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 "한번만 저쪽에 주면 그 다음은 우리가 영원히 한다”
이상돈 "잘못한 것 많은 정권일수록 레임덕 없다고 호언"
이상돈 중앙대 법대교수가 14일 이명박 대통령의 레임덕 논란을 다룬 글을 쓰면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정권말에 했던 발언을 상기시켰다.
이 교수는 이같은 노 전 대통령의 정권말 발언을 거론하며 "야릇한 뉘앙스의 발언"이었다고 회상한 뒤, "요즘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이 말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고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덧붙였다.
MB정권의 실패로 앞으로 상당 기간 보수 재집권이 힘들어지는 게 아니냐는 판단을 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해석도 가능한 발언인 셈.
이 교수는 이어 본론인 'MB 레임덕' 논란과 관련, "그러면 이명박 정권의 지금 현상은 ‘레임덕’이라고 할 것인가? 지금 벌어지고 있는 현상도 고전적 의미의 ‘레임덕’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라며 "오히려 정권과 정권을 뒷받침했던 외곽 장치가 전반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하는 현상이 아닌가 한다. 엊그제 평화방송 대담에서 내가 ‘아주 새로운 레임덕 현상’이라고 표현한 것도 바로 그런 의미"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 대통령이 퇴임하는 날까지 레임덕이 없을 것이라고 호언하는 데 대해서도 "성공한 정권은 ‘아름다운 퇴장’을 스스로 준비하기 때문에 레임덕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며 "잘못한 것이 많고 숨기고 싶은 것이 많은 정권이 임기 종료를 두려워하고, 그래서 “우리에겐 레임덕이 없다”고 공연히 호기(豪氣)를 부리는 법"이라고 쓴소리를 했다.
다음은 이 교수의 글 전문.
'레임덕’
정동기 감사원장 지명자가 낙마한 후 부쩍 ‘레임덕’이란 용어가 회자(膾炙)되고 있다. 언제부터 우리나라에서 ‘레임덕’이란 용어가 많이 쓰이게 됐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노무현 정권 시절에는 국회에서 ‘레임덕’을 두고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 의원과 노 정권 청와대의 고위관계자와 사이에 작은 논쟁이 있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한나라당과의 연정, 중임제 개헌 등 공감대가 없는 발상을 터뜨려서 위상이 추락한 적이 있었다. 그 즈음 어느 한나라당 의원이 국회 상임위원회에서 “노 정권이 레임덕에 빠진 것 같다”고 하자 당시 청와대 관계자가 “우리는 처음부터 레임덕이었다”고 시니컬하게 답을 한 것이다. 그러나 노 정권은 임기 종료까지 많은 일을 밀어붙였다. 노 정권은 대선을 앞둔 2007년에 종합부동산세를 기준을 인상하고, 법학전문대학원 제도를 도입했다.
‘레임덕’('lame duck')이란 용어는 빚을 못 갚는 투자자를 그렇게 부른 것이 유래라고 하나 미국에선 재선에 실패하거나 선거에 나서지 않기로 결정한 대통령을 그렇게 부르고 있다. 선거에서 떨어졌지만 아직 임기가 몇 달 남아 있는 의원을 ‘레임덕 의원’이라고 부르고, 선거 결과에 따라서 다수당이 바뀌게 되는 경우에 임기를 얼마 남겨 놓지 않은 의회 자체를 ‘레임덕 의회’라고 부른다.
레임덕 대통령의 권한 남용
레임덕 대통령의 문제는 임기 마지막 순간에 대통령 권한을 남용할 가능성이다. 미국 2대 대통령 존 애담스는 퇴임하기 전 며칠 동안 연방판사 자리를 새로 많이 만들어서 자기네 파벌 인사들을 대거 임명했다. 3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토머스 제퍼슨은 아직 전달되지 않은 판사 임명장을 무효로 처리해서 미국에서 사법심사의 기원을 만든 Marbury v. Madison 이란 유명한 판결이 나오게 됐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러기가 불가능해졌다. 연방판사 등 고위직에 대해 인준동의권을 갖고 있는 상원에서 소수당은 필리버스터를 구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문제는 임기 만료를 앞둔 대통령이 사면권을 남용하는 경우다. 이런 관행은 오래부터 있어왔고 그 정도가 심하지 않으면 용인해 왔다. 그러나 빌 클린턴 대통령은 임기 종료를 앞두고 자기 이복동생, 처가 쪽 친척, 정치헌금 브로커, 푸에르토리코 출신 테러분자 등을 무더기로 사면해서 물의를 일으켰다. 9-11 테러 때 펜타곤에 추락한 비행기에 타고 있다가 사망한 바버라 올슨은 그러한 클린턴 부부의 행각이 ‘사면 장사’였다고 신랄하게 비난했다. 반면 조지 W. 부시는 퇴임을 앞두고 ‘리크 게이트’에 관련해서 위증죄로 복역 중이던 딕 체니 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낸 스쿠터 리비에 대한 사면을 거부했다.
