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패션 '트랜드 리더' 은주 맥마흔
[한국의 뉴파워]<4> "상업성을 잃지 않은 아방가르드"
런던 동북쪽 벨루아로드 101번지. 소설 ‘해리 포터’를 떠올리게 하는 깔끔하고 한적한 주택가 2층 건물이다. 눈길을 끌만한 간판 하나 없는 그곳에 바로 이곳에 ‘온주 맥(Onjoo Mac)'스튜디오가 있다. 넓이 50 평방m, 직원이라야 비정규직 합해 5명. 그러나 이 자그마한 사무실엔 해리 포터의 주문 못지않은 강력한 힘이 있다. 바로 유럽의 정상급 패션 디자이너 은주 맥마흔(39)이 있기 때문이다.
“은주의 옷은 마법과 같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홀리게 하지요. 정숙하면서도 도발적이고, 우아하면서도 거칠고, 세련된 가운데도 야성미가 느껴집니다.”
패션 디자이너 재키 리브스의 평이다. 그는 영국의 유력 패션 비평가이자 브리스톨에 본사를 둔 보아 부티크를 운영하는 의류업자다. 그리고 요즘은 영국과 유럽에 퍼져 있는 은주 맥마흔의 열렬한 신봉자 중에 하나다.
그는 유럽에서 여성 의류 디자이너로 독보적인 위치를 인정받고 있다. 프랑스의 프레타포르테(Pret a Porte), 영국의 퓨어 등 세계 패션의 조류를 결정짓는 패션 행사에서는 온주 맥의 새 시즌 상품에 바이어들의 눈길이 쏠린다.
한국의 정상급 디자이너들도 발을 들여 놓기 어려운 이들 패션 행사에 은주 맥마흔은 고정 멤버다. 바자, PIMP, 텍스타일 매거진 등 유럽의 유력 패션잡지에서도 ‘Onjoo Mac’ 브랜드는 정기적으로 소개하는 아이템이다.
“은주 맥의 실험 정신이 세계 패션계에 미치는 영향은 적지 않다. 특히 그는 스트리트 쿠투르(street couture)의 세계적 트렌드 리더다.”
프레타포르테 행사 중 하나인 앳모스피어(Atmosphere) 패션쇼에서는 디자이너로서 그의 위치를 이렇게 설명했다.
디자이너로서 권씨의 능력은 영국런던예술대학교(University of the Art London)에서도 인정하고 있다. 그는 ‘런던 인스티튜트’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100여개국 출신 학생 2만4000명이 재학 중인 세계 최대 규모의 예술대학인 이곳에서 강의하는 유일한 한국인 패션 디자이너다. 그는 2004년부터 이 학교의 다섯 단과대학 중 하나인 런던 칼리지 오브 패션(London College of Fashion, LFC)에서 패션 디자인을 강의하고 있다.
그가 석사학위를 받기도 한 LCF는 크리스찬 디오르의 존 갈리아노, 클로에의 스텔라 매카트니, 지미 추, 힐러리 알렉산더, 패트릭 콕스 등 정상급 디자이너들이 수학했다. LFC에서 교편을 잡는 세계정상급 디자이너들은 현업에서 일하며 학교에서 강의를 했고 그 덕분에 세계적 디자이너로 명성을 누린다.
“LFC의 교수직은 이론적 힘과 실제로 작품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겸비되지 않으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지요. 영국의 일류 디자이너들도 이 학교에서 강사직을 신청했다가 거부된 경우가 수 없이 많습니다.”
한국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세계 패션의 중심에서 정상급 디자이너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드문 한국인 패션 디자이너. 은주 맥마흔은 결코 혜성과 같이 나타난 인물은 아니다.
그의 한국 이름은 권은주. 아직도 국내 패션계엔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권씨는 20대 중반에 국내 패션 대기업의 수석디자이너를 지냈던 유망한 신예 디자이너였기 때문이다.
“성균관대학 의상학과를 졸업하고 4년 만에 디자이너라면 누구나 부러워하는 자리를 꿰차게 됐습니다. 주변에서 부러운 시선도 받았고 화제도 됐었죠.”
그러나 앞날이 촉망되던 그는 어느 날 갑자기 패션계에서 사라졌다. 이 사건의 업계에서 충격적인 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제가 회사에 사표를 낼 때 모두가 미쳤다고 했습니다. 앞으로 창창한 앞날이 기다리고 있는 좋은 자리를 제 발로 걷어찬다는 것 자체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란 것이었죠.”
