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대재앙'의 주범들을 찾아서
[盧정권 부동산 망국사]<1> '뱀파이어 시대'의 개막
지난해 노무현 정부가 8.31대책을 발표하며 "이제 부동산투기는 끝났다"고 호언한 직후인 지난해 9월 한 권의 졸저를 펴낸 적이 있다. 책 제목은 <참여정권, 건설족 덫에 걸리다>. 노무현 정권 출범후 자행된 '부동산투기 부양정책'의 전개과정에 대한 기록이었다.
이 책에서 당시 필자는 8.31대책에 대해 "겉으로는 '투기족'을 치는 듯 하면서도 내용적으로는 '건설족'을 옹호하는 내용이었다. 혹시나가 역시나로 끝난 것이다"라고 평가했었다. 우려대로 1년여가 지난 지금, 부동산투기는 가공스런 형태로 재연됐고 노무현 정부는 긴급대책회의 소집 등 예의 어지러운 모습을 반복하고 있다.
부동산투기를 조장한 것은 자의든 타의든 간에 최악의 범죄다. 언젠가는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하는 역사적 중범죄다. 이에 필자는 출판사의 양해를 얻어, 노무현 정권 출범후 어떻게 부동산투기 부양책이 펼쳐져 왔으며 책임을 져야 할 세력들은 누구인가를 밝히기 위해 졸저의 주요 내용을 연재하고자 한다. 시리즈의 제목은 '盧정권 부동산 망국사'이다. <필자 주>
뱀파이어 시대
"아랫목은 절절 끓고 있으나 윗목에는 서리가 내리고 있다."
작금의 극심한 양극화를 일컫는 세간의 말이다. IMF사태 발발 얼마 뒤 “이제 아랫목이 따듯해졌으니 곧 윗목도 따듯해질 것”이라던 김대중 정부의 낙관론을 빌어, 나날이 심화되는 양극화를 신랄하게 꼬집는 촌철살인의 비유다.
1997년 IMF사태가 발발한 이래 한국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로 부상한 것이 ‘빈부 양극화’이다. 한국의 부(富)가 한쪽으로 급속히 쏠리면서 일각에서 체제 붕괴까지 우려할 정도로 정치-사회적 위기감이 고조된 게 작금의 현실이다.
IMF사태가 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한국은 사회평등도를 재는 지니계수가 꾸준히 개선되는 등 국제사회에서 상대적으로 분배가 양호하게 진행되는 것으로 좋은 평가를 받아온 국가였다. 그러던 것이 IMF사태가 발발, 분배문제가 뒤틀리며 지구상 최악의 양극화 국가가 돼 버렸다.
외국계 컨설팅기업의 CEO는 필자와 만난 자리에서 한국경제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한국경제는 한마디로 ‘뱀파이어 이코노미(Vampire Economy)’라 부를 수 있다. 햇볕에 쬐면 순식간에 사라져버릴 부실기업과 기업주들이 대낮에는 음지에 숨어 있다가 밤만 되면 활개치고 다니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했다. 한국기업의 구조조정이 아직 미완성형이라는 지적이었다. 그러나 그의 '뱀파이어 이코노미', 우리말로 풀면 '흡혈귀 경제'라는 개념을 듣는 순간, ‘야, 이 개념을 작금의 한국 아파트 시장에 적용하면 적격이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전국민의 절반에 달하는 무주택 서민과, 열심히 일하고 저축해 조금 집을 넓혀가려는 시민들에게 건설업계 등 건설족이 행한 지난 몇년간 행위야말로 '뱀파이어의 흡혈행위'에 다름 아니었기 때문이다. '뱀파이어 경제'란 한마디로 정상적 기업행위나 노동 등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게 아니라, '남의 것을 빼앗아 자신의 부를 부풀리는 수탈경제'를 가리킨다.
한국의 경제전체규모 즉 국내총생산(GDP)는 IMF사태 이전보다 별로 성장하지 못했다. 1996년 1만달러를 돌파한 1인당 GDP가 2004년 1만3천달러 수준으로 높아졌다고는 하나, 이는 한국은행의 계수조정과 원화 절상에 의한 '착시현상'이 큰 작용을 했다. 이렇듯 나라경제 전체의 파이는 별로 커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상류층은 이 기간 중 재산을 IMF사태 전보다 몇배씩 불릴 수 있었던 반면에 다수 국민은 상대적 또는 절대적으로 더욱 빈곤해졌다.
