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메뉴 바로가기 검색 바로가기

JP모건, '신비의 베일' 속에서

[170년 비밀의 역사를 찾아서(하)] "위기때 커넥션이 드러난다"

미 국민의 분노, "JP모건의 독주를 막아라"

그러나 작용에는 반작용이 따르는 법. 다수 국민이 공황과 전쟁으로 고통받는 과정에 나날이 통제불능의 거대공룡이 돼가는 JP모건은 사회의 공적이 됐다. 권력을 얻은 대신 존경을 상실한 것이다.

대공황이 시작되면서 잭 모건 회장은 여러 차례 괴한의 습격을 받고 JP모건 사옥에는 사제폭탄이 투척될 정도로, 미국 최대 금융-산업 복합재벌인 JP모건에 대한 미 국민의 증오는 정점에 달했다.

국민의 분노가 빗발치자 정치권이 나섰다. JP모건을 방치했다가는 체제위기까지 발생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정치권은 JP모건 견제를 본격화했다.

정부와 의회는 먼저 1933년에 글래스와 스티골 의원이 공동발의한 금융독점 방지법인 '글래스스티골법(Glass-Steagall Act)'이라는 칸막이법을 제정해, 은행-증권업이 서로 상대방의 영역에 침범하지 못하도록 겸업을 금지시켰다. 동시에 이미 겸업을 하고 있던 기존의 금융기관들을 강제분리시켰다.

금융감독도 크게 강화해 1934년 증권거래위원회(SEC)를 창설, 주가조작과 허위정보의 유포를 감시하고 정보공개를 의무화했다. 또한 은행 인허가권을 갖고 있는 연방정부는 은행 신설과 점포 확장을 철저히 봉쇄했고, 뉴욕증권거래소도 강제적으로 고정수수료 체제를 도입했다.

JP모건이 당연히 금융개혁의 주 타깃이었다.

정부는 글래스 스티겔법에 의거해 JP모건사에서 증권 등 투자업무을 맡고 있던 부서를 ‘모건 스탠리’라는 이름으로 강제분리시켰다. 최근 월가 공황속에서도 살아남은 투자은행 '빅 2' 중 한 곳이다. 모건 스탠리는 JP모건의 손자뻘 되는 금융회사인 것이다.

모건 스탠리를 강제분리하면서 JP모건은 주식 채권 등 유가증권 투자를 전혀 할 수 없고 여수신 업무등 상업은행 영업만 해야 했다. 외형상 JP모건의 일대위기였다.

'초법적 존재'

그러나 JP모건은 이 모든 제도적 제약을 가볍게 무력화시켰다.

JP모건은 상업은행이 된 다음에도 다른 상업은행과는 달리 지점을 내지 않고 광고도 하지 않았다. 대신 정부와 은행, 대기업, 소수의 부유층 백인 고객만 상대하는 종전의 ‘귀족주의 영업전략’을 구사, 변함없는 금융파워를 과시했다.

JP모건은 핵심 고객에게는 자사 주식을 시세 이하로 살 수 있는 특혜를 부여하는 ‘JP 모건사 특권자 명부’를 만들어 고객을 관리해 나갔다. VIP 마케팅으로 투자은행 업무를 금지시킨 법을 무력화시키면서, 수면 밑에서 부를 계속 불려나간 것이다.

실제로 다른 일반 상업은행들은 예대마진을 주된 수입원으로 하는 영업행위에 만족해야 했던 것과 달리, JP모건만은 수익의 대부분을 정부와 우량대기업 및 은행에 대한 대규모 대출, 증권발행 주선, 외환이나 기타 금융상품의 거래업무 등에서 얻었다.

JP모건은 법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초법적 존재였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정부는 전쟁채권 발행 등 생명선이 걸린 모든 업무를 JP 모건에 의존하고 있었고, 미국 대통령선거 때도 JP모건의 눈치를 봐야 하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미국의 진보화가 린드 워드는 JP모건을 '수전노'로 묘사했다. ⓒprogressiveliving.org

JP모건 '신비의 베일' 속으로...그러나 바젤, 월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JP모건은 또 한차례 내부위기에 직면했다. 그해 3월 12일 잭 모건이 숨을 거둔 것이다.

뒤를 이어 모건 3세인 주니어스 스펜서 모건이 등장했다. 주니어스는 이미 모건그룹의 자회사인 제너럴모터스(GM)와 U.S. 스틸의 이사를 거치면서 후계자 수업을 단단히 받은 상태였다.

