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6자회담', 그리고 '북핵 6자회담'
<특별기고> 20년만에 되돌아보는 '베를린장벽 붕괴'
벌써 20년이 흘렀다니!
베를린장벽 위에서 춤추면서 독일인은 말했다. “통일? 말도 마쇼, 빨라야 21세기 초에나 될까?” 장벽 밑의 기자에게 던진 말이 아직도 생생하게 귓가를 맴돈다. 그때 까마득했던 21세기는 벌써 9년이나 지나갔다.
동독 출신이 총리된 독일
베를린에서 지난 4일부터 11월9일까지 통일과 평화와 자유, 행복을 독일인에게 안겨 준 베를린장벽붕괴 20주년 기념행사가 시작했다. 그때 장벽 앞에서 뮌헨대 교수는 "게르만이 상호왕래의 자유를 쟁취한 것만도 감동적"이라며 눈물을 흘렸다. 한반도 휴전선과 같이 세계의 2대 화약고 중 하나인 베를린장벽 붕괴로 독일문제는 20년 전에 해결되었다. 돌이켜보면 일생 그렇게 벅찬 감격과 희망으로 취재하고 글을 쓴 적이 없다. 한반도 휴전장벽개방의 희망을 그때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20년 후 한반도의 냉전 장벽은 요지부동이다.
독일 메르켈 총리의 기민-자유당 우파연립정부가 베를린에서 유럽 정상들의 축하를 받으며 11월9일 출범한다는 소식이다. 메르켈은 “나는 새 정부와 같이 장벽붕괴 20주년을 축하하는 유럽과 세계 정상들에게 정중한 인사를 나눌 것”이라고 말했다. 헬무트 콜 총리가 1년 미만의 짧은 시일에 통독을 완성한지 20년, 메르켈이 축하를 받으니 독일은 평화와 자유를 만끽하는 행복한 나라가 되었다. 메르켈은 장벽붕괴가 낳은 동독인으로, 20주년에 독일 총리가 되었으니 그의 말대로 “기적”과 같은 일이다.
한국기자의 입장에서, 독일은 20년 동안 ‘역사의 가속페달’을 잘도 밟아 히틀러의 나치전체주의를 청산하고 민주와 시장경제, 평화와 인권의 모범선진국으로 거듭나는 데 성공했다. 독일의 ‘평양’ 동베를린은 통독 수도로 도약했으나, 한반도의 ‘동베를린’ 평양은 20세기의 옛 그대로다.
20세기에는 2개의 시한폭탄이 평화를 위협했다. 독일문제는 베를린장벽을 상징했고, 한반도문제는 휴전선이 말했다. 독일문제는 민중혁명으로 공산정권을 전복함으로써 해결되었다. 2차 세계대전 결과, 세계가 자유-공산진영으로 분할된 20세기 세계는 장벽붕괴로 독일문제를 해소했다. 이는 공산주의 멸망과 냉전 해체, 독일 통일, 자본주의-민주주의 세계화를 가져왔다. 유럽을 필두로 평화구조가 움트기 시작했다. 중국은 개혁개방으로, 공산주의 원조 소련은 페레스트로이카를 통해 자본주의에 합류했다. 세계는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로 통합되었고, 이것은 평화를 담보하는 기본조건이다. 공산주의 멸망으로 냉전체제가 종식된 것이다.
1989년11월21일 미국 부시 대통령, 소련 고르바초프 대통령, 통독 콜 총리 영국 메이저 총리 등 26명의 정상은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정상회담에서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의 파리선언 낭독을 경청했다. 선언은 “21세기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인류 보편의 진리가 되므로 국제사회의 수용을 추천한다”고 천명했다. 당시에는 세계 화약고가 모두 제거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한반도는 여전히 화약고로 남아있다. 2차 세계대전은 나치즘 전체주의를 멸망했으며, 베를린장벽 붕괴는 스탈린주의와 공산주의 전체주의를 종식했다. 그러나 북한은 스탈린주의 이상의 전제군주적 전체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핵폭탄을 보유한 상태이다. 북한의 핵보유는 한반도분단이 지속되며 국제평화도 위협당하고 있다. 역사가 속도를 내는 변화에 한반도는 역주행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국이 ‘역사의 질주’를 따라잡기 위한 노력은 국제사회의 박수를 받는다. 그러나 남북 극복으로 평화와 자유의 세계사의 조류에 합류해 한반도문제의 해결은 아직 가시화되 않고 있다. 북핵문제 6자회담이 김정일을 설득해 한반도의 비핵화를 달성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한반도문제를 풀기 위한 국제사회의 역량이 점차 소진되는 듯한 모습이 불안하다. 북이 핵무장이 독약임을 깨닫고 개혁개방에 나선다면 해결의 길은 열린다. 그래서 베를린장벽 붕괴를 새삼스럽게 되짚어 보는 것이다.