‘공황후 양극화 심화’는 1929년 세계 대공황이후 일관되게 관철돼온 ‘공황의 법칙’이기도 하다. 1929년 미국에서 세계 대공황이 발발한 초기만 해도 개인, 기업 모두 예외없이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기업은 연쇄도산하고 주가는 폭락했으며 노동자들은 무더기 해고됐다. 그러나 세계 대공황의 후폭풍이 어느 정도 진정된 7년 뒤인 1936년 뚜껑을 열어본 결과는 경이로웠다. 당시 미국의 양대 재벌이던 록펠러와 카네기 그룹의 부는 1929년 공황 발발 직전보다 무려 3배나 급증하며 재벌공화국 시대를 열었다. 반면에 다수 중산층과 서민 노동자는 절대 빈곤상태로 빠져들었다.
부동산거품 파열후 13년간 장기복합불황에 빠진 일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부동산거품이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일본은 “전체 국민의 90%가 중산층”이라고 자부하던 나라였다. 그러던 것이 부동산거품이 터지면서 중산층이 붕괴되면서 지금은 빈부 양극화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같은 양극화 현상이 IMF사태 발발후 한국에서도, 그것도 세계자본주의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최악의 형태로 급속히 진행중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얼마 전 경제가 잘 돌아가고 있다고 강변하면서도 “그러나 지금까지 풀리지 않은 걱정 하나가 바로 사회가 양극화 돼가고 있다는 점”이라고 취임후 양극화 심화를 시인하면서도 “스스로 자기를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으나 이를 해소할 만한 확실한 정책수단을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하고 있고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지에 관해 정부를 포함한 어느 두뇌집단도 ‘이것이다’라고 할 만한 정책 제안을 해 온 곳이 없다”고 말한 정도로, 지금 우리나라의 양극화는 대통령조차 해법을 모르겠다고 말할 정도로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양극화는 도대체 어떤 과정을 통해 확대재생산된 것일까.
‘양극화’의 주범, IMF사태후 1차, 2차, 3차 뱀파이어 착취
IMF사태후 한국의 양극화는 IMF사태후 정부 주도로 세 차례 투기판이 잇따라 만들어진 데 따른 필연적 귀결이다. 1차 투기판은 1997~1998년 벌어졌고, 2차 투기판은 1999~2000년, 3차 투기판은 2001년이래 현재까지 진행형이다.
1차(1997~1998년) 투기판의 주 동인은 살인적 고금리정책이었다.
2차(1999~2000년)의 주 동인은 주식 거품이었다.
3차(2001년~2005년 현재)의 주 동인은 부동산 투기였다.
1차 투기판이 전개되는 과정부터 살펴보자. 1997년 12월3일, 우리 정부는 IMF로부터 긴급 구제금융 5백80억3천5백만 달러를 차입하는 약정서에 서명하는 대가로 경제운영권을 IMF로 넘겼다. IMF는 즉각 ‘경제 피식민지’ 한국에 대해 ‘고리대’ 수준의 살인적 고금리 정책을 강행했다. 명분은 금리를 감당 못할 부실기업은 쓰러트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때 40%를 넘어서기까지 한 콜금리를 감당할 기업은 없었다. 무수한 기업이 쓰러졌고, 이들 기업은 외국자본에게 헐값으로 넘어갔다. 살인적 고금리 정책을 강요하던 IMF가 연쇄 기업도산과 무더기 실업 발생으로 민심이 극도로 불안해지자 ‘점진적이어야 한다’는 단서를 붙여 콜금리 인하를 용인하기 시작한 것은 1998년 4월말부터였고, 콜금리는 그해 10월 들어 한 자리 숫자로 낮아졌다.
이 기간 동안 살인적 고금리의 최대 수혜자는 외국자본이었다. 고금리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는 기업과 금융기관, 부동산 등을 헐값에 사들여 천문학적 차익을 거둘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부지리를 보는 국내 세력도 있었다. 금융기관에 예금을 하고 있었던 국내의 ‘현금 보유자’들이 그들로, 그들은 가만히 앉아 막대한 불로소득을 거둘 수 있었다. 반면에 은행 돈 등을 빌려 집을 샀거나 장사를 하던 이들은 고리대 수준의 이자를 수탈당해야 했다. 돈을 빌린 이의 주머니에서 돈을 빌려준 이의 주머니로 돈이 옮겨가는 수탈적 국면이 전개되며, 1차 양극화가 완료됐다.