그러나 잘나가던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만리타국 영국으로 떠난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남들은 유능한 디자이너라고 칭찬했지만 저는 불안했습니다. 과연 제가 창조적 재능이 있는 디자이너로서 자격이 있는 지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불안감은 당시 국내 패션업계의 현실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국내 대기업의 디자이너의 일은 해외 첨단패션의 카피 수준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외국 패션 잡지를 펼쳐 놓고 그 옷들을 모방하는 것이 디자이너들의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마케팅등 업무가 많아 그 일에도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디자인의 일은 집에 혼자 밤새 하는 그런 일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어린 시절부터 품어왔던 패션 디자이너의 꿈이 이게 아니라는 초조함과 갈수록 시간만 허비한다는 내심의 갈등이 갈수록 커지던 그에게 결정의 계기는 왔다. 그가 지원했던 런던 인스티튜트에서 입학 허가가 떨어진 것이다. 런던 인스티튜트의 입학 허가는 번민의 바다 속에 빠진 그를 구해주러 하늘에서 내려준 두레박과 같은 존재였다.
그는 기꺼이 일류회사 수석 디자이너라는 자리를 버렸다. 그리고 런던의 뒷골목 허름한 하숙집에서 딱딱한 빵 한 조각으로 허기를 채우며 디자인의 ABC부터 다시 배우는 학생의 신분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영국에서의 공부는 달랐습니다. 창조적 작업의 기초부터 다시 다졌습니다. 공부할 것도 많았고 제출해야할 과제도 많았지만 마음은 한가해졌고요. 영혼에 힘이 충만해지는 것을 느꼈죠.”
권씨는 오랜만의 자유와 외국이라는 신비감, 또 마음껏 공부만 하는 생활이 마치 천국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이때 그는 자신의 인생에 또 다른 전기를 맞았다. 바로 그의 남편인 존 맥마흔을 만난 것이다. 컴퓨터 전문가인 맥마흔은 영국생활초기 힘든 생활을 했던 그에게 거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2000년 결혼한 이후 그의 일을 이해했을 뿐 아니라 사업을 헌신적으로 도왔다. 고용인도 없이 일하던 사업 초기 밤새 그의 작업을 도와주는 등 지금까지 그의 사업에 반려가 돼왔다.
LCF의 디자인 교육은 매우 자유롭고 실험적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전 세계의 패션 트렌드가 이곳에 모이는 까닭에 수많은 문화적 전통이 이곳에서 융합되며 또 다시 새로운 문화적 트랜드를 만들어낸다. 영국에서의 교육은 특히 리서치에 많은 시간이 투자됐다. 디자인 작업보다 시간도 더 많이 걸렸다. 이 과정에서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아이디어가 무궁무진하게 생겨나기도 했다. "한번 익숙해지자 푹 빠져 끝없이 하고 싶은 것이 바로 리서치"라고 그는 말했다.
짧은 동안에 창의적인 디자인에 대한 눈이 떴고 성적도 금방 향상됐다. 그는 2년 동안 항상 톱을 차지하는 등 우등생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의 능력을 인정해 후원자가 된 교수도 생겼다. 특히 이 학교의 유능한 패션 디자이너이자 LFC의 얼굴이란 수 알스톤은 그의 독창적 재능을 제일 먼저 인정한 교수다. 그는 이후 취업과 창업, 그리고 LFC의 강의를 맡게 될 때 등 그의 중요한 인생의 고비마다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했다. 그가 LFC에서 강의하게 된 것도 알스톤의 강한 추천이 힘이 됐다.
권씨는 2000년 이 학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당시 영국에서 처음 인기를 끌고 있던 의류 브랜드 페이크 런던에 고용됐다. 그는 입사와 함께 이 업체의 2001년 시즌 여성의류 봄, 여름 신상품 디자인의 책임자가 됐다. 그리고 약 5개월의 작업 끝에 런던 패션주간 행사에서 이 회사의 첫 여성의류 패션쇼를 성공리에 치렀다.
영국에서 첫 무대를 성공적으로 치른 그는 이후 컴퓨터 전문가인 영국인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A&F의 여성의류 담당 임원으로 2년간 일하며 여성 진 웨어를 이 회사의 간판 브랜드로 키웠다. 그가 디자인한 진 웨어는 로스앤젤레스를 비롯한 미국 시장 전역과 유럽과 아시아 등 세계 시장에서 인기 브랜드로 자리를 잡았다.