콜 "나는 내 임기 안에 통일이 될 줄 몰랐다"
통독의 아버지 콜 총리는 최근 베를린장벽 붕괴를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독일이 언젠가 통일하리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나는 내 임기 안에 통일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부터 무엇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없이는 1989년 가을의 대변동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다....나는 처음부터 3가지 원칙을 정했다. 첫째 우리 헌법 규정한 자유민주주의 체제하의 독일통일 목적을 재확인하고, 둘째 북대서양동맹(나토)와 독-미 동맹에 충실히 순응해야 하며, 셋째 유럽통합 진전을 위해 우리 친구 프랑스와 함께 동반자가 되어 엔진역할을 계속한다는 것이다.”
콜의 3가지 목표는 모두 이루어졌다. 첫째 서독의 의회민주주제와 시장경제체제로 통일을 성취했다. 그리고 공산진영 바르샤바 조약기구 핵심국가 동독은 통일과 함께 서독에 흡수되어 나토회원국에 편입되었다. 통독은 미국과 동맹국으로 밀월을 계속하고 있다. 콜은 미테랑과 쌍두마차를 이루어 유럽통합열차를 운전해 오늘 유럽연합(EU)을 완성한 선구자가 되었다. 10월4일 아일랜드가 국민투표에서 리스본조약을 비준함으로써 유럽의 정치통합까지 마무리된 것이다. 20년 전에는 EU회원국은 15개국이었으나, 지난 20년간 동구공산국가들이 모두 의회민주주의에 합류함으로써 27개국으로 늘어났다. 콜 말대로, 아무도 베를린장벽붕괴가 통독, 냉전 해체, 공산주의 멸망, 유럽통합이 되리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메르켈은 이것을 “기적”이라고 표현했지만, 전적으로 동감하나 부연할 것이 있다.
베를린장벽 붕괴는 유럽의 최대 위기가 되어, 잘못하면 전쟁으로 확산될 위험이 컸다. 소련제국이 동구 위성국을 방임하리라고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1989년11월10일 장벽에 도착한 필자는 많은 동-서독인들과 인터뷰했다. 아무도 감히 ‘통일’을 말하지 않았고, 몇몇 지식인들이 “빨라야 21세기 초”라고 말했다. 콜 총리는 폴란드 공식방문으로 현장에 없었다. 그는 폴란드방문을 취소하고 3일 후 베를린에 왔다. 간신히 장벽붕괴축하 공식행사에 참석했다. 동독에는 소련군 43만이 주둔하고 있었고, 바르샤바조약기구가 시퍼렇게 살아 있었다. 고르바초프(고르비) 대통령은 앞서 프랑스, 서독, 영국을 방문하면서 1000억 달러 원조를 호소했다. 1989년 7월 파리방문에서 “제국의 멸망에는 큰 소리가 나는 법이다. 1000억 달러 지원이 있어야 재앙을 피할 수 있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한 푼도 지원되지 않았다.
1989년 7월13일, 파리의 G7정상회담은 파산하는 동구경제 지원책을 협의해 동구개발은행(EBRD)의 창설을 결정했다. 이때는 헝가리가 개방한 오스트리아 국경선으로 동독난민들이 몰려들 때였다. 동독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헝가리정부는 난민의 서독탈출을 허용했다. 동독난민들의 탈출 러시를 '게르만 엑서더스'라 불렀으며, 베를린장벽 붕괴의 전주곡이었다. 탈출 동기는 식량부족-특히 채소와 과일- 때문이었다. 서독적십자사와 서독인들은 바나나와 귤 보따리를 탈출난민에게 안겨주고 있었다. 동독난민들은 체코, 폴란드의 서독대사관에도 난입해 서독행을 외쳤다. 9월10일 동독시민의 시위대를 정치조직화한 NGO ‘노이에스포럼’(새로운 포럼)이 동베를린에 등장했다. 서독방문 자유화를 위한 시위를 호네커 정권의 전복으로 전환했다. 9월25일 8천여명의 시민이 라이프치히 성-니콜라성당 시위에 이어, 10월7일 동독국가 창립 40주년 기념식에 고르비가 참석해 시위는 절정에 달했다.