1차 양극화의 주범은 엄격히 말해 IMF였으나, “고금리 정책은 한국에게 독약이 될 것”이라던 국내외 전문가들의 경고 및 지원사격에도 불구하고 무기력하게 IMF정책을 추종한 정부에게도 2차적 책임이 있음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2차 투기판은 한국은행의 콜금리 인하와 함께 시작됐다. 금리가 낮아지자 돈이 증시로 몰리기 시작했다. 우선 1998년 후반기 종합주가지수가 3백대이던 증시에 외국계가 몰려들면서 엄청난 차익을 거두었다. 그 뒤를 이어 1999년초부터 IMF직후 살인적 고금리로 부를 불린 현금 보유자들이 외국인 뒤를 좇아 증시로 몰려가면서 그 유명한 ‘묻지마 투자’가 시작됐다. 2000년 3월 미국의 나스닥 거품이 꺼지기 전까지 2년간 현금 보유자들은 증시에서 천문학적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반면에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란의 잔치를 보면서도 돈이 없어 발만 동동 구르던 대다수는 뒤늦게 은행 돈 등을 빌려 참가했으나, 결과는 막판 ‘상투잡기’였고 돈을 벌기는커녕 그나마 있던 몇푼 안되던 돈마저 털려야 했다. 이렇게 해서 2차 양극화가 완료됐다.
이 기간 중 IMF 신탁통치 조기졸업을 추구해온 정부는 각종 지원책을 통해 묻지마 투자를 부추겼으며, 여기에 그치지 않고 ‘플라스틱 거품’을 양산한 신용카드 촉진책까지 병행해 경제를 한층 골병들게 만들었다.
양극화가 회복불능의 치명적 형태로 진행된 것은 2001년 후반기부터 본격화된 3차 투기판이었다. 3단계 양극화의 첨병은 아파트투기였다. 아파트투기의 동인은 주가가 연일 폭락을 거듭하던 2000년 8월 취임한 진념 경제부총리가 서둘러 취한 부동산규제 완화, 금리 인하 등 일련의 건설경기 부양책이었다.
경제부총리에 취임한 진념이 가장 먼저 취한 정책은 건설경기 부양 ‘올인’이었다. 그는 우선 아파트 미분양분을 해소하기 위해 그해 9월부터 2001년 말까지 한시적으로 1년 이상 보유한 기존주택을 판 뒤 신축 분양주택을 구입할 때는 양도소득세 세율을 종전의 20~40%에서 10%로 대폭 낮추고, 2001년 사회간접자본(SOC) 예산도 당초 11조원에서 14조원 수준으로 늘렸다. 또한 아파트를 지을 공공택지 개발물량을 8백50만평에서 1천만평으로 확대하는 동시에, 기업의 비업무용 부동산에 대한 취득세 중과세제도도 폐지했다. 이와 함께 임대사업자가 임대주택을 구입할 때의 대출한도를 현행 최고 3천만원에서 6천만원으로 늘려주고, 임대주택을 담보로 발행된 자산담보부증권(ABS)에 대해서도 이자소득세 감면혜택을 주기로 했다.
진념 경제팀의 ‘부동산경기 올인’은 IMF사태 발발직후인 1998년 11월 건설교통부가 집값 폭락 및 건설업체 연쇄도산에 놀라 취했던 아파트 분양권 전매 전면허용 등의 조치와 맞물리면서 2001년부터 본격적으로 아파트값 폭등을 초래했다. 건교부는 1998년 11월12일 주택경기 침체 및 아파트 미분양 해소를 위해 1999년 4월부터 종전의 전매제한 기간을 없애고 아파트 계약후 등기없이 언제라도 분양권을 매매할 수 있게 했다. 건교부는 동시에 1999년 1월부터 공공개발택지에 건설된 민영주택의 재당첨제한기간(2년)을 없애 청약을 통해 주택을 이미 공급받은 사람도 아무 제한없이 다른 주택을 청약할 수 있게 했다. 이와 함께 2가구 이상 주택 소유자도 민영주택 분양신청에서 청약 1순위 자격을 가질 수 있게 했고, 민영주택의 무주택 우선 분양제와 장기간 청약통장가입자에게 우선 청약권을 주던 청약배수제도도 철폐했다.
