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P모건, 두차례 세계대전-대공황으로 '미국 부 40%' 독식
[170년 비밀의 역사를 찾아서(중)] 공황과 전쟁의 법칙
아들 잭 모건 시대의 개막
1913년 JP모건이 초대형 사건이 발생했다. 창업주인 존 피어폰트 모건이 이집트에서 얻은 병이 악화되어, 요양중이던 로마에서 75세의 나이로 사망한 것이다.
하지만 그에겐 든든한 후계자가 있었다. 아들 잭 모건이었다. 당시 세계의 금융센터였던 런던에서 금융수업을 받고 있던 잭 모건은 급거 귀국해 JP모건의 새 주인이 되었다. 그는 1943년 병으로 죽을 때까지 31년 동안 부친 이상으로 모건 왕국을 확장시켜나갔다.
존 피어폰트 모건은 매우 카리스마가 강한 인물로, 남에게 권한을 위임하는 일 없이 세세한 부문까지 일일이 챙기는 스타일이었다. 번잡한 사교생활을 싫어했고 생활도 검소한 편이었다.
그러나 아들 잭 모건은 반대였다. 그는 연일 호사스런 파티를 즐기는 등 사교생활을 좋아했고, 자기의 사교친구들 가운데 아이비 리그 출신을 파트너로 끌어들여 경영에 참여시켰다. 잭 모건이 끌어들인 파트너들은 아이비 리그 출신이라는 점 외에 백인, 남성, 공화당, 친영파, 감독교 회원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잭 모건은 또 담보를 중시했던 선친과는 달리 대출해줄 때 상대방의 신용과 성격을 가장 중시했다. 그는 대출기준이 무엇이냐는 언론의 질문에 “믿지 못할 사람이라면 어떤 담보물을 가져온다 해도 한 푼도 빌려주지 않겠다”고 잘라 말했다.
전쟁상인 JP모건, 1차 세계대전때 떼돈 벌어
잭 모건이 선친의 사업을 물려받은 다음해인 1914년, JP모건에게 또다시 대도약의 계기가 왔다. 7월 28일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것이다. 자본에게 ‘위기는 곧 기회’였다. 잭 모건도 선친 못지 않은 동물적 후각의 소유자였다. 그의 선친이 남북전쟁 과정에서 떼돈을 벌었듯, 잭 모건도 제1차 세계대전을 축재의 기회로 최대한 활용했다.
미국은 전쟁 초기에 국내 반발여론을 명분으로 직접 참전하지 않고, 대신 후방기지로서 무기 공급을 맡았다. 몸은 다치지 않고 부수익만 챙기겠다는 ‘엉클 샘’의 약은 상술이었다. 그러나 발등에 불이 떨어진 영국 정부는 1915년 초 월가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JP모건을 전시 자금 조달 및 무기매입 대리인으로 지정했고, 5월에는 프랑스가 그뒤를 따랐다.
잭 모건은 남북전쟁 때부터 무기공급 사업을 같이 했던 미국 최대의 화학독점기업 뒤퐁과 손잡고 미국 전역에 다이너마이트 공장을 세우고 화약류를 대량생산해 유럽에 공급했다. 유럽연합군이 대부분의 탄약을 미국에서 공급받은 까닭에 뒤퐁의 화약 생산량은 자그마치 전쟁 전의 26배로 껑충 뛰어올랐다.
이같은 과정에서 JP모건은 전시공채 판매를 통해 엄청난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그 무렵 영국과 프랑스 등 연합국은 전쟁을 치르고 있었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전쟁비용을 조달할 길이 없었다. 이 전시자금 조달을 자임하고 나선 이가 바로 잭 모건이었다.
그는 ‘자유채권’이라 이름 붙여진 전시공채를 발행했다. 동시에 평소 영화제작비를 공급해주던 까닭에 자신의 영향권 아래 놓여 있던 할리우드의 찰리 채플린 등 유명 배우들을 선정요원으로 총동원해 이 채권을 국내외에 불티나게 팔아치웠다. 제1차 세계대전 5년 동안 모건이 이런 식으로 조성해 연합군에 빌려 준 돈은 10억 달러의 거금이었다.