국제사회는 고르비의 행동을 주시했다. 호네커 동독지도자는 탈출난민을 배신자로 비난하고 체제유지의 지속을 강변했다. 동독에 43만 군대를 보유한 고르비는 호네커를 지원하지 않았다. 그는 호네커에게 “개혁-페레스트로이카-를 늦추면 천벌 받는다”고 경고한 것이다. 이때부터 동독은 시민저항으로 속수무책이 되었다. 오늘은 7만, 내일은 10만의 시위군중이 거리를 누볐다. 이 틈에 헝가리를 통해 서독으로 탈출한 난민은 무려 5만에 달했다. 11월4일에는 동베를린에 1백만 시위군중이 “우리는 한 민족”이라는 구호를 처음으로 외쳤다. 그리고 11월9일까지 베를린장벽으로 향해 쇄도, 동베를린은 사실상 무정부상태가 되었다. 1961년 8월13일 설치된 장벽은 운명을 다하고 있었다.
11월9일 오후 7시경 동독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전격적으로 장벽개방을 선언했다. 공산당대변인 샤보프스키는 ‘개인의 해외여행자유를 시행한다. 경찰관서는 현행법에 관계없이 즉각 출국비자를 발부한다. 출국은 독일연방공화국(서독)과 독일민주공화국의 모든 국경선에서 시행한다’는 공산당 결정을 낭독했다. 라디오와 TV로 뉴스가 나가자마자 베를린장벽으로 양독 시민들이 달려갔다. 역사가 속도를 내며 냉전시대를 끝내고 21세기를 여는 역사적 장면이 전 세계에 방영되었다. 필자도 오후 8시 파리의 저녁뉴스에서 “독일시민이 장벽으로 달려가는 장면”을 보고 다음날 새벽 첫 비행기로 베를린장벽에 달려가 취재에 임했다.
유럽, 거대독일 출현에 공포 느끼기도
서방지도자들은 경악하면서 장벽을 주시했다.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지만, 결과는 분명해 보였다. 한 시대의 종말이 폭풍처럼 오고 있었다. 동독시민의 시위는 공산정권타도로 바뀌었고, 민주화-자유화 바람은 즉각 프라하, 바르샤바, 부다페스트, 부쿠레슈티로 거세게 불었다. 유럽대변동의 폭풍을 평화적으로 마무리하기 위해 서방지도자들이 동분서주했다.
영국의 대처 총리는 독일통일에 반대했다.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은 주저하고 있었다. 유럽여론은 통독은 거대독일을 출현시켜 양차세계대전의 화근을 다시 부른다는 우려와 불안을 반영했다. 불안은 곧 공포로 변했다. 통독 후 온갖 시나리오가 보도되었다. "제2의 히틀러가 등장해 세계전쟁의 재앙이 재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테랑은 독일의 비난을 무릅쓰고 동독 드레스덴을 방문했고, 다음에는 키에프에서 고르비와 정상회담을 가졌다. 미테랑은 동독시민의 통일의지와 고르비의 진의를 타진한 것이다. 그는 대처의 반대에도 불구 “통독은 불가피하다. 한 민족의 인위적 분단은 자연의 섭리에 어긋난다”고 폭탄선언을 했다.
누구보다도 다급한 지도자는 콜 서독총리였다. 그는 주말이면 파리로 날아와 미테랑과 비밀숙의를 거듭했다. 미테랑은 통독의 전제조건을 제시했다. 유럽연합과 나토의 한 회원국으로 통독이 남을 것, 핵무기의 개발, 보유, 보관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독이 소련의 점령상태인 것과 똑 같이 서독도 미국, 영국, 프랑스군의 점령 밑에 있었다. 2차대전의 전후가 마무리되어야 독일은 주권을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 또 폴란드의 요청으로 미테랑은 통독의 동부국경선을 오데르-나이세선으로 한다는 조건을 추가했다. 얄타회담에서 스탈린과 처칠이 전후 유럽분할관리를 위한 임시경계선으로, 프러시아의 광범한 땅을 포기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독일 내부에는 콜에게 프러시아의 영토를 회복하라는 압력이 가중되고 있었다. 콜은 미테랑의 요구에 난색을 표명했다가 결국 쓴 약을 마셨다.
