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의 '참 제자', 판사 한기택
'목숨 걸고 재판했던 판사' '소수에게 따듯했던 명판사'
"동네 아주머니들이 남편이 판사라는 걸 알고 이것저것 물어볼 때가 많았어요. 남편은 한사코 그런 이야기는 듣지 말라고 했어요. 판사는 사적으로 법률상담을 해서는 안 된다는 거였어요."
1년 전인 지난해 7월24일 가족과 함께 말레이시아로 여름 휴가를 떠났다가 심장마비로 숨지는 바람에 마흔여섯의 나이에 생을 마감한 고 한기택 대전고법 부장판사의 추모집에서 부인 이상연씨는 이렇게 한 부장에 대한 기억을 추스르고 있다.
관용차를 가족에게 한번도 태워주지 않은 딸각발이
고지식한 판사의 '지나치게' 강직한 모습쯤으로 이해될 수 있는 여러 사연들이 추모집으로 출간됐다. 최근 발간된 추모집의 제목은 <판사 한기택>. 고인의 짧은 생에 대한 소개와 함께 동료 법관들의 회고담, 그가 남긴 일기와 편지 등으로 꾸며져 있다.
부인과 주변 사람들의 기억에 한 부장은 판사로서 공과 사를 엄격하게 구분했던 사람으로 남아있다. 법원에서만 판사였지 법원 밖에선 '판사 한기택'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판사라는 사실조차 모른 채 만나고 지낼 정도였다.
고인이 다니던 분당의 성 바오로 성당의 이 마르셀 수녀는 "매주 미사 전례 사회를 하던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지만, 그가 판사였다는 사실을 신문의 부음기사를 보고 비로소 알았다"며 "거의 모든 성당식구들도 그가 판사였다는 사실도, 어떤 일을 행하였다는 사실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고 겸손으로 일관한 그를 추모하고 있다.
가족들에 따르면 그는 친척, 친지들에게도 엄격했다.
"친지들에게 법률에 관한 것을 상담해주는 것도, 조언해 주는 것도 법에 걸린다고 했어요. 내 친구가 아들이 경찰서에 들어갔다며 얘기를 해달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기택이는 '제가 그런 것은 할 수도 없고 그런 것을 해주면 안 됩니다'라고 했어요."
한 부장의 어머니는 이 일이 있은 후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내 아들 기택이가 판사라는 말을 하지 않고 살았다"고 지난 일을 털어놓는다.
다시 부인의 전언.
"한번은 동사무소 여직원이 전화를 해 법률상담을 했어요. 갑자기 전화를 받은 남편이 얼떨결에 몇마디 해줬나 본데, 그 뒤 그 직원이 '고맙다'면서 델몬트 주스 2병을 사 가지고 집엘 찾아 왔어요. 남편이 안 받겠다고 거의 싸우다시피 해서 돌려보냈는데, 남편이 집 앞에서 예의 그 싸늘한 표정에 차가운 목소리로 '가지고 가세요'라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고법부장은 차관급의 높은 자리로, 관용차가 제공된다.
한 부장도 작년 2월 고법부장으로 승진해 관용차를 지급받았다. 그러나 그는 가족들에게 '단 1m도' 이 차를 태워주지 않았다.
고인의 딸이 장례식후 아버지의 지인들에게 보낸 '감사의 글'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대전에 내려 가시면서 받으신 관용차. 저는 그 차에 한번도 타본 적이 없습니다. 주말이면 항상 대전에서 분당까지 차를 몰고 올라오시지만, 대전 번호판을 달고 있는 그 차는 주차장에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이 차는 출퇴근할 때 쓰라고 주는 것이라며 단 1m도 태워주지 않으셨던 것이 저는 답답하고 섭섭했습니다."
'목숨 걸고 재판하는 판사'
19년간 법관생활을 했던 한 부장은 재판에 임하는 자세와 각오도 남달랐다고 한다. 후배판사들은 그가 모든 것을 다 바쳐 오로지 재판에만 열중한 탓에 '목숨 걸고 재판하는 판사'로 고인을 기억하고 있다. 실제로 그는 중견법관이 된 후 후배판사들에게 "목숨 걸고 재판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
고인이 내린 판결중에 유독 사회적 약자와 국민의 기본권에 충실한 판결이 많은 것도 그의 판사로서의 이런 소신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서울행정법원 부장판사로 있을 때인 2004년 8월 선고한 이른바 '왕따' 사건. 고인은 이 사건에서 "군복무중 '왕따'를 당해 정신병을 얻었다는 전역자를 국가유공자로 인정하라"고 원고 승소판결했다.