2003년 3월 권씨와 남편은 다시 런던으로 돌아왔다. 권씨는 영국의 첫 직장인 페이크 런던으로 복귀했다. 그는 런던과 홍콩에서 컬렉션을 치른 후 독립을 선언했다.
초창기 자금사정이 넉넉지 못해 첫 콜렉션에서는 사람을 고용하지도 못했고, 스튜디오도 없었다. 자신의 집에서 방 하나를 작업실로 꾸몄다.
“스트리트 쿠투르는 정장보다 자유로운 상상력을 중요시하지만 맞춤복의 고급스러움도 유지해야하는 분야입니다.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감각이 없으면 성공하기 어려운 분야였지만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그는 자신의 개념과 맞는 브랜드를 개발하고 수요층을 찾았다. 스스로 디자인을 했을 뿐 아니라 마케팅도 했다. 남편이 디자인한 카타로그를 개인 부티크와 백화점에 보냈다. 한국 대기업에서의 사업 경험은 이때 그에게 큰 도움이 됐다.
“이들 업체에는 하루에도 몇 십 건씩 신예 디자이너들의 카타로그들이 들어옵니다. 그 경쟁을 뚫는 것 자체가 하늘에 별따기지요. 이들의 대답을 기다리는데 속이 타들어 가더군요.”
그러나 반응은 의외로 빨리왔다. 영국의 유명 백화점인 하우스 오프 프레이저 백화점 등 몇몇 곳에서 제품을 보고 싶다는 반응이 온 것이다. 그렇게 백화점에 입점이 시작됐다.
그리고 머지 않아 런던은 물론 브리스톨과 포츠머스, 에딘버러 등 영국의 주요도시에서 그의 옷을 팔겠다는 매장이 줄을 이었다. 이듬해엔 프랑스의 프레타포르테에도 출품을 했다.
심사위원들의 반응은 매우 호의적이었다. ‘상업성을 잃지 않은 아방가르드’라는 평을 받으며 프레타포르테의 행사 중 앳모스피어 패션쇼에 초대돼 그의 작품을 선보였다. 이후 그의 작품은 매년 봄 가을 시즌 프레타포르테에서 선보인다. 영국의 행사인 퓨어(PURE)에서도 자연스럽게 초청이 됐다.
덕분에 그의 브랜드는 스칸디나비아반도와 유럽으로 퍼져 나갔다. 최근엔 쿠웨이트 등 아시아권으로 그의 브랜드는 판로가 넓어졌고 이제 바다 건너 일본까지 진출을 하게 됐다.
‘온주 맥’ 브랜드는 이제 유럽과 아시아에 통하는 스트리트 쿠투르의 명품 브랜드가 됐다. 그의 옷만을 선호하는 매니어들도 적지 않다. 영국의 디자이너 서클에서도 은주 맥마흔의 뚜렷한 위치를 인정하고 있다.
“일본의 미치코런던과 같은 브랜드를 생각한다면 온주 맥이 아직 성공이라고 말하기에 갈 길이 이직 멀지요. 그러나 제 이름이 패션의 본고장인 영국과 프랑스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인 결과지요.”
그는 “만일 한국에 그냥 있었더라면?”이란 질문에 대해 그는 “생각하기도 싫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경제적으로는 성공했을 수도 있겠죠. 그러나 디자이너 은주 맥마흔이 될 수는 결코 없었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군인인 그는 스스로를 한번 결정한 일은 끝을 보는 성격이라고 말했다. 한국에서 사표를 낼 때 그는 자신의 그런 성격을 믿었다고 했다.
“지난 10년은 뒤돌아보지 않고 달려왔습니다. 때문에 그 시간은 평생 다시 할 수 없는 제 자신에 대한 값진 투자의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누구보다 지금의 제 자신에 만족하고 있고요. 또 제가 만드는 온주 맥에 대해서도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온주 맥은 디자이너 권은주가 한국이란 국경과 인습의 울타리를 벗어나 세계적 디자이너 은주 맥마흔으로 거듭나게 한 디딤돌이다.
그리고 런던 동북부 벨루아 로드 101번지는 세계인 은주 맥마흔이 모든 여성을 매혹하는 자신만의 마법을 완성시켜가고 있는 패션의 명소로 그 유명세를 더해가고 있다.
결혼 7년째가 되는 그는 최근 딸 에린을 낳았다.