미테랑은 독단적으로 콜과 담판해 통독문제를 매듭지었다. 미국 부시 대통령이 대처보다는 미테랑-콜의 합의에 손을 들어주어 통독은 급진전되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소련에 있었다. 소련은 동독의 나토 가입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리고 2차 대전에서 2천만 슬라브민족의 희생으로 통독을 용납할 수 없다는 여론이 팽배했다. 콜은 고르비의 고향을 찾아가 담판했다. 닷새 동안 통독이 유럽평화에 유리할 것이라고 설득했고, 1천억 달러의 경제지원을 약속했다. 그리고 동독주둔 소련군의 철군경비와 귀국 후 군의 시설경비 부담을 약속했다. 콜은 고르비와의 담판이 통독의 고비를 넘겼다고 회고했다. 독일은 철학자 칸트의 고향인 칼리닌그라드를 영원히 러시아에 내어주는 아픔을 통일을 위해 잘 참았다.
통독을 위한 2차대전 전승강대국과 전후문제의 처리는 1990년 3월부터 6자회담(동서독,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외상회담으로, 2+4회담이라 불렀다)에서 깨끗이 마무리했다. 1990년 8월 모스크바의 6자회담은 통독비준의정서를 채택했다. 여기서 장벽붕괴가 유발한 변동의 폭풍은 위기를 넘어 총 한 방 쏘지 않고 평화적으로 매듭지어졌다. 미국의 부시, 프랑스의 미테랑, 소련의 고르비와 서독의 콜이 대정치인의 리더십을 발휘한 결과다.
유럽지도는 상전벽해처럼 바뀌었다. 대정치인들이 등장해 최악의 시나리오를 피해 위기를 기회로 대반전 시키는 평화와 자유의 역사를 창조했다. 그리하여 유럽은 20세기 냉전, 이념적 분단, 동서진영체제, 공산주의시대 등을 과거에 매장하고 21세기 새 시대를 열었다. 평화, 민주, 시장경제, 인권, 사회정의가 새 시대의 가치관이 되었다.
"독일 다음은 한국 차례이나..."
또 하나의 화약고, 한반도문제는 21세기 국제사회의 최대과제로 남았다. 한반도의 6자회담은 최근 북한이 사망을 선고했지만, 중국, 미국, 한국이 살리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북한은 한반도 비핵화선언과 9.19선언에도 불구하고 2차의 핵실험을 강행, 이제 핵보유국을 자처하고 있다.
여기서 독일문제를 풀어낸 열쇠가 공산국 지도자의 개혁의지가 결정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유럽의 기적’은 당시 대정치인들의 각고의 노력이 빚은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고르비는 페레스트로이카를 하면서 서서히 죽어가는 공산주의체제를 안락사시켜 의회민주제와 시장경제를 연착륙시키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1968년 '프라하의 봄'을 탱크로 진압한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파기함으로써, 독일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고르비는 공산정권 전복을 방임했던 것이다. 미테랑은 통독와 유럽변동의 흐름을 자연법으로 해석하고 유럽통합이라는 큰 바구니에 쓸어 담는 데 성공했다. 냉전 후의 세계에 대한 선견지명과 통독을 유럽통합기관차에 태우고 가는 리더십을 미테랑은 보였다.
콜은 통일의 유일한 기회라는 명제를 잡고 프랑스와 러시아를 국제정세의 변화를 활용해 설득함으로써 불과 326일 만에 통일로 골인시켰다. 내부적으로 헌법상 통일방식을 놓고 사민당의 146조와 기민연의 23조로 대립했지만, 콜이 후자를 밀고 나감으로써 초고속 통일을 달성했다. 146조는 국민투표를 통한 통일이고, 23조는 서독체제에 동독을 편입시키는 흡수통일이다. 콜의 선택이야말로 통독을 완결한 리더십의 결정체였다. 1989년부터 1991년 12월 소련 멸망까지 20세기를 마감한 유럽변동을 취재하면서 동독을 비롯한 동구사람들이 필자에게 한 말은 한결같았다.
“독일 다음에는 한국 차례다!”
필자도 그렇다고 답했고, 그렇게 기대했다. 그러나 “한국 차례”는 20년이 지나도 오지 않고 있다. 한반도의 6자회담은 북한 핵 폐기를 위한 것이다. 통독의 6자회담 성공과는 달리, 분단극복과 평화정착을 위해서는 아직 먼 길이 남았다. 가끔 북핵문제의 답답한 교착국면을 보면서 타임머신으로 20세기 냉전시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착각을 일으킬 때도 있다.
그러면서도 북핵폐기로 한반도평화가 반드시 올 것이라는 확신을 다짐해 본다. 이 길 밖에는 다른 선택이 없다는 것이 베를린장벽붕괴의 교훈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오바마, 후진타오, 이명박과 하토야마 등 오늘의 세계 주역들이 20년 전 대정치인들과 같은 혜안과 리더십으로 한반도문제를 평화적으로 풀기를 간절히 바란다.