이밖에 의무화돼 있던 아파트단지내 공중화장실. 유치원. 약국설치, 재개발사업회계감사, 대지안의 공지확보의무, 택지환매 등도 폐지했다. 또한 일조권 확보를 위해 옆 건물과 띄어야 하는 거리를 종전의 건물높이의 0.8배에서 입지여건에 따라 0.4~0.8배로 축소했고, 건축허가 없이 지을 수 있는 건물 연면적도 15평에서 45평으로 확대했다. 이와 함께 아파트 분양가도 풀었고, 2000년 3월에는 1가구 1통장으로 제한해온 청약예금 가입 자격을 20세 이상 성인이면 누구나 가능하도록 고쳤다. 아파트투기를 부채질하고 나선 것이다.
이처럼 이미 모든 규제를 해제한 마당에 진념 부총리가 취임해 추가로 노골적인 ‘부동산 올인 정책’을 펴니, 앞서 ‘묻지마 투자’에서 단단히 한몫을 챙긴 4백조원대 부동자금들이 아파트시장으로 몰리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금융권에서 빠져나온 부동자금들은 일제히 강남으로 집중됐고 2001년 후반부터 아파트값 폭등이 시작됐다. 특히 2001년 가을 뉴욕의 쌍둥이 빌딩이 공격을 당하는 ‘9.11 사태’가 발발해 세계경제가 출렁이면서, 미연방준비제도이사회를 필두로 세계 중앙은행들이 잇따라 금리를 내리고 한국은행도 여기에 편승해 세 차례 금리인하를 단행하면서 아파트투기는 결정적 계기를 맞이했다. 미국을 겨냥한 9.11 테러가 ‘나비 효과’ 이론에 따라 한국에 아파트거품을 일으키는 예기치 못한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이처럼 정부가 아파트 경기부양책이라는 독약을 쓴 결과는 뚜렷해 2001년 3.4분기의 경우 수출과 설비투자는 계속 부진했지만 유독 건설업만은 호조를 보여, 3.4분기의 건설업의 성장기여율은 2.4분기의 3.3%에서 34.1%로 급증했고, 2004년말 현재 건설업이 한국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무려 17%로 급증할 정도로 건설경기 부양은 그후 정권이 바뀌었음에도 변함없는 핵심 경기부양책으로 군림하며 양극화를 극한적 형태로 확대시켰다.
노무현 후보 “아파트 투기 뿌리 뽑겠다”
그 어느 역대 대통령 선거보다 치열했던 2002년 대통령 선거의 최대 민생 화두는 단연 ‘아파트값 잡기’였다.
2001년 하반기부터 폭등하기 시작한 강남의 아파트값은 풍성한 부동자금을 배경으로 10년간 잠들어있던 부동산투기 심리를 일거에 일깨웠다. 특히 이번에 아파트값 폭등을 선도한 것은 강남 도곡동의 타워팰리스로 대표되는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였다.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는 1962년의 제1세대 아파트 출현에 이은, 1980년대의 강남 압구정동 아파트단지로 대표되는 제2세대 아파트에 이어 등장한 제3세대 아파트였다.
미국 등 선진국에서 기존 아파트의 슬럼화에 따른 도심 공동화 현상을 막고, 공공 공간의 확보와 도시 미관 개발 계획에 의해 짓기 시작된 주상복합아파트는 한국에서 새로운 주거형태로 90년대부터 생겨나기 시작했다. 초창기 주상복합아파트는 주로 기능성 위주로 지어져, 오피스텔 건설 붐과 함께 여의도 등의 오피스 지역에 지어지면서 30~40대 고소득 직장인의 편의 제공이 중심목적이었다. 그러던 것이 1994년을 기점으로 대형 주상복합아파트가 본격적으로 등장해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주상복합건물의 주거비율이 50% 미만으로 바뀌면서 분양가와 평형제한을 피할 수 있는 주상복합이 부유층에게 인기를 끌어 시그마타워(잠실) 나산스위트(보라매공원) 등은 분양가가 평당 6백만원을 웃돌 정도로 당시로서는 상당한 고가였음에도 불구하고 경쟁률이 5대 1을 넘었다. 하지만 50%를 넘는 상가부분 분양에 실패하면서 주상복합의 열풍은 다시 시들해졌다.