재선에 실패한 대통령과 임기 종료를 앞둔 의회가 합작으로 중요한 법률안을 통과시키기도 한다. 이것을 흔히 ‘미드 나이트 입법’(‘mid-night legislation’)이라고 부르는데, 1980년 말에 통과된 ‘수퍼펀드법’이 대표적인 경우다. 1980년 대선에서 카터 대통령은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한테 참패했다. 의회에선 민주당이 의석을 잃었지만 상하 양원의 다수석을 지키는 데는 성공했다. 당시 의회는 오염된 토지를 복구하고 원인자에게 환경복원 책임을 지우는 ‘수퍼펀드법(안)’을 심의하고 있었지만 선거까지 표결을 하지 못했다. 레이건은 자기가 대통령이 되면 민주당이 다수인 의회가 그 법안을 통과시켜도 거부권을 행사하겠다고 공언했다. 11월 첫 주 선거가 끝나고 12월 말 회기 종료까지 얼마 남아 있지 않은 회기 동안 민주당이 다수를 점하고 있는 하원과 상원은 이 법안을 통과시켰고 카터 대통령은 임기 만료를 며칠 앞두고 이에 서명했다. 선거에서 떨어진 의원들이 대거 찬성하고 역시 선거에서 떨어진 대통령이 서명해서 매우 중요한 법률을 탄생시킨 것이다. 레이건 대통령 당선자와 공화당은 이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 없었고, 레이건 행정부와 공화당은 집권 후에 이 법률을 폐기하거나 수정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퇴임하는 대통령과 대통령 당선자와의 관계
지금은 미국 대통령 취임일자가 1월 20일이지만 1933년까지만 해도 미국 대통령은 3월 초였다. 따라서 1933년 전에는 11월 초 선거에서 패배한 대통령이 4개월 동안 대통령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이 기간의 대통령이 원래 의미의 ‘레임덕 대통령’이다. 그런데 만일에 그 기간이 위기상황이라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1860년 11월 선거에서 노예폐지론자인 링컨이 당선되자 링컨이 취임하기도 전에 노스캐롤라이나 등 남부 주들이 연방이탈을 선언했다. 심각한 위기 상황임에도 당시 레임덕 대통령이던 뷰캐넌이나 대통령 당선자이던 링컨은 아무 조치를 취하지 못했고, 결국 참혹한 남북전쟁이 발발하고 말았다. 비슷한 상황은 대공황이던 1932년에도 발생했다. 레임덕 대통령 후버와 당선자 루스벨트는 협조하지 않았고, 몇 달 동안 경제상황은 더 나빠지고 말았다.
반면 트루먼 행정부에서 아이젠하원 행정부로 넘어오고, 또 케네디 행정부로 넘어 오는 과정은 유연했다. 정권은 민주당에서 공화당으로, 그리고 다시 민주당으로 바뀌었지만 미국의 외교정책을 다루는 사람들은 여전히 하버드, 예일 등을 나온 ‘동부 에스테블리쉬먼트’(Eastern Establishment)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었다. 딘 애치슨, 존 포스터 덜레스와 앨런 덜레스 형제, 에버렐 해리먼, 헨리 캐봇 롯지 2세에서 맥조지 번디 등 그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동북부 인맥이 정권을 유지해 왔기 때문이다.