베를린장벽 위에서 춤추면서 독일인은 말했다. “통일? 말도 마쇼, 빨라야 21세기 초에나 될까?” 장벽 밑의 기자에게 던진 말이 아직도 생생하게 귓가를 맴돈다. 그때 까마득했던 21세기는 벌써 9년이나 지나갔다.
동독 출신이 총리된 독일
베를린에서 지난 4일부터 11월9일까지 통일과 평화와 자유, 행복을 독일인에게 안겨 준 베를린장벽붕괴 20주년 기념행사가 시작했다. 그때 장벽 앞에서 뮌헨대 교수는 "게르만이 상호왕래의 자유를 쟁취한 것만도 감동적"이라며 눈물을 흘렸다. 한반도 휴전선과 같이 세계의 2대 화약고 중 하나인 베를린장벽 붕괴로 독일문제는 20년 전에 해결되었다. 돌이켜보면 일생 그렇게 벅찬 감격과 희망으로 취재하고 글을 쓴 적이 없다. 한반도 휴전장벽개방의 희망을 그때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20년 후 한반도의 냉전 장벽은 요지부동이다.
독일 메르켈 총리의 기민-자유당 우파연립정부가 베를린에서 유럽 정상들의 축하를 받으며 11월9일 출범한다는 소식이다. 메르켈은 “나는 새 정부와 같이 장벽붕괴 20주년을 축하하는 유럽과 세계 정상들에게 정중한 인사를 나눌 것”이라고 말했다. 헬무트 콜 총리가 1년 미만의 짧은 시일에 통독을 완성한지 20년, 메르켈이 축하를 받으니 독일은 평화와 자유를 만끽하는 행복한 나라가 되었다. 메르켈은 장벽붕괴가 낳은 동독인으로, 20주년에 독일 총리가 되었으니 그의 말대로 “기적”과 같은 일이다.
한국기자의 입장에서, 독일은 20년 동안 ‘역사의 가속페달’을 잘도 밟아 히틀러의 나치전체주의를 청산하고 민주와 시장경제, 평화와 인권의 모범선진국으로 거듭나는 데 성공했다. 독일의 ‘평양’ 동베를린은 통독 수도로 도약했으나, 한반도의 ‘동베를린’ 평양은 20세기의 옛 그대로다.
20세기에는 2개의 시한폭탄이 평화를 위협했다. 독일문제는 베를린장벽을 상징했고, 한반도문제는 휴전선이 말했다. 독일문제는 민중혁명으로 공산정권을 전복함으로써 해결되었다. 2차 세계대전 결과, 세계가 자유-공산진영으로 분할된 20세기 세계는 장벽붕괴로 독일문제를 해소했다. 이는 공산주의 멸망과 냉전 해체, 독일 통일, 자본주의-민주주의 세계화를 가져왔다. 유럽을 필두로 평화구조가 움트기 시작했다. 중국은 개혁개방으로, 공산주의 원조 소련은 페레스트로이카를 통해 자본주의에 합류했다. 세계는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로 통합되었고, 이것은 평화를 담보하는 기본조건이다. 공산주의 멸망으로 냉전체제가 종식된 것이다.
1989년11월21일 미국 부시 대통령, 소련 고르바초프 대통령, 통독 콜 총리 영국 메이저 총리 등 26명의 정상은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정상회담에서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의 파리선언 낭독을 경청했다. 선언은 “21세기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인류 보편의 진리가 되므로 국제사회의 수용을 추천한다”고 천명했다. 당시에는 세계 화약고가 모두 제거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한반도는 여전히 화약고로 남아있다. 2차 세계대전은 나치즘 전체주의를 멸망했으며, 베를린장벽 붕괴는 스탈린주의와 공산주의 전체주의를 종식했다. 그러나 북한은 스탈린주의 이상의 전제군주적 전체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핵폭탄을 보유한 상태이다. 북한의 핵보유는 한반도분단이 지속되며 국제평화도 위협당하고 있다. 역사가 속도를 내는 변화에 한반도는 역주행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국이 ‘역사의 질주’를 따라잡기 위한 노력은 국제사회의 박수를 받는다. 그러나 남북 극복으로 평화와 자유의 세계사의 조류에 합류해 한반도문제의 해결은 아직 가시화되 않고 있다. 북핵문제 6자회담이 김정일을 설득해 한반도의 비핵화를 달성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한반도문제를 풀기 위한 국제사회의 역량이 점차 소진되는 듯한 모습이 불안하다. 북이 핵무장이 독약임을 깨닫고 개혁개방에 나선다면 해결의 길은 열린다. 그래서 베를린장벽 붕괴를 새삼스럽게 되짚어 보는 것이다.