고인은 또 그해 12월엔 "나도 모르는 사람들이 사적으로 내 범죄경력을 조회하는 바람에 사생활을 침해당했다"며 45세의 남자가 경찰청장을 상대로 정보의 공개를 요구한 사건에서 "범죄경력을 조회한 횟수, 일시, 목적, 조회자 등을 주민등록번호만 빼고 공개하라"고 판결해 화제가 됐다. 이 판결은 국가기관에서 관행적으로 벌어지던 불법을 바로잡은 판결로 평가되고 있다.
얼마전 헌법재판소가 위헌결정을 내려 시각장애인들이 반발하는 등 논란이 인 '안마사에 관한 규칙'에 대해서도 고인은 2년전인 2004년 9월 위헌이 아니라고 판결, 그가 얼마나 약자의 입장을 배려하려 했는지 짐작케 한다.
시각장애인에게만 안마사 자격을 주고 있어 위헌 여부가 다퉈진 이 사건에서 고인은 "비장애인의 직업선택의 자유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시각장애인의 생존권보다 더 중요할 수는 없다"고 판시했다. 헌재와 판단이 달랐지만, 당시는 헌재 결정이 나오기 전이어서 판결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가인의 '참 제자'
법조브로커 비리 수사로 연일 법조계에 대한 비판이 들끓고 있는 가운데 올곧게 살다간 고인의 얘기는 법조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겐 작은 위안일지 모른다.
우리법연구회 활동 등을 함께 하며 그와 가깝게 지냈던 박시환 대법관은 추모의 글에서 영장 문제로 마찰이 일어 검찰에 항의의사를 전달할 때의 고인의 의연함을 얘기하고, 판사로서 따뜻했던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떠올리고 있다. 또 고인은 법관인사 제도 개선 등 법원내의 민감한 주제에서 "조금도 물러섬이 없이 소임을 다했다"고 그의 치열함을 기리고 있다.
"평생 법과 끊임없이 긴장하면서 살았던 한기택의 삶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법을 싫어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 같습니다."
고인과 사법시험 동기로 이 책의 발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김종훈 대법원장 비서실장은 "추모집이 법과 더불어 사는, 법을 공부하려는 사람들에게 용기와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고 책의 발문에서 적고 있다.
한 마디로 '판사 한기택'은 가인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이 제시한 '참 법관'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간 가인의 '참 제자'였다.
1년 전인 지난해 7월24일 가족과 함께 말레이시아로 여름 휴가를 떠났다가 심장마비로 숨지는 바람에 마흔여섯의 나이에 생을 마감한 고 한기택 대전고법 부장판사의 추모집에서 부인 이상연씨는 이렇게 한 부장에 대한 기억을 추스르고 있다.
관용차를 가족에게 한번도 태워주지 않은 딸각발이
고지식한 판사의 '지나치게' 강직한 모습쯤으로 이해될 수 있는 여러 사연들이 추모집으로 출간됐다. 최근 발간된 추모집의 제목은 <판사 한기택>. 고인의 짧은 생에 대한 소개와 함께 동료 법관들의 회고담, 그가 남긴 일기와 편지 등으로 꾸며져 있다.
부인과 주변 사람들의 기억에 한 부장은 판사로서 공과 사를 엄격하게 구분했던 사람으로 남아있다. 법원에서만 판사였지 법원 밖에선 '판사 한기택'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판사라는 사실조차 모른 채 만나고 지낼 정도였다.
고인이 다니던 분당의 성 바오로 성당의 이 마르셀 수녀는 "매주 미사 전례 사회를 하던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지만, 그가 판사였다는 사실을 신문의 부음기사를 보고 비로소 알았다"며 "거의 모든 성당식구들도 그가 판사였다는 사실도, 어떤 일을 행하였다는 사실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고 겸손으로 일관한 그를 추모하고 있다.
가족들에 따르면 그는 친척, 친지들에게도 엄격했다.
"친지들에게 법률에 관한 것을 상담해주는 것도, 조언해 주는 것도 법에 걸린다고 했어요. 내 친구가 아들이 경찰서에 들어갔다며 얘기를 해달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기택이는 '제가 그런 것은 할 수도 없고 그런 것을 해주면 안 됩니다'라고 했어요."
한 부장의 어머니는 이 일이 있은 후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내 아들 기택이가 판사라는 말을 하지 않고 살았다"고 지난 일을 털어놓는다.
다시 부인의 전언.
