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천조엔 날린 일본의 거품, 한국은?

[일본은행의 '통한의 거품 보고서'] '일본 전철론' 급속 확산

2006-11-16 20:11:53

박병원 재경부차관이 "집값에 거품이 없다"고 주장, 인터넷상에서 네티즌들로부터 뭇매를 맞고 있다. "이런 사람이 부동산정책을 만드니 대책이라고 나오는 족족 집값만 폭등시키는 게 아니냐"는 분노가 빗발치고 있다.

박 차관과는 달리 <블룸버그 통신>의 윌리엄 페섹 같은 경우는 "한국은 일본의 뒤를 따를 것"이라며 부동산 재앙의 도래를 예고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경제관료들은 IMF사태 발발직전까지 "한국경제의 펀더맨털(기초여건)은 튼튼하다"고 강변했듯, IMF 발발 10년차를 맞는 지금도 똑같은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박 차관 등의 강변에도 불구하고 경제계와 금융계, 학계 등에는 "일본의 전철을 밟는 게 아니냐"는 위기감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일본의 전철'을 밟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일본의 부동산거품은 어떻게 형성됐고, 거품이 파열하면서 일본경제에 어떤 타격을 가했는가.

일본은행의 통한의 ‘거품 보고서’

후쿠이 도시히코 일본은행 총재는 지난해 5월말 방한해 한 강연에서 "경제거품이 붕괴된 뒤에야 모든 거품은 붕괴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토로하며 "가격안정을 바탕으로 지속가능한 성장을 달성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한국에 대해 부동산거품 파열 위기를 경고한 바 있다.

추병직 발언에 놀라 청약을 받기 위해 길거리로 쏟아온 나와 북새통을 치루고 있는 인천검단의 시민들. ⓒ연합뉴스


1991년 부동산거품 파열후 일본은행은 여론의 호된 질타를 받아야 했다. 그로부터 10년이 되던 지난 2000년 1월25일 일본은행 산하의 금융연구소(IMES)는 <자산가격 거품과 금융정책: 1980년대 후반의 일본의 경험과 그 교훈>이란 한권의 두툼한 연구보고서를 발표했다. 1980년대 중반 “마침내 미국을 따라잡았다”며 “이제는 미국에 대해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이 돼야 한다”고 큰소리치던 것도 한 순간, 1991년 부동산 거품이 터지면서 길고긴 침체의 늪에 빠져들어야 했던 일본의 통렬한 자기반성 보고서였다.

“일본경제는 1980년대 후반 이래 버블 경제의 발생, 확대, 붕괴라는 형태로 극히 커다란 변화를 경험했다. 버블 경제는 자산가격의 급격한 상승, 경제활동의 과열, 통화-신용의 확대라는 세 가지에 의해 특징지어진다”는 ‘버블’ 정의로부터 시작되는 이 보고서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안겨준다.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 자산가격의 상승은 1982년경부터 시작돼 1985~1986년에 걸쳐 상승률이 높았다. 그러나 초기에는 자산가격의 상승이 비교적 완만했고, 1985~1986년은 ‘엔고 불황’기와 겹쳤기 때문에 이 시기를 버블기라고 보는 시각은 적다. 대다수가 “본격적인 버블이 시작됐다”고 보는 시기는 1987년부터다. 그 이유는 1987년이 경기가 회복기로 전환되는 동시에, 통화 공급-신용량의 확대 속도가 높아지면서 자산이 급격히 상승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버블 경제 붕괴가 시작된 해를 놓고선 닛케이지수가 최정점에 달했던 1989년말, 땅값이 최정점에 달했던 1990년, 경제기획청이 경기정점으로 판정한 1991년 2월 등 여러 설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1987~1990년 4년간을 ‘버블기’로 규정한다.

버블기의 첫 번째 특징은 주가, 지가로 대표되는 자산가격의 급격한 상승이다. 자산가격의 상승 자체는 1983년부터 시작됐으나 급격한 상승이 시작된 것은 1986년부터였다.

자산가격 중에서 가장 먼저 급격히 상승하기 시작한 것은 주가로, 1986년부터 상승하기 시작한 닛케이지수는 피크였던 1989년 12월말 3만8천9백15로, 플라자 합의가 도출된 1985년 9월(1만2천5백98)에 비해 3.1배나 올랐다.