필자소개
최미현
10년간 중앙일보에서 잡지 제작과 문화기획을 하다 2000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주의 R.I.T.(Rochester Institute of Technology)현대 도예를 공부했다. 2002년 이 대학에서 석사(Master of Fine Arts)학위를 받았다. 2003년 10월 인사아트센터에서 첫 개인전을, 2005년 11월 성북동 갤러리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2002년 5월 미국 '유망신인작가전'(뉴욕주 로체스터), 2004년 한불도자기페스티벌 등 단체전도 다수 참가했다. 프랑스 Adrien Dubouche 국립도예박물관에서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은주의 옷은 마법과 같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홀리게 하지요. 정숙하면서도 도발적이고, 우아하면서도 거칠고, 세련된 가운데도 야성미가 느껴집니다.”
패션 디자이너 재키 리브스의 평이다. 그는 영국의 유력 패션 비평가이자 브리스톨에 본사를 둔 보아 부티크를 운영하는 의류업자다. 그리고 요즘은 영국과 유럽에 퍼져 있는 은주 맥마흔의 열렬한 신봉자 중에 하나다.
그는 유럽에서 여성 의류 디자이너로 독보적인 위치를 인정받고 있다. 프랑스의 프레타포르테(Pret a Porte), 영국의 퓨어 등 세계 패션의 조류를 결정짓는 패션 행사에서는 온주 맥의 새 시즌 상품에 바이어들의 눈길이 쏠린다.
한국의 정상급 디자이너들도 발을 들여 놓기 어려운 이들 패션 행사에 은주 맥마흔은 고정 멤버다. 바자, PIMP, 텍스타일 매거진 등 유럽의 유력 패션잡지에서도 ‘Onjoo Mac’ 브랜드는 정기적으로 소개하는 아이템이다.
“은주 맥의 실험 정신이 세계 패션계에 미치는 영향은 적지 않다. 특히 그는 스트리트 쿠투르(street couture)의 세계적 트렌드 리더다.”
프레타포르테 행사 중 하나인 앳모스피어(Atmosphere) 패션쇼에서는 디자이너로서 그의 위치를 이렇게 설명했다.
디자이너로서 권씨의 능력은 영국런던예술대학교(University of the Art London)에서도 인정하고 있다. 그는 ‘런던 인스티튜트’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100여개국 출신 학생 2만4000명이 재학 중인 세계 최대 규모의 예술대학인 이곳에서 강의하는 유일한 한국인 패션 디자이너다. 그는 2004년부터 이 학교의 다섯 단과대학 중 하나인 런던 칼리지 오브 패션(London College of Fashion, LFC)에서 패션 디자인을 강의하고 있다.
그가 석사학위를 받기도 한 LCF는 크리스찬 디오르의 존 갈리아노, 클로에의 스텔라 매카트니, 지미 추, 힐러리 알렉산더, 패트릭 콕스 등 정상급 디자이너들이 수학했다. LFC에서 교편을 잡는 세계정상급 디자이너들은 현업에서 일하며 학교에서 강의를 했고 그 덕분에 세계적 디자이너로 명성을 누린다.
“LFC의 교수직은 이론적 힘과 실제로 작품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겸비되지 않으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지요. 영국의 일류 디자이너들도 이 학교에서 강사직을 신청했다가 거부된 경우가 수 없이 많습니다.”
한국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세계 패션의 중심에서 정상급 디자이너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드문 한국인 패션 디자이너. 은주 맥마흔은 결코 혜성과 같이 나타난 인물은 아니다.
그의 한국 이름은 권은주. 아직도 국내 패션계엔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권씨는 20대 중반에 국내 패션 대기업의 수석디자이너를 지냈던 유망한 신예 디자이너였기 때문이다.
“성균관대학 의상학과를 졸업하고 4년 만에 디자이너라면 누구나 부러워하는 자리를 꿰차게 됐습니다. 주변에서 부러운 시선도 받았고 화제도 됐었죠.”
그러나 앞날이 촉망되던 그는 어느 날 갑자기 패션계에서 사라졌다. 이 사건의 업계에서 충격적인 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제가 회사에 사표를 낼 때 모두가 미쳤다고 했습니다. 앞으로 창창한 앞날이 기다리고 있는 좋은 자리를 제 발로 걷어찬다는 것 자체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란 것이었죠.”
