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감세 찬성하는 오세훈, 부자급식은 왜 반대?"
이준구 교수 "우리의 새싹들이 부당한 수치심 느끼게 해선 안돼"
이준구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가 전면 무상급식을 '부자급식'이라고 주장하며 반대하는 오세훈 서울시장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부자감세'에는 적극 찬성하면서 '부자급식'엔 그렇게 반대하는 이유가 뭐냐는 힐난이다.
이 교수는 26일 오후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을 통해 오 시장의 무상급식 반대 논리의 맹점을 조목조목 생체해부했다.
그는 우선 오 시장의 '망국적 포퓰리즘' 주장에 대해 "아니, 우리나라가 무상급식 하나 실시해서 망할 정도로 허약한 나라라는 말인가? 아니면 무상급식 실시하는 데 천문학적 비용이 들어 나라 살림이 당장 거덜이라도 날 것이라는 말인가?"라고 반문한 뒤, "이런 얼토당토않은 과장법의 속셈이 반대파를‘나라 망치려 드는 사람’으로 몰아가려는 데 있음을 읽어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라고 질타했다.
그는 오 시장이 무상급식에 반대하는 진짜 속내에 대해서도 "서울시 전체의 예산이라는 틀 안에서 논의할 때, 무엇보다 우선 도마에 올라야 할 것은 오 시장이 개인적 애착을 갖고 있는 사업들이다. 예를 들어 한정된 예산이 디자인 서울, 한강 르네상스, 아라뱃길 같은 사업들에 우선적으로 투입되어야 하느냐, 아니면 무상급식에 우선적으로 투입되어야 하느냐의 선택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라며 "무상급식 문제를 이런 틀에서 논의하게 되면 자신이 애착을 갖고 있는 사업이 차질을 빚게 되는 문제가 바로 발생한다"고 일침을 가했다.
그는 자신이 무상급식에 찬성함을 밝힌 뒤, 그 이유에 대해 “가난한 가정의 어린이들이 떳떳하게 급식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는 '사회복지제도의 수혜자들이 어느 정도의 수치심을 느끼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하다'는 일부 극우들의 주장에 대해서도 "만약 빈곤이 순전히 개인의 책임이라면 사회복지제도의 수혜자들이 어느 정도의 수치심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 바람직할지 모른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 모두가 스스로의 게으름 때문에 혹은 앞날에 대한 준비의 부족 때문에 빈곤의 구렁텅이에 빠진 것은 아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통제할 수 없는 이유에 의해서 가난해진 사람도 있고, 사회적 역학관계에서 어쩔 수 없는 힘에 밀려 가난해진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사회도 개인의 빈곤에 대해 일부의 책임이 있는 셈"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결론적으로 "가난한 가정의 어린이와 부유한 가정의 어린이가 똑같이 아무런 자존감의 손상 없이 당당하게 무료급식의 혜택을 받을 권리를 갖고 있다"며 "나는 우리의 새싹들이 부당한 수치심을 느끼지 않고 해맑게 자랄 수 있다면 그 비용은 얼마든 정당화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고 단언했다.
그는 "물론 내 생각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얼마든 있을 수 있다. 아라뱃길을 뚫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4대강을 시멘트로 처바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며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무상급식과 관련된 논쟁의 핵심이 바로 이와 같은 가치관의 충돌에 있다는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이 교수의 글 전문.
무상급식 관련 논쟁의 핵심은 가치관의 충돌이다
무상급식 이슈는 기본적으로 한정된 자원을 어느 곳에 우선적으로 배정하는 것이 바람직한지의 문제다. 전면 무상급식 실시를 위해 좀 더 많은 세금을 낼 수도 있고, 다른 데다 써야 할 돈을 이쪽으로 끌어다 써야 할 필요도 생길 수 있다. 사람마다 우선순위에 대한 생각이 다를 수 있고, 따라서 무상급식이 바람직한지의 여부에 대한 생각도 다를 수 있다. 다른 정책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문제도 차분한 토론을 통해 이견을 해소해 나감으로써 적절한 합의점을 도출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 일부 인사들은 이 문제를 극단적인 이념적 대립구도로 몰아넣음으로써 나 죽기 아니면 너 죽기의 싸움판을 만들고 있다. 무상급식이라는‘망국적 포퓰리즘’과의 싸움에 선봉장을 자처하고 나선 오세훈 서울시장이 그 대표적 예다. 망국적 포퓰리즘을 여기서 막지 못한다면 나라가 무너져 버릴 것이라고 외치는 그에게서 이념투사의 결연한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이런 이념적 대립구도를 통해 보수층을 결집하는 정치적 효과를 얻을지 모르지만, 생산적인 토론이 전혀 이루어질 수 없게 만드는 불행한 결과를 빚고 있다.