존슨에서 닉슨-포드 행정부로, 또 카터 행정부를 거쳐 레이건-부시 행정부로, 그리고 클린턴 행정부와 부시 행정부로 넘어오는 과정은 인적 구성의 변화가 컸다. 레이건 대통령은 재임에 성공했고, 또 자신의 부통령이던 조지 H. W. 부시가 후임으로 당선됐으니 한 세기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대업’(大業)을 달성한 셈이다. 닉슨 행정부 말기와 클린턴 행정부 말기의 리더십 상실은 워터게이트와 섹스 스캔들 때문이었지 레임덕 현상이라고 볼 것은 아니다. 조지 W. 부시 행정부 말기의 현상도 이라크 전쟁과 재정위기 같은 정책실패 때문이지 레임덕 현상으로 볼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구태여 말한다면 정권이 실패해서 레임덕 같은 효과가 난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레임덕’이란 용어가 유래한 미국의 경우에 비교한다면 우리나라에선 현직 대통령의 ‘영(令)’이 안서는 것을 ‘레임덕’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대통령이 다음 공천에 간여할 수 없게 되면 여당 의원들이 차기 실세로 기우는 행태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대체로 보아서 노태우 대통령 임기 후반기에 접어들어서 김영삼 당시 여당(신한국당) 대표가 차기 대통령으로 유력해지자 여당 의원들이 대거 그 쪽으로 넘어간 것을 두고 노 대통령이 레임덕에 빠졌다고 보았다. 돌이켜 보면, 노태우 대통령은 자기가 원하는 차기 정권을 만들 능력도 생각도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YS가 차기로 확정된 후에는 권력 다툼 같은 것이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없었다. 그러니까 당시를 구태여 레임덕이라고 부를 이유도 없다.
김영삼 정권은 95년 지방선거에서 수도권에서 패배한 후 5·18 청산으로 승기를 잡는가 했더니 96년 총선에서 고전했고 그해 말부터는 경제위기와 아들 사건으로 동력을 상실해 버렸다. 많은 여당 의원들이 차기 실세인 이회창 총재쪽으로 옮겨갔지만 YS는 이회창 총재를 후임 대통령으로 원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YS 정권 후기의 이런 현상도 고전적 의미의 ‘레임덕’이라고 볼 것은 아니고 정권 후반부의 ‘실패’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임기 전반부에는 DJP 연합이란 이상한 정부를 이끌어 가야 했고, 임기 후반기에는 무슨무슨 게이트 등 권력형 비리 사건이 많은 데다 아들 문제마저 발생해서 리더십에 손상을 입었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은 경선을 통해 선출된 노무현 후보가 후임으로 당선되는 ‘운’(運)을 누렸다.
노무현 정권은 탄핵 등 집권기간 내내 크고 작은 ‘분란’(紛亂)이 많았다. 즉흥적으로 개헌이니 연정이니 하는 제안을 하는가 하면, 사학법 개정과 종부세 도입으로 많은 ‘적’(敵)을 만들었다. 한미 FTA, 미군기지 이전 등으로 지지세력과 갈등을 빚었고, 불필요한 ‘말’로 가뜩이나 많은 ‘적’(敵)을 결집시켰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나라의 이른바 영향력 있는 곳이 다른 데로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이 현상을 ‘레임덕’이라고 부른다면 노무현 대통령은 ‘레임덕’을 의도적으로 즐긴, 거의 ‘자학적(自虐的) 측면’이 있지 않았나 한다. 정권 말에 노무현 대통령은 “한번만 저쪽에 주면 그 다음은 우리가 영원히 한다”는 야릇한 뉘앙스의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요즘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이 말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는데, 그렇다면 노무현 대통령 집권 말기도 고전적 의미의 ‘레임덕’은 아닐 것이다.
그러면 이명박 정권의 지금 현상은 ‘레임덕’이라고 할 것인가? 지금 벌어지고 있는 현상도 고전적 의미의 ‘레임덕’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정권과 정권을 뒷받침했던 외곽 장치가 전반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하는 현상이 아닌가 한다. 엊그제 평화방송 대담에서 내가 ‘아주 새로운 레임덕 현상’이라고 표현한 것도 바로 그런 의미이다. 성공한 정권은 ‘아름다운 퇴장’을 스스로 준비하기 때문에 레임덕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잘못한 것이 많고 숨기고 싶은 것이 많은 정권이 임기 종료를 두려워하고, 그래서 “우리에겐 레임덕이 없다”고 공연히 호기(豪氣)를 부리는 법이다.
<저작권자ⓒ뷰스앤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