땅값은 주가보다 약간 늦게 오르기 시작했다. 땅값 상승은 도쿄에서 오사카, 나고야 등 주요도시를 거쳐 전국으로 확산됐다. 일본부동산연구소가 6개 대도시 및 상업지역의 땅값을 집계한 ‘시가지(市街地)가격지수’의 경우 피크에 도달했던 1990년 9월, 5년 전인 1985년 9월에 비해 무려 4배가 올랐다. 이같은 자산가격의 급격한 상승은 2차 세계대전후 가장 큰 규모로, 주가와 지가를 합한 캐피탈 게인의 명목 GDP(국내총생산) 대비는 1986~1989년에 4백52%에 달했다. 이는 종전의 가장 높았던 기록인 1972~1973년의 1백93%를 크게 상회하는 것이었다.

일본 부동산거품을 만든 5가지 요소

상식밖 버블을 양산한 ‘메커니즘’은 무엇이었나.

보고서에 따르면, 서로 상호작용을 일으키며 일본경제를 초토화한 버블의 5대 요인은 금융기관의 공격적 대출 마케팅, 장기간에 걸친 금융규제 완화, 땅값 상승을 가속화시킨 잘못된 부동산 세제, 자체 리스크(위험) 관리 시스템의 부재, 일본 전체에 넘실대던 자신감 등이었다.

첫 번째, 거품을 만든 요인은 금융기관의 공격적 대출 마케팅이었다. 소니 등 일본 대기업의 자금조달은 1980년부터 급속히 자유화돼 주로 국제금융시장에서 낮은 금리로 자금을 조달하기 시작했다. 기업들의 높은 신인도로 인해 더 이상 일본 국내에서 자금을 조달할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반면에 은행의 증권업 진출은 제한적으로밖에 인정되지 않아, 그동안 대기업 대출에 의존하던 은행은 ‘대기업 이탈’로 수익률이 낮아지면서 강한 위기감을 갖게 됐다. 그 결과 은행들이 눈을 돌린 곳은 부동산 담보 대출과 중소기업 대출이었고, 특히 부동산 담보 대출이 폭증하면서 부동산 거품을 무서운 속도로 양산해냈다. (은행들은 집값이 계속 오를 것이라는 전제로, 집값의 1백20%까지 대출해줬다. ‘집값을 치루고 남은 20%로 가구도 새로 사고 차도 새로 사라’는 식이었다. 심한 경우에는 최고 2백%까지 해주기까지 했다. 또한 야쿠자나 빠찡꼬 업자 등 종전의 대출 기피대상들에게까지도 서슴지 않고 돈을 내줬다.)

두 번째 요인은, 장기간에 걸친 금융규제 완화였다. 금융규제 완화는 우선 금융조달 코스트이자)를 낮춰 투기꾼들의 자금조달을 쉽게 만들었다. 동시에 금융규제 완화는 주가를 상승시켜 증자, 전환사채 등을 통한 자금조달을 용이하게 만들었다. 또한 지가와 주가의 상승은 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토지와 주식의 자산가치를 높여 이를 담보로 한 은행 대출이나 사채발행을 쉽게 만들었다.

세 번째 요인은, 부동산 세제에 의한 지가 상승의 가속화이다. 당시 일본의 부동산 세제는 상대적으로 보유세는 낮고, 거래세는 높은 세율 체제를 구축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보유세가 낮으면 토지 보유 부담이 적어 토지 보유를 늘리는 작용을 한다. 동시에 거래세가 높으면 더욱 매매를 기피하게 만들면서 결과적으로 토지 공급을 줄여 땅값 폭등을 초래한다.

네 번째 요인은, 금융기관, 기업, 개인, 정부를 포함한 많은 경제주체들이 잇따라 투기에 가담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사전에 제어할 자체 리스크(위험) 관리 시스템이 없었다.

다섯 번째 요인은, 일본 전체에 넘실대던 자신감이었다. 일본의 경상수지 흑자 확대, 일본금융기관의 해외활동 확대, 일본기업의 잇따른 해외기업 인수 등 ‘세계최대 채권대국’다운 행보와, “일본형 경영이 미국형 경영을 앞질렀다”는 국제사회의 평가, ‘국제금융센터 도쿄’라는 당시 말이 대표하듯 외국 금융기관과 기업의 잇따른 도쿄 진출은 ‘부동산 불패’ 환상을 한층 심화시켰다.

허공으로 사라진 1천조엔

그러나 다섯 가지 요인 외에 결코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이 일본 중앙은행의 ‘저금리’였다. 일본은행은 부동산값 폭등에도 불구하고 1989년 5월까지만 해도 저금리 정책 기조를 이어나갔다. 1987년 10월19일 뉴욕 주가 대폭락이라는 ‘블랙 먼데이’에 국제적으로 공동대처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레이건 미국대통령과 다케시다 일본총리는 1988년 1월 정상회담에서 ‘저금리 정책 유지’에 합의했다. 그러나 미국이 얼마 뒤 블랙 먼데이 쇼크가 사라졌다고 판단되자 곧바로 금리를 인상해 거품 발생을 예방한 반면, 일본은 계속 저금리를 유지하다가 부동산 투기와 주가 급등이라는 자산 인플레를 한층 부추겼다.