원래 정치인들이 과장에 능하다는 것은 잘 알지만, 어떻게 여기에다 ‘망국적’이라는 무시무시한 말을 갖다 붙였는지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아니, 우리나라가 무상급식 하나 실시해서 망할 정도로 허약한 나라라는 말인가? 아니면 무상급식 실시하는 데 천문학적 비용이 들어 나라 살림이 당장 거덜이라도 날 것이라는 말인가? 이런 얼토당토않은 과장법의 속셈이 반대파를‘나라 망치려 드는 사람’으로 몰아가려는 데 있음을 읽어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오 시장은 무상급식보다 더 시급한 과제가 많다고 주장한다. 여론조사를 해 보면 가장 시급한 과제로 드러나는 것이 학교 안전이라고 말한다.또한 공교육이 부실해지면 사교육비가 많이 들어가니 방과후 학교도 강화해 달라는 요청도 많다고 말한다. 그는 또한 현장을 다니면서 들어보면 학교의 낙후된 시설부터 개선해 달라는 요구도 많았다고 덧붙인다.나는 이와 같은 그의 주장을 존중한다. 무상급식과 이 과제들 사이에서 어떻게 우선순위를 부여해야 할 것인지는 차분한 토론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그의 발언에는 논점을 교묘하게 흐리려는 어두운 의도가 숨겨져 있다. 교육에 사용될 예산의 틀 안에서만 무상급식의 우선순위를 논의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지 않은가? 당연한 말이지만, 서울시 전체의 예산이라는 틀 안에서 무상급식의 우선순위를 논의해야만 적절한 결론이 도출될 수 있다. 나는 오시장이 이런 단순한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구도에서 무상급식 문제에 접근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자신이 유리한 입지를 선점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런 구도를 선택했을 것이 분명하다.
서울시 전체의 예산이라는 틀 안에서 논의할 때, 무엇보다 우선 도마에 올라야 할 것은 오 시장이 개인적 애착을 갖고 있는 사업들이다. 예를 들어 한정된 예산이 디자인 서울, 한강 르네상스, 아라뱃길 같은 사업들에 우선적으로 투입되어야 하느냐, 아니면 무상급식에 우선적으로 투입되어야 하느냐의 선택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무상급식 문제를 이런 틀에서 논의하게 되면 자신이 애착을 갖고 있는 사업이 차질을 빚게 되는 문제가 바로 발생한다.
바로 이런 두려움 때문에 오 시장이 한사코 무상급식에 반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무상급식 문제와 관련해 한 가지 역설적인 점은, 이것의 실시로 인한 1차적 혜택이 중상류 계층에 돌아간다는 사실이다. 세금을 더 걷는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지금까지는 급식비를 내다가 내지 않게 되는 중상류 계층이 바로 그만큼의 혜택을 얻게 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런데 왜 보수적인 사람들은 그렇게 되면 나라가 망한다고 아우성을 치고 있을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퍼주기식 복지정책을 펴자는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그들은 부유층에게 감세 혜택을 주면 우리 경제가 살아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감세 혜택이나 급식비 면제 혜택이나 그게 그건데 왜 하나는 되고 다른 하나는 안 된다고 입에 거품을 무는 것일까?
설사 세금을 더 걷게 된다 하더라도 중상류 계층에 큰 손해가 돌아가는 일은 없다. 과거에 급식비로 내던 것을 세금으로 바꿔서 내게 되는 데 불과하기 때문이다. 보수적인 사람들은 과연 어떤 근거에서 이와 같은 변화가 우리 경제에 해로운 영향을 미친다고 보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그저 해로운 정도가 아니라 나라가 기울어질 정도로 해로운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한사코 반대하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내 머리가 나빠서 그런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럴 만한 이유를 생각해 내기 힘들다.
그들은 나에게 이렇게 물을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신은 왜 한사코 무상급식에 찬성하는 거요?” 나는 이 질문에 서슴지 않고 대답할 수 있다. “가난한 가정의 어린이들이 떳떳하게 급식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어린이들의 자존감을 높여 주는 데서 오는 이득이 그렇게 만들어 주는 데 드는 비용보다 훨씬 더 크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나는 무상급식에 찬성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회복지제도의 혜택을 받는 사람은 자신이 사회의 도움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어느 정도의 수치심을 갖게 마련이다. 다른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기 때문에 그런 점도 있고, 도움을 받는 처지에 있는 자신이 부끄럽다는 심정, 즉 자괴심(自愧心) 때문에 그런 점도 있다. 따라서 정부가 아무리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가난한 사람을 도와준다 해도 혜택을 받는 사람이 느끼는 수치심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
내년부터 무료급식 대상자를 학교에서 선정하는 것이 아니라 동사무소에서 선정하기 때문에 전면 무료급식을 실시할 필요성이 없어졌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학교에서는 누가 무료급식 대상자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제한적인 무료급식을 계속한다 하더라도 가난한 가정의 어린이가 수치심을 느낄 이유가 없다는 근거에서 그런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이 무료급식의 대상자라는 사실을 모를 리 없고, 그 점에서 자존감의 상실을 경험하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극단적으로 보수적인 사람은 사회복지제도의 수혜자들이 어느 정도의 수치심을 느끼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수치심을 느껴야만 스스로 열심히 일해 사회복지제도의 혜택을 받지 않으려는 유인이 생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유명 보수논객인 머레이(C. Murray)는 미국의 사회복지제도가 실패한 사람들에게 무분별한 도움을 줌으로써 ‘실패할 유인’(incentive to fail)을 준다고 비판한 바 있다. 그라면 사회복지제도의 수혜자들이 수치심을 느끼도록 만드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할 것이 틀림없다.