하지만 이후 국제금융계에서 '주니어스 스펜서 모건'이란 고유명사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일각에서는 주니어스의 역량이 조부나 부친보다 떨어져 모건 일가의 시대가 끝난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번거로운 노출을 피해 좀더 깊숙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을 뿐, 그 영향력은 지금도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다는 게 국제금융계 정설이다. 이같은 안전장치는 1930년 대공황 때 잭 모건에 의해 마련되었다.

1930년 5월 미국·영국·프랑스·이탈리아·독일·벨기에 등 6개국이 참여한 가운데 스위스 바젤에서 BIS(국제결제은행)가 설립되었다. 이 기구의 목적은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인 독일에게서 전쟁배상금을 받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BIS 설립 구상을 내놓고 이를 조직한 막후세력이 다름 아닌 잭 모건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과정에서 자유채권 판매를 대행해 영국-프랑스의 전비 조달업무를 맡았던 잭 모건은 미국 대통령이던 후버와 함께 미국측 협상대표로 직접 독일배상회의에 참석했다. 그는 여기서 패전국 독일에 큰 선심을 썼다. 독일이 배상금으로 지불해야 할 2천260억 마르크를 1천억 마르크로 대폭 깎아줬다. 지불시한도 59년 동안으로 늘려주는 등 전쟁 뒷마무리 협상을 깔끔히 매듭지었다. 독일은 잭 모건의 배려를 두고두고 고마워했다.

설립 목적인 배상협상이 끝난 뒤에도 BIS는 그대로 스위스에 그대로 존속되었다.

그후 독일의 유럽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독일의 나치는 유럽 전역을 휩쓸었으나 단 한곳 스위스만은 손대지 않았다. JP모건에 대한 독일의 감사 표시라는 해석이 있다.

그후 스위스는 전세계의 블랙 머니가 모여드는 국제금융의 파워 센터가 되었으며, BIS가 소재한 스위스 바젤은 ‘국제금융계의 크레믈린’으로 불리고 있다. 지금도 매달 첫째 주 일요일 저녁에는 G-10의 중앙은행 총재들이 바젤에 모여 계속 비밀회합을 갖고 있다. 한국을 비롯해 전세계 중앙은행 총재와 간부들도 수시로 이곳에 모여, 세계경제 운영 방안 등을 논의하고 있고 새로운 국제 금융감독 방식 등도 생산해내고 있다.

바젤이 이처럼 지금까지 계속 국제금융계의 크레믈린으로 군림하는 이유는 뭘까.

국제금융계에서는 BIS 막후에 JP모건이 있기 때문이 아니냐고 해석하고 있다. 1930년 BIS 설립 당시 JP모건은 미국에서 큰 수난을 당하고 있었다. 대공황에 분노한 군중은 금융-산업공룡인 JP모건을 적대시했다. 잭 모건은 수차례 괴한들의 습격을 받았으며 JP모건사에는 폭탄이 투척되었다. 더 이상 표면에 나서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한 JP모건이 서둘러 베일을 치기 시작했으며, 그 결과물이 바로 서방 중앙은행들의 결집체이자 최고 의결기구인 BIS가 아니냐는 해석이다.

이같은 추정이 얼마나 정확한지는 확인할 길 없다. 국제금융계의 크레믈린이라 불릴 만큼 BIS 건물 안에서 이루어지는 내밀한 작업은 외부에 전혀 공개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JP모건은 지금도 변함없이 세계 금융을 쥐락펴락하는 가공스런 힘이라는 사실이다.

국제금융계의 격언중 하나가 "위기때 커넥션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최근 월가 파산 위기때 JP모건은 월가의 위기 해결사로서의 실체를 드러냄으로써 이 격언을 입증했다. JP모건은 나서지 않을뿐, 월가의 진정한 숨은 지배자임을 이번에 다시 한번 보여준 셈이다.
박태견 기자

관련기사

댓글이 4 개 있습니다.

  • 14 20
    모여

    JP모건 체이스
    이게 진짜 JP 모건이지.

  • 20 13
    허참

    모건-스탠리의 모건은?
    그게 바로 모건이요

  • 21 15
    111

    JP 모건의 창업자는 투신사와영세은행을 구제를 도왔지만
    JP모건을 움직이는 이는 2세인가. 대형은행 구제중심
    JP모건도 위험에노출.. 천민들의 소득이 증가 중산층으로 이동
    소비왕성 좌파정책쓴 브라질 ~~.

  • 33 22
    신성우

    신선한 기사였습니다.
    최근의 금융위기로 인해 상위랭크를 달리고 있는 은행들이 위기에 처해 있는데
    유독 JP모건만 이름이 없어 의아해했어요..
    이기사를 보니 이제야 이해를 할수있었네요..
    공부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 맨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