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가 29일 사설을 통해 '인혁당 사법살인' 판결을 계기로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유신시절 긴급조치 위반 판결을 내린 판사들의 이름을 이번 주중 공개하려는 데 대해 강력반대 입장을 밝혔다.
"사법부뿐 아니라 행정부-입법부-학계-언론도 유신체제 수용"
<중앙일보>는 이날 `긴급조치 판사 이름 공개, 실익 없다'는 사설을 통해 "과거사위가 1970년대 긴급조치 판결사례 1412건의 내용과 담당 판사를 공개할 것이라 한다"며 "당시 법원은 긴급조치 위반자에게 거의 기계적인 판결을 내렸다. 물론 긴급조치는 대표적인 반민주.인권침해 제도였다. 술집.강의실.길거리에서 유신정권을 비판했다가 실형을 선고받은 사례도 적잖다. 대부분의 판사가 이런 법에 저항하지 못하고 자구(字句)대로 형을 선고했으니 지금 '반민주' 법관이라 공격받을지 모른다"고 주장했다.
사설은 "그러나 시대에는 시대마다 사정과 상황이 있다. 집권자가 경제발전과 대북안보를 위해 개발독재를 결심했고 그 수단으로 유신헌법과 긴급조치를 택했다. 장기집권 사욕에 의해 이뤄진 측면이 분명하나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고도성장을 이룩했고 안보가 지켜진 것도 무시할 순 없다"며 "그런 시대상황에서 판사들은 국민투표로 통과된 헌법에 따른 긴급조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법부뿐 아니라 행정부.입법부, 그리고 학계.언론도 대부분 체제를 수용했다. 노무현 대통령도 자신이 그렇게 비판하는 유신헌법 책을 공부해 '유신 판사'가 됐다"고 노 대통령까지 인용하며 유신판사들을 감쌌다.
사설은 "과거사위가 독재시대의 인권침해를 조사하는 건 자연스럽다. 그러나 시대에 대한 이해와 조사결과 발표의 파장 등도 신중히 고려해야 한다"며 "어떤 판결문에도 판사의 이름이 적혀 있다. 그런데 30년이 지난 지금 특정 사안에 대해 이를 집단적으로 공개하는 것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당시의 판사들은 지금 대법관, 헌재 재판관 등 사법부 지도층인데 그들이 변화된 시대의 해석으로 단죄되는 것이 꼭 역사의 정의인가"라고 반문했다.
사설은 "한국의 현대사에는 빛과 그림자를 함께 안고 있는 회색지대가 많다. 과거사위가 서 있는 두 바퀴는 진실과 화해다. 진실을 캐내되 미래와 화해로 가는 방향이어야 한다"며 유신판사 명단 공개에 반대한다는 <중앙일보> 입장을 분명히 했다.
민복기 당시 대법원장 등 '침묵'으로 일관
<중앙일보> 주장은 일면 설득력이 있다. 과거 유신 철권통치하에 <중앙일보>도 시인했듯 사법부뿐 아니라 <중앙일보>를 비롯한 대다수 언론과 학계, 입법부, 행정부가 유신체제의 작동에 '기계적으로' 기여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유독 사법부에게만 '유신판사 명단 공개'라는 조치를 취하는 것은 형평성 차원에서 불공평하다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중앙일보> 주장이 보다 분명한 설득력을 갖기 위해선 그 전에 하나의 '전제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유신판결에 참여했던 모든 판-검사들은 아닐 지라도, 최소한 유신시절 장장 11년간(1968~1978) 대법원장을 지내며 유신헌법 제정 및 홍보에 앞장서고 인혁당 사법살인 판결을 주도한 민복기 당시 대법원장 등 사법 수뇌부의 뼈저린 '사과'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인혁당 사법살인시 유일하게 소수의견을 냈던 이일규 당시 대법원판사만이 최근 "당시 대법원의 잘못을 인정한다.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고 잘못을 시인했을 뿐, 나머지 생존자는 지금도 침묵하고 있다. 유신시절에 떵떵거리던 이들까지 과연 '유신시절의 피해자'라 볼 수는 없는 일이다.
<중앙일보> 등 언론은 흔히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는 일본을 독일-프랑스 등 유럽과 비교하며 질타한다. 독일은 히틀러 파쇼시절을 자아비판하며 히틀러 세력뿐 아니라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지식인들도 엄중처벌했고, 프랑스 역시 히틀러 치하에서 부역했던 지식인들에 대해 혹독한 처벌을 했다. 역사에 대한 지식인의 책무는 그만큼 크다는 의미에서다. <중앙일보> 등은 그러나 일본에 대해선 "독일-프랑스를 본받으라" 질타하면서, 국내세력에겐 관대하기 그지없다. 일본 우익들이 "한국언론은 이중적"이라고 비아냥대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유신 시절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거나 장기간 옥살이를 해야 했다. 법원조차 32년만에 '사법 살인'이었다고 인정한 인혁당의 8명 희생자를 비롯해, 술 마시다가 박정희 정권을 비난했다고 12년간 옥살이를 하기도 한 '막걸리 반공법' 피해자들도 수두룩하다. 그러나 당시 판결에 관여한 법조계인들은 '침묵'하고 있다. <중앙일보>는 이들의 이름을 공개해선 안된다고 '강변'하고 있다.
진정한 화해는 '가해자의 뼈저린 자기비판'이 전제됐을 때 가능하다는 사실을 이들은 아직 모르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박정희 정권 출범직후인 1963년부터 1968년까지 법무장관, 1968년부터 1978년까지 대법원장을 역임했던 민복기씨. 최근 건강이 나빠져 투병중이라 하나 자신의 재임기간중 행위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해 비판을 사고 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