그러나 잘나가던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만리타국 영국으로 떠난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남들은 유능한 디자이너라고 칭찬했지만 저는 불안했습니다. 과연 제가 창조적 재능이 있는 디자이너로서 자격이 있는 지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불안감은 당시 국내 패션업계의 현실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국내 대기업의 디자이너의 일은 해외 첨단패션의 카피 수준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외국 패션 잡지를 펼쳐 놓고 그 옷들을 모방하는 것이 디자이너들의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마케팅등 업무가 많아 그 일에도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디자인의 일은 집에 혼자 밤새 하는 그런 일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어린 시절부터 품어왔던 패션 디자이너의 꿈이 이게 아니라는 초조함과 갈수록 시간만 허비한다는 내심의 갈등이 갈수록 커지던 그에게 결정의 계기는 왔다. 그가 지원했던 런던 인스티튜트에서 입학 허가가 떨어진 것이다. 런던 인스티튜트의 입학 허가는 번민의 바다 속에 빠진 그를 구해주러 하늘에서 내려준 두레박과 같은 존재였다.
그는 기꺼이 일류회사 수석 디자이너라는 자리를 버렸다. 그리고 런던의 뒷골목 허름한 하숙집에서 딱딱한 빵 한 조각으로 허기를 채우며 디자인의 ABC부터 다시 배우는 학생의 신분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영국에서의 공부는 달랐습니다. 창조적 작업의 기초부터 다시 다졌습니다. 공부할 것도 많았고 제출해야할 과제도 많았지만 마음은 한가해졌고요. 영혼에 힘이 충만해지는 것을 느꼈죠.”
권씨는 오랜만의 자유와 외국이라는 신비감, 또 마음껏 공부만 하는 생활이 마치 천국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이때 그는 자신의 인생에 또 다른 전기를 맞았다. 바로 그의 남편인 존 맥마흔을 만난 것이다. 컴퓨터 전문가인 맥마흔은 영국생활초기 힘든 생활을 했던 그에게 거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2000년 결혼한 이후 그의 일을 이해했을 뿐 아니라 사업을 헌신적으로 도왔다. 고용인도 없이 일하던 사업 초기 밤새 그의 작업을 도와주는 등 지금까지 그의 사업에 반려가 돼왔다.
LCF의 디자인 교육은 매우 자유롭고 실험적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전 세계의 패션 트렌드가 이곳에 모이는 까닭에 수많은 문화적 전통이 이곳에서 융합되며 또 다시 새로운 문화적 트랜드를 만들어낸다. 영국에서의 교육은 특히 리서치에 많은 시간이 투자됐다. 디자인 작업보다 시간도 더 많이 걸렸다. 이 과정에서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아이디어가 무궁무진하게 생겨나기도 했다. "한번 익숙해지자 푹 빠져 끝없이 하고 싶은 것이 바로 리서치"라고 그는 말했다.
짧은 동안에 창의적인 디자인에 대한 눈이 떴고 성적도 금방 향상됐다. 그는 2년 동안 항상 톱을 차지하는 등 우등생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의 능력을 인정해 후원자가 된 교수도 생겼다. 특히 이 학교의 유능한 패션 디자이너이자 LFC의 얼굴이란 수 알스톤은 그의 독창적 재능을 제일 먼저 인정한 교수다. 그는 이후 취업과 창업, 그리고 LFC의 강의를 맡게 될 때 등 그의 중요한 인생의 고비마다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했다. 그가 LFC에서 강의하게 된 것도 알스톤의 강한 추천이 힘이 됐다.
권씨는 2000년 이 학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당시 영국에서 처음 인기를 끌고 있던 의류 브랜드 페이크 런던에 고용됐다. 그는 입사와 함께 이 업체의 2001년 시즌 여성의류 봄, 여름 신상품 디자인의 책임자가 됐다. 그리고 약 5개월의 작업 끝에 런던 패션주간 행사에서 이 회사의 첫 여성의류 패션쇼를 성공리에 치렀다.
영국에서 첫 무대를 성공적으로 치른 그는 이후 컴퓨터 전문가인 영국인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A&F의 여성의류 담당 임원으로 2년간 일하며 여성 진 웨어를 이 회사의 간판 브랜드로 키웠다. 그가 디자인한 진 웨어는 로스앤젤레스를 비롯한 미국 시장 전역과 유럽과 아시아 등 세계 시장에서 인기 브랜드로 자리를 잡았다.
2003년 3월 권씨와 남편은 다시 런던으로 돌아왔다. 권씨는 영국의 첫 직장인 페이크 런던으로 복귀했다. 그는 런던과 홍콩에서 컬렉션을 치른 후 독립을 선언했다.
초창기 자금사정이 넉넉지 못해 첫 콜렉션에서는 사람을 고용하지도 못했고, 스튜디오도 없었다. 자신의 집에서 방 하나를 작업실로 꾸몄다.
