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에 난무하는 '위기설', 그 실체는?
<심층 분석> 금융계-재계 '각종 위기설' 확대재생산중
위기설 1. '외환유동성 위기설'
김종창 금융감독원장이 5일 거듭 '9월 유동성 위기설'은 근거 없는 억측이라고 강력 부인했다. 김 금감원장은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9월 만기 외국인 보유 채권의 규모가 8조원대에서 6조원대로 줄어든 데다 이들이 보유한 채권은 대부분 국고채나 통안채로 안정적이고 다른 시장에서도 투자대상이 마땅치 않아 대규모 자금 이탈은 없을 것으로 본다"며 이같이 말했다.
김 금감원장이 강력 부인한 '9월 유동성 위기설'의 골자는 외국인들이 9월에 만기가 도래하는 단기채권을 대거매도, 달러부족으로 환율와 금리가 급등하는 금융혼란이 초래될 것이라는 것. 하지만 액수도 우려보다 적고, 대거이탈 가능성도 없는만큼 걱정할 게 없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문제는 정부가 앞서도 여러 차례 같은 설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금융계-재계에서 좀처럼 위기설이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시장이 불안감을 느끼는 이유는 최근 들어 외국인들이 채권도 팔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외국인들은 7월에 국내 상장주식을 6조3천억원 어치 순매도했으며 상장 채권시장에선 2년5개월 만에 순매도로 돌아서 2조7천억원 규모를 팔아치웠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오는 9월 외국인이 만기도래할 채권을 안팔 것이란 김 금감원장 주장을 믿기 어렵다는 게 시장 반응이다.
위기설 2. '건설사 연쇄도산설'
시장을 더 불안케 하는 것은 지금 나도는 위기설이 외국인 만기채권 도래에 따른 금융계의 '9월 유동성 위기설'뿐만이 아니라는 데 있다. 대표적 예가 건설업계 스스로가 공공연히 주장하는 '9월 연쇄도산설'이다. 자금 수요가 큰 9월 추석때를 전후해 건설업체들이 무더기 도산할 것이란 주장이다.
건설업계 자금난의 근원은 미분양 아파트 사태다. 공식집계로는 13만채가 미분양이고, 건설업계 주장으론 미분양이 25만채에 달한다. 건설업계는 미분양 1채당 평균 2억원의 자금이 묶이는 것으로 계산한다. 50조원 가량이 묶여있다는 얘기다.
미분양이 몰고올 부도대란의 골간은 프로젝트파이낸싱(PF). PF 규모는 올해 3월 말 73조원으로 불어났다. 73조원 가운데 은행이 43조9천억원으로 가장 많고 저축은행 12조4천억원, 보험사 5조원으로 뒤를 이었다.
심각한 대목은 올 들어 저축은행을 중심으로 연체율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는 사실이다. 저축은행들의 PF 대출 연체율은 작년 말 11.6%에서 올해 3월 말 14.1%, 4월 말 15.6%, 5월 말 16.0%로 뛰었다. 저축은행의 PF 대출은 전체 여신의 24%를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크다. PF가 한번 삐끗하면 건설사는 물론, 저축은행 등 금융기관도 연쇄도산한다는 얘기다.
이에 정부는 금융계를 상대로 만기가 도래하는 건설업계 대출금의 상환시기를 연장하는 협약을 추진중이나 금융기관간 이해관계 차이로 계속 난항을 거듭하고 있다. 또한 극적으로 협약을 체결하더라도 외국에 마치 1997년 기아사태때 '부도유예 협약'을 연상케 하면서 악재로 작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위기설 3. '대기업 유동성 위기설'
건설사가 아닌 일반 기업들도 위기설에 휩싸여 고통을 겪기란 마찬가지다. 최근 가장 대표적 예가 금호아시아나그룹을 필두로 지난 몇년간 M&A(기업인수합병)로 급속히 외형을 키운 기업들이 겪고 있는 위기설이다.
이 위기설은 이들 기업이 주가가 하락하더라도 원금을 보장해주는 풋백옵션을 남발한 데 따른 인과응보 성격이 짙으나, 아직 만기가 도래하지 않았음에도 이들 기업에 대한 위기설이 확산되면서 연일 주가 급락, 회사채 발행 난항 등의 부작용을 낳고 있다는 데 그 심각성이 있다.
상황이 심상치 않자, 위기설에 휘말린 기업들은 자산 매각 등을 통해 현금 확보에 전념하고 있으나 부동산 시장 등이 꽁꽁 얼어붙어 계획대로 매각도 쉽지 않은 상황이어서 기업들을 한층 초조케 하고 있다.
여기에다가 최근 외국 선주들의 잇따른 선박 발주 포기로 발발한 '조선주 쇼크'나, 반도체 불황에 따른 '하이닉스 유동성 위기설' 등 업황 악화에 따른 위기설에서부터 베트남 국가파산시 몇몇 대기업들이 조 단위의 거액을 물리게 될 것이란 '베트남 위기설'에 이르기까지 대기업들을 괴롭히는 위기설은 한둘이 아니다.
대다수 대기업들이 IMF사태와 비교할 때 부채비율을 100% 전후로 획기적으로 낮추었고 많은 현금을 확보하고 있음에도 위기설의 도마위에 속속 오르고 있는 양상이다.
기타 위기설. 펀드런, 내수업체 도산설 등등
지금 세간을 휩쓸고 있는 위기설은 이밖에도 부지기수로 많다. 중국 등 해외 신흥시장 주가폭락에 따른 '펀드런(환매사태)' 가능성이 금융계를 불안케 하고 있는가 하면, 출판 등 내수중소기업에선 굴지의 출판사들까지 자금난을 겪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로 거의 모든 업종의 분위기가 흉흉하기 짝이 없다. 재래시장 자영업자나 농어민 등이 겪고 있는 고통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경제학 교과서에 흔히 나오는 비유가 '물이 반 정도 찬 컵' 얘기다. 시장 분위기가 좋을 때는 "물이 반이나 남아 있네"라고 바라본다. 분위기가 나빠지면 "물이 반밖에 안 남아 있네"라고 불안해 한다. 지금 상황은 후자쪽에 가깝다.
경제심리가 이렇게 나빠진 데는 '리더십' 책임도 적지않다. 지금 위기는 지난 10년간 글로벌 호황을 이끌었던 자산거품 파열에 따른 고통이자, 원자재값 폭등이 초래한 인플레 고통이다. 불가항력적 측면이 강하다. 그러나 이때 나라살림을 책임맡고 있는 정부가 상황을 오판함으로써 고통을 증폭시킨 측면도 병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감한 인책 등의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서 정부 리더십에 대한 시장 불신을 키운 게 객관적 현실이다.
불행중 다행은 최근 국제유가 등 '상품거품'이 급속히 빠질 조짐을 보이며 위기의 강도가 완화될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를 마지막 기회로 받아들여야 한다. 조금 상황이 완화된다고 다시 긴장을 풀었다가는 말 그대로 끝이다. 글로벌 경제가 겪고 있는 고통은 아직 '확대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는 우리 경제에는 위기를 최소화할 수 있는 힘이 남아있다. 하지만 시장과 국민이 신뢰할 리더십이 확립되지 못한다면 두번 기회는 오지 않을 것이다. 폭풍속에서 배를 이끌어갈 믿을만한 선장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정부부터 과거의 잘못을 철저히 자성하며 시장과 국민과 소통하는 리더십을 확립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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