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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공단 기륭전자의 '두 사람 이야기'

<현장> 기륭전자 앞에서 2백60일을 버텨온 민초들

안순씨는 아침부터 20인분의 식사를 준비하느라 바쁘다. 9일 오늘로서 이 짓도 2백59일째다. 파견직 사원으로 공장 생산라인을 지키다 37명의 동료들과 채 3개월도 못 돼 짤린 안순씨. 웬만하면 체념하고 돌아서고 싶지만 20여명 남짓의 동료들이 눈에 밟혀 그는 아직 이 곳 천막 농성장을 지키고 있다.

밥 퍼주는 남자 최일도 목사의 심경으로, 적게는 대여섯살에서 많게는 조카뻘 되는 동료 조합원들을 보살피는 맏언니의 심정으로 그렇게 2백59일동안 기륭전자 정문 앞 천막 농성장을 묵묵히 지키고 있다.

한 달 법정최정임금 64만1천8백40원보다 무려(?) 10원이나 더 받고, 문자 메시지로 해고 당하고, 노동부의 불법파견 판정에, 위장도급에... 변변한 노조 하나없는 중소기업에서 자행될 수 있는 모든 노동탄압 행위가 압축된 곳.

"참고만 살았던 나의 인생. 한번만이라도 아프다 외치고 싶다"

어안순(40)씨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바로 이 곳 구로공단(현 디지털산업단지) 내 기륭전자 생산직 사원이었다. (관련기사 참조)

안순씨가 처음 생활전선에 뛰어던 것은 그의 나이 불과 17세 되던 해인 지난 1983년. 그는 중학교를 갓 졸업하고 대전에 있는 충남방직에서 ‘공순이’가 되었다. 딸만 다섯이던 안순씨의 집에서 안순씨는 맏이였다. 동생들 뒷바라지에 집안 살림까지 그에게 주어진 숙명이 그를 고교생 여직공으로 만들었다.

설상가상으로 안순씨가 중3 되던 무렵,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당시 막내동생의 나이는 불과 세 살. 그래도 안순씨는 고등학교라도 나와야 사람구실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낮에는 공장에서, 밤에는 충남방직 재단 소유의 충일여고 야간학부에서 공부했다.

260일째 농성을 이어가고 있는 기륭전자 조합원들. ⓒ 김동현 기자


안순씨가 서울로 올라온 것은 고등학교 졸업 직후였다. 스무 살 꽃다운 나이에 그가 얻은 첫 직장은 서울 독산동 한 의류업체에서의 미싱 시다(잡부) 일이었다. 그 곳에서 그는 3년을 시다 일을 했더랬다. 어느 날 옷 먼지에 쓰러진 그는 병원에서 결핵 판정을 받았다.

이후 안순씨는 요양차 고향인 충남 논산으로 내려가 그 곳에서 중매로 7살 많은 서른 살 짜리 노총각과 결혼했다. 결혼 후 안순씨는 남편과 다시 상경, 1989년 경기 광명시의 한 하꼬방(쪽방)에서 신접살림을 차렸다.

그러나 남편은 변변한 직업도 없었고 허구한 날 노름판과 술집을 기웃거렸다. 안순씨는 아직도 1989년 12월 어느 겨울 날의 기억을 가슴에서 놓질 못한다. 크리스마스를 나흘 앞 둔 12월 21일, 최악의 한파가 몰아닥쳤다.

남편은 그 날도 어느 선술집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자신이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된 사실도 모른 채... 창밖의 거센 눈보라보다 안순씨를 더 시립게 만든 것은 남편없이 친정어머니만 홀로 지킨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첫 출산이었다.

안순씨는 아이를 키우면서도 결핵에 시달렸다. 거기다 카센터에 출근하는 두 시동생의 기름밥 묻은 작업복을 빨아가며 그렇게 하꼬방에서 네 식구(남편, 아이, 시동생 둘)를 먹여살렸다.

