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어디, 갈 데까지 가보자"?
<뷰스칼럼> '딸랑딸랑 재정부' 또 '관료 망국론' 자초하나
정부가 비장(?)의 부동산대책이라고 내놓은 10.21 대책을 접한 뒤 은행 임원이 어이없어 하며 한 푸념이다.
돈 가뭄으로 벼랑끝 몰린 은행들에게 돈 풀라니...
지금 은행들에는 돈이 씨가 마른 상태다. 달러화 가뭄만 심각한 게 아니다. 원화 가뭄도 심각하기란 오십보백보다. 연말까지 은행이 갚아야 할 빚, 은행채 만기분만 25조원을 넘는다.
은행들은 이를 갚기 위해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낮췄음에도 불구하고 예금 수신금리를 7%대로 도리어 높이며 자금 유치에 필사적이다. 제살을 갉아먹는 고금리 유치 작전의 결과, 일부 시중자금이 은행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 갖곤 태부족이다.
때문에 은행채 발행을 하려 하나 사려는 사람이 도통 없다. 국고채보다 3%포인트나 금리를 얹어주겠다고 해도 모두 외면한다. 과도한 가계대출, 건설대출 등 은행이 안고있는 시한폭탄이 하나둘이 아니라는 판단에서다.
그러다보니 은행은 정부에 제발 은행채를 사달라고 읍소하고 있고, 이에 정부는 국민연금을 동원해 10조원어치를 사주기로 했다. 은행은 그러나 그것도 부족하다며 한국은행이 직접 은행채를 사달라고 아우성이다. 처음에 강력반대하던 한은도 결국 은행채를 사들이는 쪽으로 기우는 분위기다.
이처럼 지금 은행은 자기 살아남기도 힘든 상황이다. 이런 때 10.21 대책이라는 게 나왔다.
10.21대책의 골자는 버블세븐 등을 투기지역에서 해제, 대출규제를 완화시켜주겠다는 거다. 즉 수요자들이 은행에서 돈을 빌려 아파트를 사게 해, 더이상 집값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겠다는 얘기다. 10.21의 또다른 골자는 국민돈 9조원으로 건설업계를 지원하는 동시에, 은행들이 건설업계에 신규대출을 해주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은행돈으로 아파트거품이 터지는 것을 막고, 한걸음 더 나아가 건설경기를 부양하겠다는 것이다.
돈 가뭄으로 벼랑끝에 몰린 은행들이 10.21대책을 전형적 '탁상공론'으로 받아들이며 개탄하는 것도 당연하다.
외국계 반응도 싸늘해 메릴린치는 "은행들이 과도한 레버리지(차입)로 비난에 직면한 상황에서 주택담보대출을 늘리는 데 적극적일지도 불확실하다"고 힐난했고, UBS도 "주택수요 회복을 위해 가장 필요한 일은 가계 부채를 낮추고 이자 부담을 줄이는 것"이라며 10.21대책의 허구성을 꼬집었다.
갈 데까지 가보자는 식...
이명박 대통령은 그동안 "한국의 보수적 감독체제 때문에 한국은 금융위기에서 안전할 수 있었다"고 누차 말해왔다. 즉 부동산대출을 집값의 40%로 엄격히 제한해 왔기 때문에 미국이나 유럽 등이 겪는 부동산거품 파열에서 상대적으로 안전하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10.21 대책은 언제 이런 얘기를 했는가 싶게, 그렇게 자랑해온 안전판인 대출규제를 풀라고 한다.
한국 금융계의 최대 뇌관은 과도한 가계대출이다. 무려 660조에 달하고 있고, 그중 307조가 주택담보대출이다. 가계대출을 줄이지 않는 한, 한국 은행들은 국내외에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취급을 받게 돼 있다. 그런데 가계대출을 더 늘리라는 게 10.21대책이다. 일단 발등의 불부터 끄고 보자는 식이다. 어디, 갈 데까지 가보자는 거다.
물론 은행들이 신규대출을 늘린 순 있다. 한은에서 무한정 돈을 찍어내 공급한다면 가능하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물가는 폭등하고 화폐가치가 떨어져 환율도 폭등하면서 한국은 궤멸적 상황을 맞게 될 게 불을 보듯 훤하다.
상류층 아닌 중산-서민층이 집 사야 위기 풀려
정부가 두려워하고, 은행도 두려워하듯, 부동산거품은 한국경제의 최대뇌관이다. 이미 거품파열은 시작됐다. 뭉치돈을 쥔 사람들이 부동산을 외면하기 때문이다. 오직 현금만 쥐고 있으려 한다. 정부는 오직 이들을 향해 "제발 부동산투기라도 해달라"고 사정하는 모양새다.
하지만 정부의 기본 사고 방식에 치명적 문제가 있다. 부동산거품 파열은 불가피하다. 문제는 경착륙이냐, 연착륙이냐다. 이를 결정하는 것은 뭉치돈을 쥔 상류층이 아니다. 중산층과 서민이다.
우리나라 주택공급률은 서울 등 수도권도 100%를 넘은지 오래고, 지방은 130%나 된다. 과잉공급이라는 얘기다. 반면에 제집을 갖고 있지 못한 국민이 47%나 된다. 집값이 너무 비싸 사고 싶어도 못사고 있다는 얘기다. 이들이 제집을 사도록 집값이 떨어져야 비로소 미분양대란을 해소하며 부동산거품 파열 경착륙도 막을 수 있다는 얘기다.
지난 5년간 '단군이래 최대호황'을 구가하며 세금도 제대로 안낸 건설업체들 상당수가 쓰러지는 일이 있더라도, 미분양 아파트를 절반 가격으로 땡처리해 수요-공급이 정상화될 때만 비로소 문제는 풀리기 시작한다는 의미다.
강만수 경제팀은 그러나 그동안 정반대 정책을 취해왔다. 건설업체 민원에 따라 분양가를 높이는 정책만 남발해왔다. 그러다가 이번엔 대출규제를 풀고 건설업계에 신규대출을 해주라고 은행들을 닥달하고 있다.
경제팀의 '철학 부재'가 위기를 증폭시키고 있는 형국이다.
금융 패닉에도 '딸랑딸랑'만
금융시장이 패닉적 상황에 빠져있던 지난 5일 기획재정부는 극비 내부문건을 만들었다. 문건의 요지는 '강만수 부총리 만들기'.
문건은 강만수 장관에 대해 "최근에는 KIKO 문제 해결, 서민주택공급 확대, 세제개편 등의 과정에서 보여준 모습에 힘입어 '결단력있고 소신있다'고 보는 경향이 증대하고 있다"며 "부총리제에 걸맞는 조직모습과 장관님의 역할을 부각할 필요가 있다"고 적고 있다. 전형적 '딸랑딸랑'이다.
관료사회 일각의 '딸랑딸랑'은 새삼스런 일이 아니다. 문제는 국가가 재앙적 위기에 처했으나 경제사령탑인 재정부는 '출세'와 '부처이기주의'에 사로잡혀 여론을 조작하려는 권력놀음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황당한 놀음을 하는 집단이기에 "갈 데까지 가보자"는 식의 대책만 연일 쏟아내고 있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IMF직후 '관료 망국론' 비난여론이 일며 당시 강경식 부총리 등이 감방에 간 바 있다. 당시 관료들은 "정책은 사법 심판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강력반발했고, 강 부총리 등은 얼마 뒤 풀려났다. 정책은 '사법 심판'의 대상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 무서운 '국민 심판'의 대상이다. 지금 일부 경제관료들은 그 사실을 또 망각한듯 싶다. 한국 경제의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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