콜 "나는 내 임기 안에 통일이 될 줄 몰랐다"
통독의 아버지 콜 총리는 최근 베를린장벽 붕괴를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독일이 언젠가 통일하리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나는 내 임기 안에 통일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부터 무엇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없이는 1989년 가을의 대변동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다....나는 처음부터 3가지 원칙을 정했다. 첫째 우리 헌법 규정한 자유민주주의 체제하의 독일통일 목적을 재확인하고, 둘째 북대서양동맹(나토)와 독-미 동맹에 충실히 순응해야 하며, 셋째 유럽통합 진전을 위해 우리 친구 프랑스와 함께 동반자가 되어 엔진역할을 계속한다는 것이다.”
콜의 3가지 목표는 모두 이루어졌다. 첫째 서독의 의회민주주제와 시장경제체제로 통일을 성취했다. 그리고 공산진영 바르샤바 조약기구 핵심국가 동독은 통일과 함께 서독에 흡수되어 나토회원국에 편입되었다. 통독은 미국과 동맹국으로 밀월을 계속하고 있다. 콜은 미테랑과 쌍두마차를 이루어 유럽통합열차를 운전해 오늘 유럽연합(EU)을 완성한 선구자가 되었다. 10월4일 아일랜드가 국민투표에서 리스본조약을 비준함으로써 유럽의 정치통합까지 마무리된 것이다. 20년 전에는 EU회원국은 15개국이었으나, 지난 20년간 동구공산국가들이 모두 의회민주주의에 합류함으로써 27개국으로 늘어났다. 콜 말대로, 아무도 베를린장벽붕괴가 통독, 냉전 해체, 공산주의 멸망, 유럽통합이 되리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메르켈은 이것을 “기적”이라고 표현했지만, 전적으로 동감하나 부연할 것이 있다.
베를린장벽 붕괴는 유럽의 최대 위기가 되어, 잘못하면 전쟁으로 확산될 위험이 컸다. 소련제국이 동구 위성국을 방임하리라고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1989년11월10일 장벽에 도착한 필자는 많은 동-서독인들과 인터뷰했다. 아무도 감히 ‘통일’을 말하지 않았고, 몇몇 지식인들이 “빨라야 21세기 초”라고 말했다. 콜 총리는 폴란드 공식방문으로 현장에 없었다. 그는 폴란드방문을 취소하고 3일 후 베를린에 왔다. 간신히 장벽붕괴축하 공식행사에 참석했다. 동독에는 소련군 43만이 주둔하고 있었고, 바르샤바조약기구가 시퍼렇게 살아 있었다. 고르바초프(고르비) 대통령은 앞서 프랑스, 서독, 영국을 방문하면서 1000억 달러 원조를 호소했다. 1989년 7월 파리방문에서 “제국의 멸망에는 큰 소리가 나는 법이다. 1000억 달러 지원이 있어야 재앙을 피할 수 있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한 푼도 지원되지 않았다.
1989년 7월13일, 파리의 G7정상회담은 파산하는 동구경제 지원책을 협의해 동구개발은행(EBRD)의 창설을 결정했다. 이때는 헝가리가 개방한 오스트리아 국경선으로 동독난민들이 몰려들 때였다. 동독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헝가리정부는 난민의 서독탈출을 허용했다. 동독난민들의 탈출 러시를 '게르만 엑서더스'라 불렀으며, 베를린장벽 붕괴의 전주곡이었다. 탈출 동기는 식량부족-특히 채소와 과일- 때문이었다. 서독적십자사와 서독인들은 바나나와 귤 보따리를 탈출난민에게 안겨주고 있었다. 동독난민들은 체코, 폴란드의 서독대사관에도 난입해 서독행을 외쳤다. 9월10일 동독시민의 시위대를 정치조직화한 NGO ‘노이에스포럼’(새로운 포럼)이 동베를린에 등장했다. 서독방문 자유화를 위한 시위를 호네커 정권의 전복으로 전환했다. 9월25일 8천여명의 시민이 라이프치히 성-니콜라성당 시위에 이어, 10월7일 동독국가 창립 40주년 기념식에 고르비가 참석해 시위는 절정에 달했다.