또한 연합국의 무기매입 대리인기도 했던 모건은 이 기간중에 뒤퐁 등에서 사들인 군수물자 30억 달러어치를 연합국에 공급했다.
JP모건은 이 과정에 전시공채 판매를 통해 높은 수수료를 챙기는 동시에, 자신이 조성한 자금으로 동업자인 뒤퐁과 계열사였던 U.S. 스틸 등에게서 화약과 대포 등 각종 군수물자를 독점가격으로 비싸게 사들이는 수법으로 이중삼중으로 부를 불려나갔다.
전쟁과정에서 큰 이익을 올린 JP모건은 그뒤 전세계를 상대로 미국을 대표하는 최고 공신력의 은행으로서 전시공채 등 위험성이 큰 ‘정크본드(junk bond:투자 적격 신용등급 이하의 채권)’ 판매 중개에 적극 나섰고, 그러는 과정에 개발도상국이던 일본 이탈리아 벨기에 들에도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지난 1998년 외환위기때 우리나라 정부 및 국영기업이 발행한 총 40억 달러의 국공채의 판매 주간사를 JP모건이 맡아 짭짤한 수수료 수입을 올릴 수 있었던 것도 이같은 역사적 과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JP모건이 1차 세계대전때 유럽을 상대로 전시채권을 팔았다는 사실은 단지 JP모건이 떼돈을 벌었다는 의미 이상의 중차대한 세계사적 의미를 갖는다. 그동안 런던금융시장이 쥐고 있던 세계금융 패권이 급속히 미국 월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월가 패권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 중심에 있는 금융파워가 다름아닌 JP모건이었다.
JP모건, 1929년 대공황으로 미국기업의 40% 장악하다
1929년 10월 24일, 뉴욕증시의 주가폭락을 시작으로 세계대공황이 일어났다.
U.S. 스틸, 제너럴 일렉트릭, ATT 등 JP모건을 중심축으로 하는 모건 그룹도 주가가 폭락했다. JP모건 그룹도 공황 초기엔 내수경제가 붕괴된 까닭에 3년 동안 법인세를 납부하지 못할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다.
대공황의 파괴력은 가공스러웠다.
공황이 가장 극심했던 1929J년부터 1933년까지 4년 사이에 2만5천개의 은행 가운데 9천개가 쓰러졌다. 도산하지 않은 은행의 고객들도 앞다퉈 은행에서 예금을 빼내 장롱 속에 숨겨두는 이른바 ‘현금퇴장’사태가 일어났다. 은행들도 자신감을 완전 상실, 기업과 개인에 대한 대출을 중단했다. 최근 전세계적으로 목격되고 있는 지독한 ‘신용경색’이 발생한 것이다.
금융이 막히자 제조업의 양대축으로 고용효과가 가장 큰 건설업과 자동차업계의 가동률이 50% 이하로 떨어지면서 공황 전에는 260여만 명이던 실업자 수가 공황이 정점에 달했던 1933년에는 1천300만 명으로 급증했다.
하지만 대공황은 JP모건에게 대팽창의 기회였다. JP모건은 공황으로 쓰러진 수많은 기업과 은행들을 모두 빨아들였다. 그 결과는 엄청났다.
어느 정도 공황의 충격이 가라앉은 1930년대 중반의 JP모건의 지배 아래로 들어온 기업으로는 자산규모가 1억 달러 이상이던 초대형 기업만 해도 ‘JP모건’과 ‘퍼스트 내셔널 뱅크 등 은행 14개, 생명보험회사 4개, 제너럴일렉트릭(GE)과 ATT 등 전기 전화 가스 등 공기업 8개, 철도회사 4개, U.S. 스틸 등 자동차 철강 제조업체 12개사에 이르렀다.