이후 안순씨는 파출부도 나가봤고 전단지도 돌려봤고 우유배달도 해봤다. 보험아줌마, 식당아줌마 등 대한민국에서 밖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기혼 여성에게 전매특허처럼 따라붙는 온갖 종류의 '무슨무슨 아줌마'일은 다해봤다.

그러고서 기륭전자 파견직 사원으로까지 흘러들어왔다. 그런 그에게 <철의 노동자> 투쟁가와 ‘단결’이 새겨진 붉은 조합복은 이질적인 풍경이었다. 그는 지금도 그 모든 노동쟁의 현장의 파편들이 그에게 낯선 장면이라고 고백한다.

그럼에도 안순씨가 이 짓을, 9개월이 다 돼가도록 이 짓을 하게 만든 것은 ‘서러움’이다. 참고만 살았던, 당하고만 살았던 사십 평생의 울분이다. 동료들에 대한 애달픔이다. 혹은 힘없는 노동자, 서민의 모든 이유에서다.

구로공단의 기룡전자 사옥 앞. ⓒ 김동현 기자


육군 중사에서 공돌이로, 다시 투쟁가로

상묵씨는 안순씨의 이야기를 듣고있다 시선을 돌렸다. 안순씨와 같은 인생을 먼저 살아 본 고향 어머니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런 어머니의 지나간 생신에 제대로 선물조차 못 해드린 자책감에 고개를 떨궜다.

경남 의령이 고향인 김상묵(32)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군에 입대했다. 군에서 6년간 부사관(구 하사관)으로 용산 군 철도부대에서 TMO(군 전용객차)관리 철도승무관으로 복무했다.

2001년 12월 6일 육군 중사로 전역한 그는 이듬해 봄 인테리어 회사에 취업, 모델하우스 관리 일을 맡았다. 그러나 6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회사를 관둬야 했다. 아는 선배에게 그의 천금같은 퇴직금이었던 1천4백만원을 빌려주었다 떼인 것이다. 충격으로 회사를 관두고 몇 개월간 하루웬종일 골방에만 틀어박혀 술로 지샜다.

"세상... 정말 무섭더군요."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에게 주어진 암울한 현실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이후 마음을 다잡기위해 인근 교회에 나가게 됐고 그곳에서 지인 소개로 봉제공장에 출근하게 됐다.

"솔직히 처음에는 많이 망설였죠. 공장 일을 한다는 게 아무래도 저에게는 낯설고 창피했던게 사실이었으니까요. 더군다나 봉제공장은..."

그러나 당장 먹고 살거도 없고 이대로 가다가는 폐인으로 인생을 망치겠다고 판단한 그는 봉제공장에 출근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2004년 4월 기륭전자에 입사했다. 1년이상을 파견직 사원으로 생산라인을 지키다 짤렸다.

2남 1녀 중 장남인 그는 아직도 부모님께는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그러다 회사에서 부당하게 짤려 천막농성장을 지키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형제에게조차 알리지 않았다.

어제는 ‘어버이 날’, 변변한 선물 하나 집에다 못 부치는 자신이 또 한번 원망스럽다. 특히 올 설 연휴 마지막 날 어머니의 생신이 껴 있어 할 수 없이 고향에 내려가야 했던 그는 돈이 없어 처음에는 내려갈지 무척이나 망설였다. 선물이라도 하나 사들고 가야 하는데 회사 짤리고 돈도 바닥나고 이렇게 투쟁만 해야하는 자신에게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솟구쳤다.

사정을 아는 조합원들은 없는 처지에서나마 그에게 20만원을 모아 주었다. 그러나 왔다갔다 차비만 해도 족히 10만원 가량 되고 그 돈으로 변변한 선물도 제대로 못 사드렸다. 상묵씨는 아직도 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미어온다.

이제는 더 물러 설 곳도 없다는 그. 천막 한 켠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를 읽으며 이 지긋지긋한 투쟁장에서의 안식을 구하고있다.