이에 정부는 IMF사태가 터진 97년 경기부양 차원에서 주택건설촉진법을 개정해 주거비율을 90%까지 높일 수 있게 개정했고, 이에 삼성 타워팰리스를 필두로 타워팰리스 인근의 도곡동 우성 캐릭터빌이나 대림 아크로빌 등 초고층 제3세대 아파트 상품이 본격 출현했다. 그 중에서 타워팰리스는 ‘신부유층’이 거주하는 고급주거 형태의 상징처럼 받아들여져, IMF사태후 미분양에 허덕이던 타워팰리스는 2001년 하반기부터 폭등을 거듭해 마침내 2002년말 평당 가격이 평균 3천만원을 돌파하기에 이르렀다. 20002년말 64평형 중간형 집값이 20억원에 육박하고, 맨 꼭대기의 1백24평형 펜트하우스는 거래가가 40억원을 넘으면서 강남을 위시한 전국 아파트값 폭등의 견인차가 됐다.
아파트값 폭등은 가뜩이나 IMF사태후 심화된 빈부격차에 분개하던 국민 다수에게 극심한 좌절감과 분노를 안겨주면서 민심이 흉흉해졌다.
특히 당시 성난 민심을 더욱 격노케 만든 한 것은 잘못된 부동산세제로 인해 강북 주민이 강남 주민보다 재산세를 더 많이 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2002년 9월10일 건설교통부는 “같은 평수 아파트의 경우 강북 아파트주민이 부유한 강남 주민보다 최고 5.5배나 많은 재산세를 내고 있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당시 재산세 부과 방식이 아파트값이 아니라, 평수와 신축연도 등에 기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당연히 조세 형평성 차원에서 아파트값에 기초해 세금을 물리자는 여론이 일었으나 행정자치부가 “강남의 조세저항 우려”를 이유로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히자 국민 분노는 폭발했고, “정부는 강남 조세저항만 겁나지 국민 저항은 개의치 않는다는 말이냐. 세상을 한번 싹 엎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증폭됐다.
이런 분위기 하에서 진행된 2002년 대통령선거 운동의 최대 민생이슈가 ‘아파트값 잡기’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서민의 이익 대변’을 표방했던 노무현 대통령후보는 대선기간중 “내가 대통령이 되면 정권의 명운을 걸고 서민을 울리는 부동산투기를 반드시 뿌리 뽑겠다”고 다짐, 아파트값 폭등의 최대 피해자인 서민층과 젊은세대의 적극적 지지에 힘입어 선거에서 이길 수 있었다. 이회창 후보도 이에 맞서 “내가 대통령이 되면 아파트 분양가를 30% 끌어 내리겠다”는 공약을 내걸었으나, 다수 서민과 젊은층은 귀족풍의 이 후보보다 서민풍의 노후보 말을 보다 신뢰했다.
대선 기간중 노 후보가 내놓은 ‘아파트값 잡기’ 공약의 골간은 “공급확대보다는 가수요 차단과 불로소득 과세 강화 등 투기억제”였다. 구체성은 띠지 못하고 있으나 방향은 제대로 잡은 것이었다.
노 후보는 우선 아파트투기 원인을 주택공급 부족에서 찾고 있는 건설족 주장에 대해 "보급률 자체는 무의미하다"고 일축하며, “철저한 투기규제를 통해 투기 가수요를 잠재우면 체감 주택난을 해소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강남투기 방지 대책의 일환으로 강북 등 전국 노후주택 40만가구를 정비하며, 특히 서울 강북 재개발과 관련해선 24조원을 조달해 체계적인 개발계획을 세운다는 구체적인 청사진까지 내놓았다.
노 후보는 또 부동산 관련 세제의 강화를 약속했다. 대형주택에 대한 세제 현실화를 일관되게 주장해온 그는 특히 6억원 이상 고가주택에 대한 양도소득세 중과세 방침을 밝혔고, 시가 대비 30% 미만인 과표 현실화 비율의 단계적 상향조정도 약속했다.
주택공급 정책도 서민에 초점을 맞춰 "중대형 아파트 등 민간 부문은 시장에 맡기고 투기를 억제하되 서민을 위한 임대주택 등은 재정투입을 대거 확대해서라도 정부가 책임지겠다”고 약속했고, 소형 및 임대 주택에 대해선 “분양가를 ‘협의후 인하’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이런 공약을 내건 노 후보가 당선된 만큼 국민들이 그에게 거는 기대는 컸다. 대선기간중 양분됐던 국민은 노 후보 취임직후 92%의 지지를 보낼 정도로 노 대통령이 ‘소신껏’ 일할 여건을 만들어주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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