여기에 공황때 흡수한 중견기업까지 합하면 JP모건 산하의 기업체 수는 440개사였으며, 자산총액은 770억 달러에 달했다. 이는 미국 상장기업 200개사의 자산총액 가운데 40%에 가까운 엄청난 액수였다. 미국 부의 40%를 한 손에 움켜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JP모건 더 팽창
공황으로 거대한 부를 축적한 JP모건에게 더 큰 축재의 기회가 왔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세계대공황의 필연적인 귀착점이었다.
세계대공황은 전세계의 수요를 일시에 몰살시켰다. 세계경제가 공황에서 완전히 탈출하려면 세계적인 규모의 새로운 수요 창출이 필요했다. 미국 또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비록 루즈벨트 대통령이 테네시 개발계획 등 뉴딜 정책을 통해 인위적인 수요를 창출함으로써 위기의 강도를 약화시키는 데 성공하기는 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미봉책에 불과했다.
일거에 거대한 수요를 창출할 '뭔가'가 필요했다. 바로 세계대전이었다.
자본이 이처럼 대규모 신규수요를 갈망하던 시점에 독일의 유럽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앞서 제1차 세계대전 때 엄청난 재미를 보았던 JP모건 등이 내심 쾌재를 불렀음을 두말할 필요도 없다.
1941년 일본의 진주만 습격으로 미국이 본격적으로 참전하게 되면서 JP모건은 1차 세계대전때와 마찬가지로 즉각 전시공채 판매 등을 통해 부를 눈덩이처럼 불려나갔다.
미국 정부가 제2차 세계대전중 쏟아부은 전비는 모두 2천450억 달러에 이르렀다. 이는 전쟁 발발전 미국 정부의 50년 예산과 맞먹는 천문학적 금액이었다. 전비는 대부분 전시공채 판매를 통해 조달되었으며, 미국이 발행한 전시공채의 절반 이상을 JP모건사이 독식하며 엄청난 액수의 수수료를 챙겼다.
전쟁때마다 JP모건의 부는 눈덩이처럼 커져간 것이다. <계속>
1913년 JP모건이 초대형 사건이 발생했다. 창업주인 존 피어폰트 모건이 이집트에서 얻은 병이 악화되어, 요양중이던 로마에서 75세의 나이로 사망한 것이다.
하지만 그에겐 든든한 후계자가 있었다. 아들 잭 모건이었다. 당시 세계의 금융센터였던 런던에서 금융수업을 받고 있던 잭 모건은 급거 귀국해 JP모건의 새 주인이 되었다. 그는 1943년 병으로 죽을 때까지 31년 동안 부친 이상으로 모건 왕국을 확장시켜나갔다.
존 피어폰트 모건은 매우 카리스마가 강한 인물로, 남에게 권한을 위임하는 일 없이 세세한 부문까지 일일이 챙기는 스타일이었다. 번잡한 사교생활을 싫어했고 생활도 검소한 편이었다.
그러나 아들 잭 모건은 반대였다. 그는 연일 호사스런 파티를 즐기는 등 사교생활을 좋아했고, 자기의 사교친구들 가운데 아이비 리그 출신을 파트너로 끌어들여 경영에 참여시켰다. 잭 모건이 끌어들인 파트너들은 아이비 리그 출신이라는 점 외에 백인, 남성, 공화당, 친영파, 감독교 회원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잭 모건은 또 담보를 중시했던 선친과는 달리 대출해줄 때 상대방의 신용과 성격을 가장 중시했다. 그는 대출기준이 무엇이냐는 언론의 질문에 “믿지 못할 사람이라면 어떤 담보물을 가져온다 해도 한 푼도 빌려주지 않겠다”고 잘라 말했다.