그러다가 거품이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위험수위에 도달한 뒤에야 1989년 5월 일본은행은 콜금리를 2.5%에서 3.5%로 대폭 인상한 데 이어, 그해 10월과 12월에 걸쳐 각각 0.5%포인트씩 재인상하고, 다음해인 1990년에도 두 번에 걸쳐 각각 1%와 0.75%포인트를 또 인상했다. 그러나 이미 때가 늦었다. 보고서는 일본은행의 실패를 다음과 같이 반성하고 있다.

“금리인상을 조기에 행했다면 그렇지 않았을 경우에 비해 '거품의 자율적 붕괴 타이밍'을 다분히 앞당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 결과 버블 시대의 신용 팽창을 눌러 버블 붕괴후의 악영향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금리 인상을 조기에 단행했다 할지라도 인상폭이 적었다면, 자산가격은 상승을 거듭했을 것이다.”

하지만 반성은 이미 뒤늦었다. 1991년 터진 부동산 거품으로 2005년 현재까지 공중으로 사라진 돈의 총액은 무려 1천조엔(우리돈 9천조원)에 달했고, 일본은 2003년까지도 부동산 거품 파열의 후유증으로 극심한 고통을 받아야 했고 이 과정에 은행빚 내 집을 산 중산층들이 대거 몰락했다.

아직도 도쿄의 집값은 1990년 정점기의 3분의 1에서 헤매고 있으며, 무분별한 개발사업을 벌였던 지자체들은 아직도 파산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에 도래할 대재앙의 규모는? IMF사태때보다 충격 클 수도

경제 전문가들은 흔히 한국 경제를 ‘일본의 10분의 1’로 규정한다. 경제규모가 일본의 10분의 1 수준이라는 의미에서다. 최근엔 그 격차가 좀 좁혀지긴 했으나 큰 차이는 없다. 이 공식을 적용할 경우 부동산 거품이 파열됐을 때 우리 경제가 받게 될 타격도 막연하게나마 추정가능하다. 일본의 거품 파열 비용 1천조엔의 10분의 1인 1백조엔, 요즘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8백조원이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해 정부통계로 우리나라의 지가(땅값)는 2천조원을 넘어섰다. 부동산포탈 등은 이와 별도로 지난해 아파트값 총액이 1천조원을 넘어섰다고 분석하고 있다. 지난해이래도 집값, 땅값 폭등이 가파르게 진행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땅값, 집값 총액은 더 커졌을 게 분명하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최근 지난해 1.4분기 아파트값에 32%의 거품이 끼어있다고 밝힌 바 있다. 삼성연구소 추산대로 이들 땅값, 집값의 20~30%만 떨어져도 8백조원대 거품 증발이란 계산은 손쉽게 나온다.

1997년 IMF사태때 붕괴한 금융시스템을 재건하기 위해 우리 국민이 피눈물을 흘리며 부담해야 했던 공적자금 규모가 1백63조원이었다. 여기에다가 기업 및 주식, 빌딩의 헐값 매각에 따른 국부 손실까지 합하면 IMF사태를 겪으면서 대략 3백조~4백조원 안팎의 국부 손실을 초래한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정하고 있다.

이는 말을 바꾸면, IMF사태 때보다 최소한 배 이상 커다란 충격을 안겨줄 지도 모를 경제 재앙의 도래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의미이다.

특히 일본은행이 ‘버블의 메커니즘’이라고 자성하며 분석한 5대 요인은 해방후 최장-최악의 제4차 부동산 폭등기’로 규정되는 우리나라의 2001~2006년 상황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어 우려를 증폭시키고 있다. 마지막 5번째 요인인 ‘자신감’은 내용상 다소 차이가 있으나, 현재 부동산 투기세력이 “부동산 불패신화는 영원할 것”이라는 확신에 차 있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일치한다.

그럼에도 박병원 차관 등 경제관료들은 "집값에 거품은 없고 따라서 거품 파열도 없다"고 호언하고 있다. "빠르면 2008년, 늦어도 2010년에는 집값이 안정될 것"이란 '집값 폭등용 발언'도 서슴치 않고 있다. IMF사태 발발후 '관료 망국론'이 광풍처럼 몰아친 적이 있다.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나, 불행히도 작금의 상황은 그렇지 않을 성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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