기륭전자 정문 앞은 사측이 고용한 용역경비 30여명이 24시간 교대로 회사를 지키고 있다. 사측은 지난 3월, 조합원들의 천막을 부수며 노조원들을 위협하기도했다 ⓒ 김동현 기자


9개월이 다 되었지만 묵묵부답. 기륭전자-노동부-검찰 삼위일체

2005년 8월 24일, 사측의 불법파견, 부당해고에 맞서 성실교섭을 촉구하며 기륭전자 1층 공장 점거농성에 돌입한 금속노조 서울 남부지회 산하 기륭전자분회(분회장 김소연)는 10일로 농성 2백60일차를 맞는다.

2백여명에 이르던 조합원들이 이제는 뿔뿔히 다 흩어져 이제 겨우 40여명만이 기륭전자 정문 앞에서 천막을 지키고 있다.

노동부는 지난 해 10월, 기륭전자에 대해 불법파견 판정을 내리고 검찰에 기륭전자 사업주(권혁준 대표이사)에 대한 구속품신을 제출했다. 그렇지만 아직도 사건은 검찰에 계류 중이고 지지부진하다.

지방노동위원회(지노위) 역시, 잡담이나 상급자에게 말대꾸를 하는 등 뼛뼛하게 굴었다는 이유로 하루아침에 문자메시지로 해고당한 수십명의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진정은 외면한 채, 김소연 기륭전자분회장 혼자에 대해서만 ‘부당해고’ 판정을 내렸다.

그러나 이마저도 사측에서는 김 분회장에 대해 지노위의 원직복직 명령을 이행하지 않고 있다.

기륭조합원 흥희씨는 “청장을 만나러 노동부에 갔더니 그 곳에서 그럽디다. ‘우리 노동부 힘없어요. 할 도리는 다 했잖습니까. 구속 품신 올렸잖아요’라구요... 노동부도 힘없다는 데 그럼 우리는 뭘 할 수 있을까요?”

기륭전자는 지난 3월 3일 삭발결의식 이후 두 달 만인 9일, 투쟁문화제를 갖고 앞으로 고강도 투쟁을 다짐했다. 오는 12일에는 기륭전자 조합원들과 지역 시민사회단체 인사들을 포함한 50여명 가량이 금천구청 앞에서 시작해 관악 지방노동사무소까지 삼보일배를 하기로 했다.

흥희씨는 말한다.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을 것예요. 누구도 이 싸움이 이렇게 길 것이라곤 상상조차 못했죠. 비정규직으로 3개월짜리, 혹은 6개월짜리 단막극 인생이었기에 우리 자신들도 모두 다 금새 포기할 것으로만 알았죠. 하지만 여기서 포기하면, 다시 또 어딘가에서 천대받고 무시받고 그렇게 또 짤릴 날 만 기다릴 게 아닌가요? 싸워야죠. 더는 안돼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렇게 우리도 참고만 있지는 않겠다는 것을 보여줘야죠, 세상에, 회사에, 그리고 누구보다 우리 자신 스스로에게...”

왕언니 순열(54)씨에서부터 막내 은미(23)씨까지 천막을 끝까지 지키고 있는 기륭전자 40여명의 조합원들, 그들 삶의 질곡이 부디 기륭에서 멈추기를 바란다. 아울러 기대는 거의 안하나, 매일같이 미디어 앞에서 "서민후보"임을 외치는 오세훈-강금실 후보 등도 이곳을 한번 찾아보길 원한다.

기룡전자 앞 천막 농성장. ⓒ 김동현 기자
김동현 기자

댓글이 1 개 있습니다.

  • 9 3
    구지선

    가슴이 너무 아파서 숨을 쉴수가 없네요
    기륭전자 일이 속히 잘 해결되어
    그동안 상처 받고 살아온 상묵씨..안순씨도
    웃을 날이 오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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