전쟁상인 JP모건, 1차 세계대전때 떼돈 벌어
잭 모건이 선친의 사업을 물려받은 다음해인 1914년, JP모건에게 또다시 대도약의 계기가 왔다. 7월 28일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것이다. 자본에게 ‘위기는 곧 기회’였다. 잭 모건도 선친 못지 않은 동물적 후각의 소유자였다. 그의 선친이 남북전쟁 과정에서 떼돈을 벌었듯, 잭 모건도 제1차 세계대전을 축재의 기회로 최대한 활용했다.
미국은 전쟁 초기에 국내 반발여론을 명분으로 직접 참전하지 않고, 대신 후방기지로서 무기 공급을 맡았다. 몸은 다치지 않고 부수익만 챙기겠다는 ‘엉클 샘’의 약은 상술이었다. 그러나 발등에 불이 떨어진 영국 정부는 1915년 초 월가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JP모건을 전시 자금 조달 및 무기매입 대리인으로 지정했고, 5월에는 프랑스가 그뒤를 따랐다.
잭 모건은 남북전쟁 때부터 무기공급 사업을 같이 했던 미국 최대의 화학독점기업 뒤퐁과 손잡고 미국 전역에 다이너마이트 공장을 세우고 화약류를 대량생산해 유럽에 공급했다. 유럽연합군이 대부분의 탄약을 미국에서 공급받은 까닭에 뒤퐁의 화약 생산량은 자그마치 전쟁 전의 26배로 껑충 뛰어올랐다.
이같은 과정에서 JP모건은 전시공채 판매를 통해 엄청난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그 무렵 영국과 프랑스 등 연합국은 전쟁을 치르고 있었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전쟁비용을 조달할 길이 없었다. 이 전시자금 조달을 자임하고 나선 이가 바로 잭 모건이었다.
그는 ‘자유채권’이라 이름 붙여진 전시공채를 발행했다. 동시에 평소 영화제작비를 공급해주던 까닭에 자신의 영향권 아래 놓여 있던 할리우드의 찰리 채플린 등 유명 배우들을 선정요원으로 총동원해 이 채권을 국내외에 불티나게 팔아치웠다. 제1차 세계대전 5년 동안 모건이 이런 식으로 조성해 연합군에 빌려 준 돈은 10억 달러의 거금이었다.
또한 연합국의 무기매입 대리인기도 했던 모건은 이 기간중에 뒤퐁 등에서 사들인 군수물자 30억 달러어치를 연합국에 공급했다.
JP모건은 이 과정에 전시공채 판매를 통해 높은 수수료를 챙기는 동시에, 자신이 조성한 자금으로 동업자인 뒤퐁과 계열사였던 U.S. 스틸 등에게서 화약과 대포 등 각종 군수물자를 독점가격으로 비싸게 사들이는 수법으로 이중삼중으로 부를 불려나갔다.
전쟁과정에서 큰 이익을 올린 JP모건은 그뒤 전세계를 상대로 미국을 대표하는 최고 공신력의 은행으로서 전시공채 등 위험성이 큰 ‘정크본드(junk bond:투자 적격 신용등급 이하의 채권)’ 판매 중개에 적극 나섰고, 그러는 과정에 개발도상국이던 일본 이탈리아 벨기에 들에도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지난 1998년 외환위기때 우리나라 정부 및 국영기업이 발행한 총 40억 달러의 국공채의 판매 주간사를 JP모건이 맡아 짭짤한 수수료 수입을 올릴 수 있었던 것도 이같은 역사적 과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JP모건이 1차 세계대전때 유럽을 상대로 전시채권을 팔았다는 사실은 단지 JP모건이 떼돈을 벌었다는 의미 이상의 중차대한 세계사적 의미를 갖는다. 그동안 런던금융시장이 쥐고 있던 세계금융 패권이 급속히 미국 월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월가 패권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 중심에 있는 금융파워가 다름아닌 JP모건이었다.
JP모건, 1929년 대공황으로 미국기업의 40% 장악하다
1929년 10월 24일, 뉴욕증시의 주가폭락을 시작으로 세계대공황이 일어났다.