국제사회는 고르비의 행동을 주시했다. 호네커 동독지도자는 탈출난민을 배신자로 비난하고 체제유지의 지속을 강변했다. 동독에 43만 군대를 보유한 고르비는 호네커를 지원하지 않았다. 그는 호네커에게 “개혁-페레스트로이카-를 늦추면 천벌 받는다”고 경고한 것이다. 이때부터 동독은 시민저항으로 속수무책이 되었다. 오늘은 7만, 내일은 10만의 시위군중이 거리를 누볐다. 이 틈에 헝가리를 통해 서독으로 탈출한 난민은 무려 5만에 달했다. 11월4일에는 동베를린에 1백만 시위군중이 “우리는 한 민족”이라는 구호를 처음으로 외쳤다. 그리고 11월9일까지 베를린장벽으로 향해 쇄도, 동베를린은 사실상 무정부상태가 되었다. 1961년 8월13일 설치된 장벽은 운명을 다하고 있었다.
11월9일 오후 7시경 동독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전격적으로 장벽개방을 선언했다. 공산당대변인 샤보프스키는 ‘개인의 해외여행자유를 시행한다. 경찰관서는 현행법에 관계없이 즉각 출국비자를 발부한다. 출국은 독일연방공화국(서독)과 독일민주공화국의 모든 국경선에서 시행한다’는 공산당 결정을 낭독했다. 라디오와 TV로 뉴스가 나가자마자 베를린장벽으로 양독 시민들이 달려갔다. 역사가 속도를 내며 냉전시대를 끝내고 21세기를 여는 역사적 장면이 전 세계에 방영되었다. 필자도 오후 8시 파리의 저녁뉴스에서 “독일시민이 장벽으로 달려가는 장면”을 보고 다음날 새벽 첫 비행기로 베를린장벽에 달려가 취재에 임했다.
유럽, 거대독일 출현에 공포 느끼기도
서방지도자들은 경악하면서 장벽을 주시했다.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지만, 결과는 분명해 보였다. 한 시대의 종말이 폭풍처럼 오고 있었다. 동독시민의 시위는 공산정권타도로 바뀌었고, 민주화-자유화 바람은 즉각 프라하, 바르샤바, 부다페스트, 부쿠레슈티로 거세게 불었다. 유럽대변동의 폭풍을 평화적으로 마무리하기 위해 서방지도자들이 동분서주했다.
영국의 대처 총리는 독일통일에 반대했다.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은 주저하고 있었다. 유럽여론은 통독은 거대독일을 출현시켜 양차세계대전의 화근을 다시 부른다는 우려와 불안을 반영했다. 불안은 곧 공포로 변했다. 통독 후 온갖 시나리오가 보도되었다. "제2의 히틀러가 등장해 세계전쟁의 재앙이 재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테랑은 독일의 비난을 무릅쓰고 동독 드레스덴을 방문했고, 다음에는 키에프에서 고르비와 정상회담을 가졌다. 미테랑은 동독시민의 통일의지와 고르비의 진의를 타진한 것이다. 그는 대처의 반대에도 불구 “통독은 불가피하다. 한 민족의 인위적 분단은 자연의 섭리에 어긋난다”고 폭탄선언을 했다.
누구보다도 다급한 지도자는 콜 서독총리였다. 그는 주말이면 파리로 날아와 미테랑과 비밀숙의를 거듭했다. 미테랑은 통독의 전제조건을 제시했다. 유럽연합과 나토의 한 회원국으로 통독이 남을 것, 핵무기의 개발, 보유, 보관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독이 소련의 점령상태인 것과 똑 같이 서독도 미국, 영국, 프랑스군의 점령 밑에 있었다. 2차대전의 전후가 마무리되어야 독일은 주권을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 또 폴란드의 요청으로 미테랑은 통독의 동부국경선을 오데르-나이세선으로 한다는 조건을 추가했다. 얄타회담에서 스탈린과 처칠이 전후 유럽분할관리를 위한 임시경계선으로, 프러시아의 광범한 땅을 포기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독일 내부에는 콜에게 프러시아의 영토를 회복하라는 압력이 가중되고 있었다. 콜은 미테랑의 요구에 난색을 표명했다가 결국 쓴 약을 마셨다.
