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가 칼을 꽂는 순간..."
<뷰스칼럼> "그러나 이번 사태의 주역은 '민의'였다"
6일 점심때 만난 모 신문 주필의 말이다. 그는 "오늘 오후에 한나라당이 백기를 들 것"이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다른 신문사의 이사도 같이 한 자리였다. 그의 단언대로 몇시간 뒤 게임은 끝났다.
비슷한 징후는 많았다. 정치권 인사들과 송년회를 거의 못했다. 매일같이 전쟁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5일 오전 박근혜 전대표가 한나라당 최고중진회의에서 '한 마디' 한 이후 줄줄이 연말에 못한 송년회 대신 신년회를 하자는 약속이 잡혔다. 술자리 약속은 7일부터다. 다수는 한나라당 의원들이었다. "바쁘지 않냐"는 질문에 한결같은 대답이 "박근혜가 쐐기를 박았다. 게임이 끝났다"고 했다. 그리고 하루도 안 지난 6일, 그들 말대로 게임이 끝났다.
지금 한나라당 친이계는 김형오 국회의장과, 박근혜 전대표에게 정말 화가 많이 났다. 청와대도 마찬가지다. 속된 말로 펄펄 뛰고 있다. 그 분풀이를 민주당에게 쏟아붓는 측면이 강하다. 한나라당의 한 대변인은 민주당을 향해 "악마, 테러범, 좌파집단"이라고 원색적 비난을 퍼부었다. 감정의 통제선을 넘어선 극한 표현들이다.
이는 민주당만 향한 비난이 아니다. 직접적으로 겨냥하지 못해 그렇지, 강행 처리를 좌절시킨 모든 안팎 세력에 대한 비난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당연히 김 의장과 박 전대표도 포함된다. 새해 들어 한번 소신껏 밀어붙이려 했다가 초반부터 급제동이 걸렸기 때문이다. 모르긴 몰라도 6일 밤 아마도 엄청난 '울분의 술판'이 벌어졌을 성싶다.
7일 아침 보수신문들이 어떻게 쓸지도 예상된다. 엄청나게 한나라당을 박살낼 것이다. '웰빙정당' 운운하며. 이들의 생존이 걸린 최대 관심사인 방송법 개정안을 2월에 처리하기로 한 것도 아니고 "무기한 합의처리"하기로 했으니 그럴만도 하다. 이명박 정권때 신문의 방송 진출이 허용될 것이라고 확신하나, 이번 좌절은 잠정적 재계 파트너까지 짜놓은 그들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 뼈아픈 좌절이 아닐 수 없어 보인다.
이 난리법석을 보면서 한가지 의문이 들었다. 김형오 의장, 박근혜 전대표 때문에 이런 결과가 초래됐나. 결코 아니다. 김형오 의장의 직권상정 거부와, 박근혜 전대표의 쟁점법안 강행처리 세력 비판은 막판에 결정적 작용을 한 게 분명하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이들을 움직이게 한 동인은 따로 있다. '여론'이다.
집권여당의 한결같은 주장은 "대선때, 총선때 국민이 우리를 뽑은만큼 밀어붙여도 된다"였다. 밀어붙이라는 게 '국민 뜻'이라 했다. 하지만 이런 논리가 통할려면 대통령과 집권여당 지지율이 최소한 집권때와 엇비슷하거나 크게 낮아선 안된다. 그러나 지난 대선, 총선때 집권세력을 선택했던 '민의'는 지금 싸늘하다. 하두 지지율이 낮아 무감각해진 측면이 있으나, 이 정도 지지율은 정치통계학적으로 볼 때 정권 말기에나 나타날 정도의 '통치 불능' 수준이다.
집권세력 지지율이 워낙 형편없다 보니, 쟁점법안들마다 반대여론이 과반수 이상이다. 콩으로 메주를 쒀도 못믿겠다는 '골수 안티세력'이 생겼다는 의미다. 상황이 이러면 대선, 총선때 지지율 운운할 때가 아니다. '지금의 여론'을 직시하고 몸서리를 쳐야 마땅하다. 여론을 진정시키고 다시 자신쪽으로 끌어들이려는 부단한 노력을 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이를 무시하고 밀어붙이려 했고 끝내 좌절했다.
전여옥 한나라당 의원 같은 경우는 이를 김형오 의장이나 박근혜 전대표의 "속이 뻔히 들여다 보이는 것", 즉 '틈새 공략'으로 비난하기도 한다. 적개감이 넘실댄다. 정치는 그러나 본디 그런 것이다. 상대방의 공세가 가능케, 틈을 벌인 쪽이 잘못이고, 하수다. 잘못을 하고 남탓을 할수록 추할 뿐이다. 자신들의 정치적 감각이 둔함을 자성할 일이다.
정치는 연말연초, 그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앞으로 거센 후폭풍도 예견된다. 오기로 같은 시도를 되풀이할 가능성도 농후하다. 벌써 일각에선 "앞으로 여당이 국회 본회의장을 사전 점거할 것"이란 우스갯소리도 나돈다. 그러다 보면 2월도 3월, 4월도 정치판은 어지러울 수도 있다. 일각에서는 "경제위기에 정치위기까지 겹치면서 '후진국형 정경 복합불황'이 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한다.
신년초 정치판이 어지럽다. 하지만 좋게 보면 매를 먼저 맞은 모양새다. 지금 사회면 뉴스를 보면 공포스럽다. 매일같이 자살, 자살의 연속이다. IMF 직후 그대로다. 경제난에 의한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다. 정치권 책임이 크다. 더 나아가 경제부처의 고위 관계자는 "지금 실물경제 추락이 공포스럽다"는 얘기도 한다. 곧 발표될 숫자들이 공포를 불러 일으킬만하다는 경고다.
정치권은 모두 지금 현실을 두려워해야 한다. 경제위기는 지금 시작일뿐이다. '소탐(小貪)'할 때가 아니다. 그러다간 '대실(大失)'하기 십상이다. 정치권력은 잡다한 주변 이익집단의 이해관계에서 벗어날 때다. 오기도 접을 때다. 정치공학은 나중 문제다. 국민의 절실한 문제, '민(民)의 생존'에 집중할 때다. 아차 잘못했다간 정말 거대한 '민(民)의 역류'가 몰아칠 중차대한 시점이다.
IMF사태 직후 한국을 찾은 한 외국계 CEO는 "한국은 희한한 나라다. 태국 등은 폭동이 일어났는데 한국은 금모으기를 하다니..."라고 놀라움을 표시했었다.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럴지는 극히 의문이다.
지금, 국민들은 하루하루 살기가 지금 너무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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