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꺼 김대중', 그가 갔다...
<뷰스칼럼> '시대의 거인'이 남기고 간 무거운 숙제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생전인 2007년 4월 열린우리당 관계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한 말이다.
'디스 가이', 그리고 '따꺼'
김 전 대통령은 대통령 재임기간중 미국, 중국 사이에서 '등거리외교'를 펼치기 위해 부심했다. 분단국가 한국이 통일하기 위해서도 그랬고, 두 나라가 한국경제의 양대생명선이었기에 그러했다. DJ의 등거리외교는 종전의 '한-미-일 3각동맹'과는 궤를 달리하는 것이었고, 당연히 미-일과 갈등이 깊었다.
특히 부시 미대통령의 'MD(미사일방어)' 추진을 놓고 격돌했다. 부시 취임후 방미한 김 대통령이 'MD 동참' 요구를 거절하자, 격노한 부시는 공개석상에서 김 전 대통령에게 "디스 가이(This Guy, 이 자)"란 모욕적 표현까지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중국은 김 대통령을 높게 평가했다. 부시의 MD는 단지 북한뿐 아니라 중국까지도 겨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장쩌민 당시 중국 국가주석은 김 대통령을 중국에 초청한 자리에서 "따꺼(大兄)"라 불렀다. '따꺼'란 중국인이 최고의 존경과 흠모의 정을 표시할 때 쓰는 표현이다.
장쩌민은 김 전 대통령이 퇴임후 건강이 악화됐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자신의 주치의를 한국에 급파, 김 전 대통령을 진맥토록 할 정도로 김 전대통령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처럼 살아 생전 '광해군 외교'를 방불케 하는 외교로 한국의 '국격'을 높였고, 한국 국익을 증대시키며 유리한 통일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불세출의 '외교대통령', '통일대통령'이었다.
지독한 지역주의의 칼날 위에서
양김이 분열했던 1987년말 대선때 일이다. 대선 막판, DJ는 전국 릴레이유세에 나섰다. 호남을 거쳐 영남까지 도는 대장정이었다.
호남의 반응은 말 그대로 열광 그 자체였다. DJ가 광주을 찾던 날, 시가지는 완전철시했다. 모두가 DJ의 얼굴을 보고 말을 듣기 위해 조선대 운동장으로 모였다. 운동장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바깥에서라도 DJ의 사자후를 듣고자 인산인해를 이뤘다.
DJ는 감동했다. 모두를 휘어잡는 사자후를 한 시간여 이상 토해냈다. 모두가 열광했다. 이렇게 하루에 대여섯곳을 훑었다. 가는 곳마다 시간이 지연돼 하루는 자정을 넘어서야 화순에 도착했지만, 주민들은 횃불로 어둠을 몰아내고 DJ를 뜨겁게 맞았다.
그러다가 영남 일정에 들어갔다. 영남으로 넘어가는 톨게이트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취재단이 탄 버스 등에 붙어있던 선거포스터를 떼는 거였다. 포스터를 붙이고 그대로 들어갔다가 봉변을 당하기 십상이란 이유에서였다.
우려는 기우가 아니었다. 아침 일찍 마산 역전에 도착했다. 역전에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하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DJ가 단상에 올라 연설을 시작하자 역전에서 먹거리를 팔던 상인 등의 입에서 적개감 어린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고, 이어 빗자루 등이 여기저기서 날아오기 시작했다. 몇 분만에 연설을 끝내고 서둘러 역전을 빠져나와야 했다. 영남을 돌면서 계속되던 긴장은 공단인 까닭에 호남인 숫자가 상당수인 울산에 도착해서야 간신히 풀어졌다. 울산 태화강변에는 십수만의 호남인들이 DJ를 맞았다.
김 전 대통령은 평생을 지독한 지역주의의 칼날 위를 걸으며 정치를 해야 했다. 박정희 정권이 선거전술 차원에서 만들고 전두환 신군부가 광주학살을 통해 심화시키고 양김 분열로 더 악화된 지역주의는 그를 평생 옥조였다. 그의 마지막 염원은 '동서화합'이었으나, 이는 미완성 과제로 남겨졌다.
'시대의 거인'이 갔다
김 전 대통령은 재임기간중 오욕의 기록도 남겼다. '옷로비 파문', '3홍 비리' 등 친인척 비리가 그것이다. 정치인으로서 치명적 패착을 둔 적도 있다. 1987년의 '양김 분열'이 대표적 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전 대통령은 '시대의 거인'이었다. 그는 한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관통해 왔다. 55차례의 가택연금과 수년간의 투옥과 사형선고, 그리고 수차례 망명이 말해주듯, 그의 삶은 '인동초(忍冬草)'라는 별명, 그대로였다.
거인이 갔다. 한 시대가 막을 내렸다. 하지만 그 거인이 이루고자 했던 남북 화합, 동서 화합은 아직 미완성 과제로 우리 눈앞에 남아있다. 살아남은 이들이 풀어야 할 무거운 과제다.
2009년 8월18일, 거인이 우리에게 큰 숙제를 남기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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