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의 '유사시 하야' 가능성 언급 및 이재오 한나라당 최고위원의 '조기 하야' 주장이 맞물리면서, 그동안 수면 밑에서만 맴돌던 '하야'라는 단어가 마침내 수면 위로 치솟았다.
'대통령 하야'는 과거 4.19혁명에 따른 이승만 하야, 5.16 쿠데타에 따른 윤보선 하야, 12.12 쿠데타 결과에 따른 최규하 하야 등 '물리력이 수반된 특수상황'에서만 나타난 비상적 정치상황이었다. 이런 비상적 상황이 아닌 평화적 상황에서 대통령이 스스로 물러난다면 노 대통령 표현대로 "임기를 다 마치지 않은 첫 번째 대통령"이 될 것이다.
노 '조기 하야'시 최대 수혜자는 이명박
문제는 노 대통령이 경고한 '조기 하야'가 몰고올 엄청난 정치적 파괴력이다. 헌법 68조는 대통령이 하야시 무조건 60일이내에 대선을 실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잔여임기는 무관하다. 공직선거법의 보궐선거에 대한 '잔여임기 1년' 규정은 대통령선거에는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새로 뽑히는 대통령의 임기문제. 헌법학자 일각에서는 잔여임기만 대통령직을 수행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으나 중앙선관위 해석은 그렇지 않다. 중앙선관위는 28일 본지 질의에 대해 "헌법 68조와 공직선거법 35조1항에 따라 대통령의 궐위 등으로 인해 선거실시 사유가 확정된 때로부터 60일 이내에 선거를 실시한다"며 "후임자는 새로운 임기를 시작하게 된다"고 유권해석을 내렸다. 즉 새 대통령에게는 5년 임기가 보장된다는 얘기다.
사정이 이렇다면 노대통령이 경고한 '조기 하야'는 내년 대선판도를 밑둥째 흔드는 메가톤급 핵폭탄이 아닐 수 없다. 예컨대 노대통령이 하야를 선언하는 순간, 여야 대선주자들은 모두 '60일 이내의 선거운동'에 곧바로 돌입해야 한다. 당내경선이고 오픈프라이머리고 뭐고, 모든 게 의미 없어진다.
그러다 보면 내로라하는 대선후보가 없는 열린우리당은 말할 것도 없고, 한나라당까지도 박근혜-이명박-손학규 3룡 모두가 출마하는 대혼란이 야기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리고 최대 수혜자는 현재 지지율에서 가장 앞서고 있는 이명박 전시장이 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대목이 있다. 노 대통령의 '조기 하야' 가능성 시사 발언이 있기 직전에 나온 이재오 한나라당 최고위원의 '무조건부 조기 하야' 요구다. 이 최고위원은 자타가 공인하는 '이명박맨'. 그가 노 대통령에게 조기 하야를 촉구한 것은 조기 하야시 최대 수혜자가 이명박 전시장이 될 것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실제로 이 최고위원은 노 대통령 하야시 "헌법이 정한 절차에 따라 대선을 치루면 된다"고 말했다.
'60일 이내 차기대통령 선출'이라는 조항은 이명박 전시장에게 여러 모로 유리하다. 60일 이내에 대선을 치루면 개별후보 지지율이 결정적 변수가 된다. 정당 지지율보다도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다. 굳이 한나라당의 공식후보가 아니더라도 상관없다. 박근혜-손학규가 모두 출마해도 가장 당선 가능성이 높다.
또한 정치권에서 이 전시장의 최대 아킬레스건으로 꼽는 '검증 과정'도 무의미해진다. 쉽게 풀어 '검증할 시간'이 없어진다는 의미다. 이재오 최고위원이 노 대통령에게 '조기 하야'를 촉구한 의미는 이렇듯 심대하다.
노 대통령의 '조기 하야' 시사 발언을 접한 여야가 일제히 한걸음 물러서는 모양새를 보인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대통령 '조기 하야'는 최악의 직무유기
노 대통령의 성격은 예측불허다. 역대 대통령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김영삼, 김대중 전임대통령도 정권말기에 극심한 레임덕을 경험했다. 그러나 '탈당'은 했으나 '조기 하야'란 말은 입밖에 꺼내지도 않았다. 그 대신 청와대에서 '무서운 시간과의 싸움'을 해야 했다. 매일같이 달력을 넘기면서 "왜 이리 시간이 안가나"를 탄식하면서도 말이다. 이는 아무리 '식물대통령' 노릇하기가 고통스러우나 '조기 하야'란 일국의 최고 지도자로서 감히 생각도 할 수 없는 중차대한 직무유기이자, 정치파괴행위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면에서 노 대통령의 '조기 하야' 시사는 엄중히 비판받아 마땅하다. '탈당'이나 '거국내각'까지는 수용가능하다. 그러나 '조기 하야'는 대통령으로선 결코 꺼내지 말아야 할 단어이며, 이 최고위원같은 정치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선거는 향후 국정을 책임질 지도자를 뽑는 더없이 중차대한 정치행위다. '제대로 된 지도자'를 뽑아야 한다는 사실을 국민들은 절감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선 정말 '엄정한 검증'이 요구된다. 샅샅이 훑고 세세히 점검해야 한다. 그런데 노 대통령이 조기 하야를 하면 이 모든 게 불가능해진다. 두달 안에 무슨 검증이 가능하겠는가. 또하나의 '이미지 정치선거'가 재연될 게 불을 보듯 훤하다. 아울러 새 정권이 출범하더라도 그후 부단히 '정통성 논란'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권력 일각에선 노 대통령의 '조기 하야' 시사 발언이 '여야정 정치협상'을 거부한 한나라당과, 선상반란을 시작한 열린우리당 모두를 향한 최후통첩이란 해석을 하고 있다. 노 대통령이 실제로 '조기 하야'할 생각은 아니라는 전언이다. 한나라-열린당이 '여야정 정치협상'에 동참하면 그럴 생각이 없으며, 그만큼 노대통령이 직면한 상황이 절박하다는 얘기인 셈이다.
그렇다면 일단 불행중 다행이다. 노 대통령의 '조기 하야'는 국민이 나서 막아야 한다. 심정적으론 그렇지 않다 할 지라도 말이다. 그 대신 노 대통령은 철저한 중립내각을 구성해야 한다. 잡음이 일어나지 않을 그런 내각이 짜여져야 한다.
이같은 노력에는 특히 지지율 1위인 이명박 전시장을 비롯해 여야의 자칭타칭 대선후보들이 초정파적으로 적극 나서야 한다. 개개인의 이해득실을 떠나, 한국 정치사 더 나아가 한국 전체를 위해서라도 최악의 상황 전개는 막아야 할 의무가 이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인식조차 못하는 후보가 있다면 그에게는 '대통령 출마 자격'조차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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