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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년 맞은 동아투위, ‘진동아굿’ 재현

해직기자 30여명 ‘진상규명촉구’ 23일까지 밤샘농성 돌입

“1975년 3월 17일, 자유언론 실천운동에 앞장섰던 1백25명의 기자들이 거리로 쫓겨났고, 아직까지 이들 해직기자들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고 있는 동아일보는 그날부터 ‘가짜 신문’이 되어버렸다.”(2006 진동아굿 중)

냉혹했던 유신시절 정부의 ‘보도지침’을 거부하고 언론자유를 부르짖다 1백20여명의 대량 해고자를 낳았던 이른바 ‘동아사태’가 일어난 지 정확히 31년이 되는 17일.

일찌감치 정문을 걸어 잠근 광화문 동아일보 사옥 앞으로 전현직 언론인 1백여명이 모여들었다. 당시 언론 민주화를 요구하며 5개월간 정부의 광고탄압에 저항했던 젊은 기자들은 어느새 대부분 이순을 넘겨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이 되어 있었다.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위원장 문영희, 이하 동아투위)는 17일 오후 2시 서울 광화문 동아일보 사옥 앞에서 ‘동아사태’ 31주년을 기념하는 ‘동아일보 광고탄압 및 언론인 무더기축출 진상규명을 위한 문화제’를 열고 23일까지 밤샘 천막농성에 들어갔다.

31년 지났지만 언론탄압 침묵하는 동아일보

민주화운동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는 2004년 12월 29일, 이들 동아일보 및 동아방송 소속 자유언론운동 해직자들의 복직권고 및 불이익 해소조치를 사측에 통보했다. 그러나 동아일보측은 강제권고가 아니라는 이유로 1년 4개월이 넘도록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

또한 이들이 줄기차게 요구해왔던 동아백지광고 사태 및 언론인 축출관련 진상규명 조사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제는 백발이 된 전현직 언론인들이 31년동안 단 한 번의 빠짐없이 3월 17일이면 광화문 거리로 나서는 이유다.

이날 행사는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을 비롯한 동아투위 해직기자 60여명과 함세웅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신학림 전국언론노동조합 위원장, 김근태 열린우리당 최고위원 등이 참석해 2시간 동안 진행됐다.

동아투위는 31주년 특별성명을 통해 “오늘은 동아투위 위원들이 자유언론을 실천하려다 거리로 내몰린지 꼭 31년이 되는 날”이라며 “자유언론실천운동이 31년 전의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영원한 현재진행형의 운동이어야 함을 후배 언론인들에게 환기시키기 위해 이 자리에 다시 모였다”고 말했다.

이어 “민주화투쟁의 앞자리에 섰던 사람들에 대한 명예회복이나 보상은 정부의 당연한 책무"라며 "동아일보의 광고탄압과 그 뒤 자행된 야합과 굴종의 진실을 먼저 규명하는 것이 언론개혁의 첫걸음”이라고 강조했다.

동아사태 알린 '진동아굿' 31년만에 재현

이어 동아사태 이후 서울대와 이화여대 등 대학가에서 학생 연극패들에 의해 공연돼 유신권력과 언론사주의 유착관계를 폭로했던 ‘진동아굿’이 31년만에 다시 선보였다.

‘진동아굿’는 당시 동아일보 기자들이 정권과 사측의 보도지침을 거부하는 제작거부투쟁에 들어가면서 독자적으로 만들었던 ‘진짜 동아일보’의 제호로 31년 전 배우로 출연했던 박인배 한국민예총 상임이사가 직접 연출했다.

한편 전국언론노동조합과 한국기자협회, 한국프로듀서연합회는 이날부터 현역 언론인과 언론 노동자를 대상으로 ‘동아사태의 진상규명 및 전원복직’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에 들어갔다.

신학림 언론노조 위원장은 “31년 전 동아사태는 우리나라 언론노동운동의 시발점이었고 언론민주화의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라며 “오늘을 시작으로 서명운동과 함께 동아사태 진상규명을 위한 입법과 동아일보의 공식사죄를 촉구하는 투쟁에 들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동아투위는 대량해고 사태를 빚은 다음날인 75년 3월 18일에 해직기자, 피디, 방송제작자를 중심으로 결성됐고 이들이 주축이 돼 1980년대 민주언론협의회와 진보월간지 <말>지, 국민주 신문 <한겨레> 가 창간되는 등 한국언론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최병성 기자

댓글이 1 개 있습니다.

  • 0 0
    오오

    비교 해보세요 좋은 영상이에요.
    https://youtu.be/xMrz078PGX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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