U.S. 스틸, 제너럴 일렉트릭, ATT 등 JP모건을 중심축으로 하는 모건 그룹도 주가가 폭락했다. JP모건 그룹도 공황 초기엔 내수경제가 붕괴된 까닭에 3년 동안 법인세를 납부하지 못할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다.
대공황의 파괴력은 가공스러웠다.
공황이 가장 극심했던 1929J년부터 1933년까지 4년 사이에 2만5천개의 은행 가운데 9천개가 쓰러졌다. 도산하지 않은 은행의 고객들도 앞다퉈 은행에서 예금을 빼내 장롱 속에 숨겨두는 이른바 ‘현금퇴장’사태가 일어났다. 은행들도 자신감을 완전 상실, 기업과 개인에 대한 대출을 중단했다. 최근 전세계적으로 목격되고 있는 지독한 ‘신용경색’이 발생한 것이다.
금융이 막히자 제조업의 양대축으로 고용효과가 가장 큰 건설업과 자동차업계의 가동률이 50% 이하로 떨어지면서 공황 전에는 260여만 명이던 실업자 수가 공황이 정점에 달했던 1933년에는 1천300만 명으로 급증했다.
하지만 대공황은 JP모건에게 대팽창의 기회였다. JP모건은 공황으로 쓰러진 수많은 기업과 은행들을 모두 빨아들였다. 그 결과는 엄청났다.
어느 정도 공황의 충격이 가라앉은 1930년대 중반의 JP모건의 지배 아래로 들어온 기업으로는 자산규모가 1억 달러 이상이던 초대형 기업만 해도 ‘JP모건’과 ‘퍼스트 내셔널 뱅크 등 은행 14개, 생명보험회사 4개, 제너럴일렉트릭(GE)과 ATT 등 전기 전화 가스 등 공기업 8개, 철도회사 4개, U.S. 스틸 등 자동차 철강 제조업체 12개사에 이르렀다.
여기에 공황때 흡수한 중견기업까지 합하면 JP모건 산하의 기업체 수는 440개사였으며, 자산총액은 770억 달러에 달했다. 이는 미국 상장기업 200개사의 자산총액 가운데 40%에 가까운 엄청난 액수였다. 미국 부의 40%를 한 손에 움켜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JP모건 더 팽창
공황으로 거대한 부를 축적한 JP모건에게 더 큰 축재의 기회가 왔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세계대공황의 필연적인 귀착점이었다.
세계대공황은 전세계의 수요를 일시에 몰살시켰다. 세계경제가 공황에서 완전히 탈출하려면 세계적인 규모의 새로운 수요 창출이 필요했다. 미국 또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비록 루즈벨트 대통령이 테네시 개발계획 등 뉴딜 정책을 통해 인위적인 수요를 창출함으로써 위기의 강도를 약화시키는 데 성공하기는 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미봉책에 불과했다.
일거에 거대한 수요를 창출할 '뭔가'가 필요했다. 바로 세계대전이었다.
자본이 이처럼 대규모 신규수요를 갈망하던 시점에 독일의 유럽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앞서 제1차 세계대전 때 엄청난 재미를 보았던 JP모건 등이 내심 쾌재를 불렀음을 두말할 필요도 없다.
1941년 일본의 진주만 습격으로 미국이 본격적으로 참전하게 되면서 JP모건은 1차 세계대전때와 마찬가지로 즉각 전시공채 판매 등을 통해 부를 눈덩이처럼 불려나갔다.
미국 정부가 제2차 세계대전중 쏟아부은 전비는 모두 2천450억 달러에 이르렀다. 이는 전쟁 발발전 미국 정부의 50년 예산과 맞먹는 천문학적 금액이었다. 전비는 대부분 전시공채 판매를 통해 조달되었으며, 미국이 발행한 전시공채의 절반 이상을 JP모건사이 독식하며 엄청난 액수의 수수료를 챙겼다.
전쟁때마다 JP모건의 부는 눈덩이처럼 커져간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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