“스트리트 쿠투르는 정장보다 자유로운 상상력을 중요시하지만 맞춤복의 고급스러움도 유지해야하는 분야입니다.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감각이 없으면 성공하기 어려운 분야였지만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그는 자신의 개념과 맞는 브랜드를 개발하고 수요층을 찾았다. 스스로 디자인을 했을 뿐 아니라 마케팅도 했다. 남편이 디자인한 카타로그를 개인 부티크와 백화점에 보냈다. 한국 대기업에서의 사업 경험은 이때 그에게 큰 도움이 됐다.
“이들 업체에는 하루에도 몇 십 건씩 신예 디자이너들의 카타로그들이 들어옵니다. 그 경쟁을 뚫는 것 자체가 하늘에 별따기지요. 이들의 대답을 기다리는데 속이 타들어 가더군요.”
그러나 반응은 의외로 빨리왔다. 영국의 유명 백화점인 하우스 오프 프레이저 백화점 등 몇몇 곳에서 제품을 보고 싶다는 반응이 온 것이다. 그렇게 백화점에 입점이 시작됐다.
그리고 머지 않아 런던은 물론 브리스톨과 포츠머스, 에딘버러 등 영국의 주요도시에서 그의 옷을 팔겠다는 매장이 줄을 이었다. 이듬해엔 프랑스의 프레타포르테에도 출품을 했다.
심사위원들의 반응은 매우 호의적이었다. ‘상업성을 잃지 않은 아방가르드’라는 평을 받으며 프레타포르테의 행사 중 앳모스피어 패션쇼에 초대돼 그의 작품을 선보였다. 이후 그의 작품은 매년 봄 가을 시즌 프레타포르테에서 선보인다. 영국의 행사인 퓨어(PURE)에서도 자연스럽게 초청이 됐다.
덕분에 그의 브랜드는 스칸디나비아반도와 유럽으로 퍼져 나갔다. 최근엔 쿠웨이트 등 아시아권으로 그의 브랜드는 판로가 넓어졌고 이제 바다 건너 일본까지 진출을 하게 됐다.
‘온주 맥’ 브랜드는 이제 유럽과 아시아에 통하는 스트리트 쿠투르의 명품 브랜드가 됐다. 그의 옷만을 선호하는 매니어들도 적지 않다. 영국의 디자이너 서클에서도 은주 맥마흔의 뚜렷한 위치를 인정하고 있다.
“일본의 미치코런던과 같은 브랜드를 생각한다면 온주 맥이 아직 성공이라고 말하기에 갈 길이 이직 멀지요. 그러나 제 이름이 패션의 본고장인 영국과 프랑스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인 결과지요.”
그는 “만일 한국에 그냥 있었더라면?”이란 질문에 대해 그는 “생각하기도 싫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경제적으로는 성공했을 수도 있겠죠. 그러나 디자이너 은주 맥마흔이 될 수는 결코 없었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군인인 그는 스스로를 한번 결정한 일은 끝을 보는 성격이라고 말했다. 한국에서 사표를 낼 때 그는 자신의 그런 성격을 믿었다고 했다.
“지난 10년은 뒤돌아보지 않고 달려왔습니다. 때문에 그 시간은 평생 다시 할 수 없는 제 자신에 대한 값진 투자의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누구보다 지금의 제 자신에 만족하고 있고요. 또 제가 만드는 온주 맥에 대해서도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온주 맥은 디자이너 권은주가 한국이란 국경과 인습의 울타리를 벗어나 세계적 디자이너 은주 맥마흔으로 거듭나게 한 디딤돌이다.
그리고 런던 동북부 벨루아 로드 101번지는 세계인 은주 맥마흔이 모든 여성을 매혹하는 자신만의 마법을 완성시켜가고 있는 패션의 명소로 그 유명세를 더해가고 있다.
결혼 7년째가 되는 그는 최근 딸 에린을 낳았다.
필자소개
최미현
10년간 중앙일보에서 잡지 제작과 문화기획을 하다 2000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주의 R.I.T.(Rochester Institute of Technology)현대 도예를 공부했다. 2002년 이 대학에서 석사(Master of Fine Arts)학위를 받았다. 2003년 10월 인사아트센터에서 첫 개인전을, 2005년 11월 성북동 갤러리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2002년 5월 미국 '유망신인작가전'(뉴욕주 로체스터), 2004년 한불도자기페스티벌 등 단체전도 다수 참가했다. 프랑스 Adrien Dubouche 국립도예박물관에서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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