만약 빈곤이 순전히 개인의 책임이라면 사회복지제도의 수혜자들이 어느 정도의 수치심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 바람직할지 모른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 모두가 스스로의 게으름 때문에 혹은 앞날에 대한 준비의 부족 때문에 빈곤의 구렁텅이에 빠진 것은 아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통제할 수 없는 이유에 의해서 가난해진 사람도 있고, 사회적 역학관계에서 어쩔 수 없는 힘에 밀려 가난해진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사회도 개인의 빈곤에 대해 일부의 책임이 있는 셈이라고 말할 수 있다.
빈곤에 대해 사회도 책임의 일부를 져야 한다면, 사회복지제도의 수혜자들이 느끼는 수치심을 최소화해 주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뿐만 아니라 사회복지제도는 일종의 사회적 보험의 성격을 갖는다는 점에서도 수혜자들에게 쓸데없이 수치심을 느끼도록 만들어서는 안 된다. 사회복지제도는 사회적 안전망(social safety net)을 구축한다는 뜻에서 도입된 제도다. 우리가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할 수 있듯, 뜻하지 않게 빈곤의 구렁텅이로 빠질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 대비해 안전망을 쳐놓아 두자는 뜻에서 만들어 놓은 것이 바로 사회복지제도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험금을 탈 때 수치심을 느낄 필요가 없는 것처럼, 사회복지제도의 혜택을 받으면서 수치심을 느껴야 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닐까?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무상급식의 경우에는 수치심을 느끼는 주체가 어린이라는 점을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 그 어린이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손톱만큼의 책임도 없다. 가난한 부모를 둔 것이 죄가 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가난한 가정의 어린이들이 무상급식으로 인해 조금이라도 마음의 상처를 입게 만든다면 그것은 이만저만 부당한 일이 아니다. 모든 어린이가 가정의 경제상황과 관계없이 떳떳하게 무상급식의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무상급식의 문제를 보편적 복지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반대하고 있다. 보편적이든 선택적이든 복지는 복지일 뿐이며, 그렇다면 이에 따르는 수치심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부유한 가정의 어린이도 함께 혜택을 받는다 해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어린이 때문에 무상급식 제도가 도입되었다는 사실이 지워지지는 않는다. 보편적 복지의 관점에서 전면 무상급식을 실시하자는 주장은 물타기를 해서 진실을 감춰 보자는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바로 이 점에서 학교에서의 급식이 가치재(merit goods)의 성격을 갖는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리가 어린이들에게 무상으로 의무교육을 실시하는 것은 그것이 가치재의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모든 국민이 최소 9년의 교육을 받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판단에서 의무교육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재벌의 자제도 무상으로 교육의 혜택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의무교육이기 때문에 무료로 제공하는 서비스가 반드시 수업에만 국한되어야 할 논리적 이유는 없다. 수업을 받기 위해 필요한 교과서도 무료로 제공될 수 있고, 수업 도중 하게 되는 식사도 무료로 제공될 수 있다. 현재 가난한 가정의 어린이들에게 제한적인 무료급식을 실시하는 이유는 모든 어린이가 영양 있는 점심을 먹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에 있음이 분명하다. 모든 어린이가 영양 있는 점심을 먹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은 급식이 바로 가치재의 성격을 갖는다는 뜻이다. 가치재라는 것이 바로 그런 의미로 정의된 개념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사실은 모든 어린이가 가치재로서의 무료급식에 대해 당당한 권리를 갖는다는 점이다. 이제는 무료급식이 시혜의 차원에서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물타기에 의해 모든 사람이 함께 얻게 된 혜택도 아니다. 가난한 가정의 어린이와 부유한 가정의 어린이가 똑같이 아무런 자존감의 손상 없이 당당하게 무료급식의 혜택을 받을 권리를 갖고 있다. 내가 무료급식을 가치재의 차원에서 접근하자고 주장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우리의 새싹들이 부당한 수치심을 느끼지 않고 해맑게 자랄 수 있다면 그 비용은 얼마든 정당화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전면 무상급식의 실시에 가장 높은 우선순위를 부여해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물론 내 생각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얼마든 있을 수 있다. 아라뱃길을 뚫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4대강을 시멘트로 처바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무상급식과 관련된 논쟁의 핵심이 바로 이와 같은 가치관의 충돌에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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