미테랑은 독단적으로 콜과 담판해 통독문제를 매듭지었다. 미국 부시 대통령이 대처보다는 미테랑-콜의 합의에 손을 들어주어 통독은 급진전되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소련에 있었다. 소련은 동독의 나토 가입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리고 2차 대전에서 2천만 슬라브민족의 희생으로 통독을 용납할 수 없다는 여론이 팽배했다. 콜은 고르비의 고향을 찾아가 담판했다. 닷새 동안 통독이 유럽평화에 유리할 것이라고 설득했고, 1천억 달러의 경제지원을 약속했다. 그리고 동독주둔 소련군의 철군경비와 귀국 후 군의 시설경비 부담을 약속했다. 콜은 고르비와의 담판이 통독의 고비를 넘겼다고 회고했다. 독일은 철학자 칸트의 고향인 칼리닌그라드를 영원히 러시아에 내어주는 아픔을 통일을 위해 잘 참았다.
통독을 위한 2차대전 전승강대국과 전후문제의 처리는 1990년 3월부터 6자회담(동서독,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외상회담으로, 2+4회담이라 불렀다)에서 깨끗이 마무리했다. 1990년 8월 모스크바의 6자회담은 통독비준의정서를 채택했다. 여기서 장벽붕괴가 유발한 변동의 폭풍은 위기를 넘어 총 한 방 쏘지 않고 평화적으로 매듭지어졌다. 미국의 부시, 프랑스의 미테랑, 소련의 고르비와 서독의 콜이 대정치인의 리더십을 발휘한 결과다.
유럽지도는 상전벽해처럼 바뀌었다. 대정치인들이 등장해 최악의 시나리오를 피해 위기를 기회로 대반전 시키는 평화와 자유의 역사를 창조했다. 그리하여 유럽은 20세기 냉전, 이념적 분단, 동서진영체제, 공산주의시대 등을 과거에 매장하고 21세기 새 시대를 열었다. 평화, 민주, 시장경제, 인권, 사회정의가 새 시대의 가치관이 되었다.
"독일 다음은 한국 차례이나..."
또 하나의 화약고, 한반도문제는 21세기 국제사회의 최대과제로 남았다. 한반도의 6자회담은 최근 북한이 사망을 선고했지만, 중국, 미국, 한국이 살리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북한은 한반도 비핵화선언과 9.19선언에도 불구하고 2차의 핵실험을 강행, 이제 핵보유국을 자처하고 있다.
여기서 독일문제를 풀어낸 열쇠가 공산국 지도자의 개혁의지가 결정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유럽의 기적’은 당시 대정치인들의 각고의 노력이 빚은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고르비는 페레스트로이카를 하면서 서서히 죽어가는 공산주의체제를 안락사시켜 의회민주제와 시장경제를 연착륙시키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1968년 '프라하의 봄'을 탱크로 진압한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파기함으로써, 독일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고르비는 공산정권 전복을 방임했던 것이다. 미테랑은 통독와 유럽변동의 흐름을 자연법으로 해석하고 유럽통합이라는 큰 바구니에 쓸어 담는 데 성공했다. 냉전 후의 세계에 대한 선견지명과 통독을 유럽통합기관차에 태우고 가는 리더십을 미테랑은 보였다.
콜은 통일의 유일한 기회라는 명제를 잡고 프랑스와 러시아를 국제정세의 변화를 활용해 설득함으로써 불과 326일 만에 통일로 골인시켰다. 내부적으로 헌법상 통일방식을 놓고 사민당의 146조와 기민연의 23조로 대립했지만, 콜이 후자를 밀고 나감으로써 초고속 통일을 달성했다. 146조는 국민투표를 통한 통일이고, 23조는 서독체제에 동독을 편입시키는 흡수통일이다. 콜의 선택이야말로 통독을 완결한 리더십의 결정체였다. 1989년부터 1991년 12월 소련 멸망까지 20세기를 마감한 유럽변동을 취재하면서 동독을 비롯한 동구사람들이 필자에게 한 말은 한결같았다.
“독일 다음에는 한국 차례다!”
필자도 그렇다고 답했고, 그렇게 기대했다. 그러나 “한국 차례”는 20년이 지나도 오지 않고 있다. 한반도의 6자회담은 북한 핵 폐기를 위한 것이다. 통독의 6자회담 성공과는 달리, 분단극복과 평화정착을 위해서는 아직 먼 길이 남았다. 가끔 북핵문제의 답답한 교착국면을 보면서 타임머신으로 20세기 냉전시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착각을 일으킬 때도 있다.
그러면서도 북핵폐기로 한반도평화가 반드시 올 것이라는 확신을 다짐해 본다. 이 길 밖에는 다른 선택이 없다는 것이 베를린장벽붕괴의 교훈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오바마, 후진타오, 이명박과 하토야마 등 오늘의 세계 주역들이 20년 전 대정치인들과 같은 혜안과 리더십으로 한반도문제를 평화적으로 풀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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