"한번은 동사무소 여직원이 전화를 해 법률상담을 했어요. 갑자기 전화를 받은 남편이 얼떨결에 몇마디 해줬나 본데, 그 뒤 그 직원이 '고맙다'면서 델몬트 주스 2병을 사 가지고 집엘 찾아 왔어요. 남편이 안 받겠다고 거의 싸우다시피 해서 돌려보냈는데, 남편이 집 앞에서 예의 그 싸늘한 표정에 차가운 목소리로 '가지고 가세요'라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고법부장은 차관급의 높은 자리로, 관용차가 제공된다.
한 부장도 작년 2월 고법부장으로 승진해 관용차를 지급받았다. 그러나 그는 가족들에게 '단 1m도' 이 차를 태워주지 않았다.
고인의 딸이 장례식후 아버지의 지인들에게 보낸 '감사의 글'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대전에 내려 가시면서 받으신 관용차. 저는 그 차에 한번도 타본 적이 없습니다. 주말이면 항상 대전에서 분당까지 차를 몰고 올라오시지만, 대전 번호판을 달고 있는 그 차는 주차장에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이 차는 출퇴근할 때 쓰라고 주는 것이라며 단 1m도 태워주지 않으셨던 것이 저는 답답하고 섭섭했습니다."
'목숨 걸고 재판하는 판사'
19년간 법관생활을 했던 한 부장은 재판에 임하는 자세와 각오도 남달랐다고 한다. 후배판사들은 그가 모든 것을 다 바쳐 오로지 재판에만 열중한 탓에 '목숨 걸고 재판하는 판사'로 고인을 기억하고 있다. 실제로 그는 중견법관이 된 후 후배판사들에게 "목숨 걸고 재판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
고인이 내린 판결중에 유독 사회적 약자와 국민의 기본권에 충실한 판결이 많은 것도 그의 판사로서의 이런 소신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서울행정법원 부장판사로 있을 때인 2004년 8월 선고한 이른바 '왕따' 사건. 고인은 이 사건에서 "군복무중 '왕따'를 당해 정신병을 얻었다는 전역자를 국가유공자로 인정하라"고 원고 승소판결했다.
고인은 또 그해 12월엔 "나도 모르는 사람들이 사적으로 내 범죄경력을 조회하는 바람에 사생활을 침해당했다"며 45세의 남자가 경찰청장을 상대로 정보의 공개를 요구한 사건에서 "범죄경력을 조회한 횟수, 일시, 목적, 조회자 등을 주민등록번호만 빼고 공개하라"고 판결해 화제가 됐다. 이 판결은 국가기관에서 관행적으로 벌어지던 불법을 바로잡은 판결로 평가되고 있다.
얼마전 헌법재판소가 위헌결정을 내려 시각장애인들이 반발하는 등 논란이 인 '안마사에 관한 규칙'에 대해서도 고인은 2년전인 2004년 9월 위헌이 아니라고 판결, 그가 얼마나 약자의 입장을 배려하려 했는지 짐작케 한다.
시각장애인에게만 안마사 자격을 주고 있어 위헌 여부가 다퉈진 이 사건에서 고인은 "비장애인의 직업선택의 자유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시각장애인의 생존권보다 더 중요할 수는 없다"고 판시했다. 헌재와 판단이 달랐지만, 당시는 헌재 결정이 나오기 전이어서 판결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가인의 '참 제자'
법조브로커 비리 수사로 연일 법조계에 대한 비판이 들끓고 있는 가운데 올곧게 살다간 고인의 얘기는 법조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겐 작은 위안일지 모른다.
우리법연구회 활동 등을 함께 하며 그와 가깝게 지냈던 박시환 대법관은 추모의 글에서 영장 문제로 마찰이 일어 검찰에 항의의사를 전달할 때의 고인의 의연함을 얘기하고, 판사로서 따뜻했던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떠올리고 있다. 또 고인은 법관인사 제도 개선 등 법원내의 민감한 주제에서 "조금도 물러섬이 없이 소임을 다했다"고 그의 치열함을 기리고 있다.
"평생 법과 끊임없이 긴장하면서 살았던 한기택의 삶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법을 싫어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 같습니다."
고인과 사법시험 동기로 이 책의 발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김종훈 대법원장 비서실장은 "추모집이 법과 더불어 사는, 법을 공부하려는 사람들에게 용기와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고 책의 발문에서 적고 있다.
한 마디로 '판사 한기택'은 가인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이 제시한 '참 법관'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간 가인의 '참 제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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