의 신규공장을 세종시로 유치하려는 데 대한 반발이라는 해석이 정설이다.
이밖에 세종시에 유치하려는 2차전지는 그동안 울산이 특별단지까지 마련해 미래성장산업으로 육성해온 사업이라는 점 등을 감안할 때, 세종시로의 신규산업 싹쓸이는 지방의 대대적 반발을 더욱 확산시킬 전망이다. 세종시에 들어갈 대기업이 많으면 많을수록 이에 정비례해 지방의 반발은 더 커질 것이란 의미다.
<매일> "나중에 표로 보여주겠다"
대구의 <매일신문>은 9일자 사설 '세종시에 대기업 다 넣으려 하나'를 통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기업들이 세종시에 들어가려는 이유는 두 가지"라며, 첫번째 이유로 "3.3㎡당 땅값이 36만~40만 원에 불과해 땅만 사놓아도 막대한 이득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대구경북 등 전국 광역자치단체의 주요 산업단지 조성원가가 3.3㎡당 150만~200만 원인 것을 감안하면 땅을 거저 주는 것에 다름없다"고 지적했다.
신문은 이어 "정부가 직접 기업 입주를 독려하는 것도 정부 눈치를 봐야하는 대기업들로 하여금 세종시행(行)을 결심하게 하는 요인"이라고 덧붙였다. 정부의 '당근과 채찍'이 대기업들을 세종시로 몰아넣고 있다는 지적인 셈.
신문은 "다른 지역의 미래를 산산조각내는 식으로 세종시 수정이 이뤄진다면 이를 찬성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세종시에 대기업을 집어넣기 위해 정부가 직접 나서 독려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대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땅을 헐값에 주는 것과 같은 국민 혈세 낭비도 잘못된 일"이라고 질타한 뒤, "'나중에 표로 보여주겠다'는 김문수 경기지사의 말에 지방민 대부분이 공감한다는 사실을 이 정부는 깨달아야 한다"는 경고로 글을 끝맺었다.
지금 지자체의 90% 가까이를 한나라당이 장악하고 있다. 이런 마당에 같은 당 소속인 중앙정권과 지자체가 정면충돌하는, 한국정치사상 전무후무한 일이 발생하고 있다. 6.2 지방선거에서 파란을 예고하는 전주곡인 셈이다.
윤여준 "선의에 찬 우행은 악행으로 통한다"
여권의 장자방으로 불리는 윤여준 전 의원은 세종시 수정에 찬성했던 인사중 하나다. 그가 최근 한 인터뷰에 이런 얘기를 했다.
"옛날에 서양사람이 써놓은 소설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선의에 찬 우행(愚行)은 악행으로 통한다’. 선의로 일을 했다고 해도 방법론이 잘못되면 결과는 나빠지니까, 나쁜 마음 먹고 한 거나 좋은 마음 먹고 한 거나 차이가 없다, 결과가 악행으로 통한다. 이게 방법론의 중요성을 얘기한 것이다.
모든 일은 목적이나 취지가 좋다고 해서 방법론이 정당화되는 건 아니다. 대통령이 아주 좋은 뜻으로 진짜 국가 백년대계로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했다 치더라도 방법론이 잘못됐으니까 일이 망가진다. 그러면 어떻게 취지와 동기를 살리나?"
그도 6.2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이 고전할 것으로 내다봤다.
<저작권자ⓒ뷰스앤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